말 그대로 일심동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요 제작진은 엄태화 감독이 요청한 영화 고유의 설정과 흐름을 지키기 위해 하나의 마음으로 움직였다. 각자의 방법론은 다를지라도 지향점은 같았던 셈이다. 이로써 대재난을 마주한 디스토피아 세계의 사실적 외견과 <콘크리트 유토피아>만의 특이한 장르적 컨셉이 안정적으로 공생할 수 있었다. <씨네21>이 만난 조형래 촬영감독, 조화성 미술감독, 은재현 VFX 슈퍼바이저, 김해원 음악감독, 송종희 분장감독은 촬영이 한창이던 2021년 연천의 여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잿빛 디스토피아를 구현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촬영장에는 늘 커다란 천막이 펼쳐져 있었다. 특히 운동장 크기의 황궁 아파트 중정에는 대규모 트러스(부재가 휘지 않게 접합점을 핀으로 연결한 골조구조)를 설치한 후 천을 뒤덮어 지붕을 만들었다. 햇빛을 막아 잿빛 화면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극중 대재난이 현실에 발생하면 온 하늘이 구름과 먼지로 뒤덮이고 직사광선이 없어지더라. 그래서 촬영 시에도 항상 태양광을 통제했다.” (조형래 촬영감독) “영화가 아니라 건축이나 기상을 공부하는 게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몇 날 몇 시에 태양이 어느 위도와 경도에서 뜨는지 정리해 외부 광원을 예측했고, 이에 맞춰 VFX에 필요한 최소한의 광량을 직사광선 없이 확보했다.” (은재현 VFX 슈퍼바이저)
빛은 통제했으나 실제 촬영 시기의 더위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잖아도 더운 날씨에 장마가 겹친 터라 천막 아래는 “한증막처럼 푹푹 쪘다”(조형래 촬영감독). 물리적 더위는 분장작업에도 지장을 가져왔다. “아파트 주민은 조금 더 선명하고 밝은 톤으로, 반면에 외부인은 먼지와 때에 찌든 흐릿한 톤으로 얼굴 색감의 레이어를 쌓았다. 영화의 리얼리티에 꼭 필요한 요소인데 흐르는 땀 탓에 분장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다.”(송종희 분장감독)
대재난의 현실성을 추구하기 위해
대지진이 일어난 서울의 모습을 현실처럼 구현하는 것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대전제였다. 이런 이유로 철거가 예정돼 있던 경기도 외곽의 아파트를 이용했다. “3~4층짜리 건물 한가운데를 통으로 잘라서 절단면을 감리하고 철근과 전선을 늘어뜨렸다. 더불어 백화점 간판이나 현수막, 유리창이나 창틀을 별도로 제작해 세트를 완성했다.” (조화성 미술감독) 보통 영화미술에서는 시멘트 조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밀도 스티로폼에 불을 그을리는 등 조작을 가하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일부 장면에 실제 콘트리트 덩어리와 분진을 활용했다. “영화의 장면 장면이 정말 현실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조화성 미술감독)다.
VFX 화면의 현실성도 놓치지 않았다. 배우가 직접 발을 디디거나 만지는 곳을 제외하고 모든 장면의 배경 이미지부터 길거리의 시신 등 전부 CG로 제작했다. 이후에 미술 세트나 소품과 비율을 배합해 아날로그 이미지와의 괴리를 줄여냈다. 아무런 세트 미술 없이 배경을 채워야 하는 장면에선 매트 페인팅(실사 장면과 애니메이션을 결합해 영화 속 공간을 구성하는 고도로 사실적인 그림)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2D와 3D가 혼합된, 최대한 사실적인 이미지의 구현”(은재현 VFX 슈퍼바이저) 이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인물들의 사소한 외양까지도 영화의 현실감에 이바지했다.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의 집에 찾아온 아이 주몽이는 늦둥이란 설정이 있었다. 그래서 재난 상황임에도 어머니가 애지중지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고, 이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끔하게 분장해 차별화했다.”(송종희 분장감독)
사회적 현실까지 반영한 로케이션
황궁 아파트의 위치는 3호선 금호역 인근이다. 황궁 아파트의 구체적 지리뿐 아니라 주변 아파트 단지의 구성까지도 실제 지도를 각색해 만들었다. 민성이 대지진을 마주하는 곳 역시 근처의 약수역 일대로 설정됐다. 이에 “약수역 주변의 장충체육관이나 커다란 아파트, 빌라의 모습을 직접 스캐닝해 활용했다.”(은재현 VFX 슈퍼바이저) 산을 뒤로한 채 지하철역, 학교와 멀찍이 떨어진 황궁 아파트의 위치를 보면 왜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역세권 드림 팰리스의 주민들을 미워했는지 짐작이 간다. 씁쓸한 사회적 세태까지 반영해낸 지형도다.
블랙코미디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모종의 변곡점을 계기로 작품의 톤 앤드 매너를 전환한다. 전반부는 재난 속 인간 군상을 희화화하는 블랙코미디의 향취가 짙다. 때문에 영화의 초반엔 유머러스한 음악이 깔린다. 카미유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를 참고해 우화적 뉘앙스를 가미하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군상극을 레퍼런스로 삼았다. 또 고전영화와 애니메이션풍에서 인물의 행위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소리를 애용했다. “이른바 ‘미키마우징’ 기법이다. 초창기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미키마우스의 슬랩스틱과 액션을 끼익~ 하는 효과음으로 형상화하지 않나. 자칫 위험할 수 있는 방식이지만, 영화 전반부의 톤을 효과적으로 잡아주고 싶었다.” (김해원 음악감독)
영화의 오프닝, 민성이 무너진 서울을 보는 장면에서도 배경음악은 대위법적으로 사용했다. 애초엔 묵시록에 어울리는 음악을 썼으나, “정말 새 아침이 밝았으며 꿈에서 덜 깬 사람이 이를 보고 좋다고 느끼는 분위기”(김해원 음악감독)로 변경했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행복한 일상을 공익광고처럼 보여주는 시퀀스에선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 왈츠>를 사용했다.
분위기 반전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요소 중 하나는 조명이다. 설정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므로 대개 조명은 양초, 손전등, 탁자 위 램프 등으로 구현됐다. 이 덕분에 명암의 대조와 그림자의 통제를 통한 극적 분위기 조성이 가능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날카롭고 거센 표현주의적 조명을 사용했다. 관객이 불편하게 느낄 정도의 강렬함을 주고 싶었다.”(조형래 촬영감독) 이러한 조명 컨셉의 백미는 영탁(이병헌)이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던 축제 장면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로 앵글 조명으로 배치했고, 이로써 춤추고 즐기는 주민들의 모습이 기괴한 그림자 춤으로 표현됐다.
재난물의 상투를 탈피한 장면들
종래의 재난영화와 다른 <콘크리트 유토피아>만의 특질을 추구하는 일 역시 제작진의 공통 목표였다. 이를테면 황궁 아파트 주민과 외부인들이 시위 현장의 일면처럼 격돌하는 장면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카메라는 특정 인물을 부각하지 않고 전체를 조망한다. “흔히 재난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묘사하면 핸드헬드를 두드러지게 사용해 의도적으로 프레임의 역동성을 키운다. 또 주인공 위주로 초점을 맞추고 숏 사이즈를 조절한다. 하지만 우린 딥포커스나 적절한 컷 전환으로 조·단역들이 어디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지, 또 어떻게 싸우며 폭탄을 만들고 있는지를 최대한 보여주려 했다.” (조형래 촬영감독) 모든 인물이 취하는 행동의 정보를 관객에게 제공함으로써 일종의 서스펜스를 구현한 것이다.
최근 영화음악의 타악기로 흔히 퍼커션이나 저음 악기들을 쓴다. 그러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러한 경향성에서 벗어나고자 북이나 팀파니의 소리 질감을 이용했다. “여러 사람이 뒤엉켜서 싸우는데, 사실 그것이 하찮고 우스워 보이면서도 그들에게는 생명이 달린 큰 문제인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싶어서 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의 색다른 타악기들을 사용했다.” (김해원 음악감독)
민성과 명화의 과거
박서준, 박보영 배우는 민성과 명화의 과거를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행복했던 커플, 신혼부부의 전사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디스토피아와 대조되며 재난 후 상흔의 밀도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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