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줄 알았다. 분명 ‘영화란 무엇인가’에 해당하는 다섯 작품을 보내달라고 부탁했건만 인터뷰 전날 이준혁으로부터 열 작품이 도착했다. 두배에 달하는 목록을 보고 참 그답다 싶었다. 많이 알려진 대로 배우 이준혁은 영화 보기를 사랑한다. 지난 몇년간 이준혁의 시네필리아를 지켜보면 이따금 그가 영화를 사랑하다 못해 두팔 걷어붙이고 영화 사이에서 중매를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는 어제 본 영화가 좋았으면 어떻게든 남에게 소개하려 하고, 꼭 만나보라는 투로 이 영화의 장점을 곁들인다.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영화를 엮어내며 영화끼리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어질 대화도 마찬가지다. <가타카>와 <아노라>, 니콜 키드먼과 마동석은 어떻게 어울릴까. 전혀 다른 작품, 배우도 영화에 대한 이준혁의 순정이면 절로 궁합이 점지된다.

-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만 해보자.
각 잡고 이야기하려니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의 목록은 직감으로 떠올렸다. 예전엔 인생 영화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영화들도 있어서.
- 인생 영화의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지 않나. 영화 한편이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까.
정확히 그 이유로 인생 영화를 꼽기 어렵다. 감상 당시 내가 겪은 일과 유사한 이야기가 우연처럼 펼쳐져 영화에 감화될 수도 있지만, 삶의 단면과 무관한 영화도 나의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도 있다. 오늘은 근래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 영화를 가져왔다.
나를 지키기 - <가타카> <아노라> <컨택트>
<가타카>
- <가타카>에 관한 애정을 종종 피력해왔다.
처음엔 우생학을 근거로 사회에서 소외되는 빈센트(에단 호크)가 어떻게든 체제 내에 편입되려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빈센트가 샤워하면서 자신의 각질을 벗기는 장면 있지 않나. 막 배우가 됐을 무렵 산업 시스템과 나를 치열하게 맞춰가던 때 이 장면이 그렇게 가슴에 남더라. 결국 원하는 바를 이뤄낸 빈센트에게 박수를 보냈고. 그런데 요즘은 빈센트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 맞는지 고민이 된다. 빈센트는 온전한 자신이 아닌 제롬(주드 로)의 신분으로 우주로 향했고, 지구로 복귀한 이후 빈센트의 삶은 영화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연기를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를 바꿔나간다. 그렇게 나를 바꾸어 체제 속으로 들어갔지만 이후엔 나를 둘러싼 사회 전반이 빠르게 변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서 있는 위치에서 매번 무얼 고민해야 하는 걸까. 지금 내린 결론은 나를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아노라>를 볼 때 <가타카>를 생각했다.
- 두 영화가 어떻게 닿아 있나.
<가타카>를 처음 볼 때만 해도 나를 지워서라도 꿈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보다 좋고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애니(마이키 매디슨)는 결국 ‘아노라’로 영화 끝에 남는다. 직업 전선에서 자기를 투신하고, 반야(마르크 예이델시테인)와의 만남을 통해 값져 보이는 체제 안에 들어가려 전력투구하다가도 결국 끝에 이르러서는 나를 수호하는 일이 가장 가치롭다는 걸 인정한다.
- <아노라>가 결말에서 자기를 지켰다고 보나. 워낙 해석이 분분한 결말인데.
애니는 자기 위에 덧씌운 수많은 껍데기를 제거한 후 오롯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고르(유리 보리소프)의 시선을 경험한다. 그때 애니가 스스로를 지켜냈을 것이라고 본다. 많이들 내 이름 앞의 직업인 연기자를 먼저 보고, 나 역시 직업의 특수성을 앞세워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나를 배우 이준혁이 아닌 인간 이준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만난 적 있는지, 나도 온전한 이준혁으로 누군가의 앞에 선 적이 있는지 영화를 본 후 돌이켜봤다.
- <가타카>에 두 차례 등장하는 빈센트와 안톤(로렌 딘)의 수영 대결은 어떻게 기억하나.
내가 연기하는 모든 작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질주한다. 빈센트처럼 늘 숨이 차도록 달리고 헤엄치려고 노력한다. 애니도 숨 가쁘게 달리는 친구다. 빈센트가 트레드밀 위에서 죽도록 뛰다 숨을 몰아쉬는 장면이나, 애니가 복잡한 날을 보내고 전철에서 기진한 표정을 보일 때 여러 상념이 든다. 만약 누군가가 <가타카>가 인생 최고의 영화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고된 시간을 버티는 힘을 선사한 영화임은 확실하다. 그렇게 영화가 나에게 질문을 남긴다. 다음엔 무엇이 있지? 시스템과 구조 바깥의 네겐 무엇이 남지? 나는 어느새 빈센트보다 나이도 많고 우주선 가까이에도 언젠가는 도달할 텐데, 그 너머까지 향하려면 결국 <아노라>처럼 나를 직면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노라>는 <가타카>로 치면 우주선 탑승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
- 골라준 <컨택트>를 이야기에 오버랩해보면 SF영화의 기조에 관해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상과학 속 단일 주인공은 늘 선택의 주체고, 기실 그 선택은 취사보다는 감당에 가깝다. <컨택트> 속 루이스(에이미 애덤스)의 마지막 결단이 대표적이다.
우린 모두 삶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산다는 건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컨택트>는 살면서 내린 수많은 선택이 만들어내는 확률까지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위로로 다가오는 영화다. 경로 이탈의 순간에 다시 돌아갈지언정 그 길에서 얻는 것만은 분명하다. 루이스는 끝을 알고도 고결한 길을 걷는데, 그게 비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길 위에서 얻는 수많은 경험과 그 안에서 파생되는 무수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 내리는 결정이 사무쳐 볼 때마다 운다. 선택하고 선택받는 직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 드니 빌뇌브는 어떤 감독인가. <컨택트> 이후로 확실히 할리우드의 스페이스오페라를 책임지는 이름이 됐다.
그의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컨택트>에서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조우하는 첫 순간처럼,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동안만큼은 나를 다른 세상으로 실어 나른다는 감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이름이다. <듄>의 샤이 훌루드 구현은 말하기에도 입 아프다
.
선을 넘는 사랑 - <콜드 워> <챌린저스> <팬텀 스레드>
<챌린저스>
- <콜드 워>와 <팬텀 스레드>를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챌린저스>는 조금 의외다.
도파민덩어리였다. 매 장면이 뒤통수를 때리고 숏이 숏을, 프레임이 프레임을 배반하는데 끝내 수미상관까지 맞춰내는 생동감이 짜릿했다. 게다가 테니스처럼 선을 넘으면 안되는 스포츠를 다루면서 선을 넘는 영화라 좋더라.
- 세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연인을 이겨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
그런 사람들이 또 연애 외의 일상은 건강하게 산다. (웃음) 보통 매력의 수신자와 발신자 중 발신자가 더 집착한다. 달리 생각하면 발신자는 일방적으로 상대의 매력을 받기 때문에 관계에서 사랑을 더 누릴 수 있다. 집착하는 만큼의 행복을 가져가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다 <팬텀 스레드>의 알마(비키 크리프스)처럼 자신의 매력을 발견하기도 한다. 결국 어떤 관계든 나를 찾고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
- 하긴 연애의 최대 효용은 끝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데에 있다.
늘 그 점을 상기하려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상대에게 나의 좋은 구석을 선물할 수 있다. 이는 좋은 영향력과도 관련이 있다. 마냥 풀어져 있으면 편하겠지만 내가 부모거나 직장 상사라면 어떤 때엔 스스로를 통제하는 프로페셔널함을 보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좋은 아빠, 선배라고 믿는다.
<콜드 워>
- <챌린저스>와 <콜드 워> <팬텀 스레드> 모두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상대의 재능에 사로잡힌 나머지 연애를 승부로 인식하는 독특한 로맨스다.
나의 존재가 상대를 온전히 채울 수 있는 사랑, 상대의 재능에 예술적 영감을 주는 사랑 이야기에 끌리는지도 모른다. <콜드 워>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파리에서 줄라(요안나 쿨리크)가 클럽에서 공연을 하는 장면이다. 남편이 한 공간에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빅토르(토마시 코트)에게 달려가는, 선을 넘는 순간이다. 영화관 바깥에선 마땅히 규범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옳다. 그런데 영화관 안에선 작품이 선을 넘을 때 발생하는 카타르시스가 좋다. 그리고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볼 때면 내게 질문한다. 이준혁, 넌 그럴 수 있니?
- 세 작품 모두 국영수보다는 예체능에 능한 자들의 사랑 이야기다. 예술가가 주인공인 멜로는 관객과 창작자들에게 유달리 사랑받는다.
극대화하기가 좋은 이야기이고 시각적으로 구현할 장면이 많기 때문일까. 감독이나 작가가 예술가이기 때문에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라 여겨 만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 예술이든 사랑이든 완벽한 성취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화로 대리만족하는 걸 수도 있고.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보면, 관계 안에 극단적인 규칙이 존재해도 예술가들이 게임의 주체라면 관객들이 쉽게 납득하는 것 같다. 확실히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려는 영화가 예전엔 많았던 것 같다. 마침 사회가 천재 한명을 칭송하는 분위기도 강했고. 유행은 돌고 도니까 언제든 다시 나오지 않을까. “나는 완벽했어요”라는 <블랙 스완>의 마지막 대사가 예술가들이 근본적으로 품는 환상 같다. 어떤 배우든 작품을 할 때만큼은 완벽하게 마치고 싶어 하니까. 그래서 <바빌론>에서 완벽과 거리가 먼 촬영 현장에 나비가 날아들어 방점을 찍는 장면에서 펑펑 울었다.
<바빌론>- 자연스럽게 <바빌론>으로 넘어갔다. 온갖 오물 범벅 속에서 영화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 40시간 근로제가 업계 전반에 정착하기 전, 그날 방영본을 그날 촬영하던 옛 생각도 했다.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거였다면 대체 그때는 왜…. (웃음) 하지만 누군가는 치열하게 작품을 만들어간 과거를 또렷이 기억한다. 양가적인 마음이 든다. 영원할 줄 알았던 세상의 법칙은 너무 쉽게 변하지만, 그때의 난장판이 없었다면 지금도 없다. 넬리(마고 로비)가 촬영장에서 겪는 좌충우돌이나 촬영장에 나비가 날아드는 장면에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다. 적어도 현장에서 나비가 우연히 포착된 순간은 어떤 인공지능도 만들어낼 수 없으니 말이다.
- 촬영 현장 자체가 통제 밖 사건의 연속 아닌가. 예술이 갖는 최선의 아름다움이 우연을 통해 완성된다고 믿나.
믿는다. 그리고 변수가 존재하는 게 곧 삶이기 때문에, 불완전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인간이 만들어가기 때문에 인간이 만드는 예술이 필요하다.
- 데이미언 셔젤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예술가의 전형이 있다. <위플래쉬> <라라랜드> <바빌론>까지. 개인의 성취를 위해 일상도 사랑도 모두 멈추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의 예술관에 동의하나.
그 성취를 성공과 직결한다면 통용되는 문법에 나를 맞추는 게 얼마간은 가능하다고 본다. 한데 체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 보내준 영화 중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도 있었다. <머니볼>도 좋아한다고 여러 차례 고백했던 걸로 기억한다. 1990년대 할리우드 키드에게 브래드 피트가 지니는 별수 없는 노스탤지어가 있을 텐데.
우선 피사체가 근사하니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꿈같은 배우였다. 그런 배우들이 있다. 동경하다 보니 이 배우가 고르는 필모그래피가 내가 걸어야 할 정답처럼 느껴지는. 무비 스타의 마지막 계보인 브래드 피트, 톰 크루즈를 좇다 배우가 됐는데, 이제 대세는 또 티모테 샬라메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나는 어떻게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줄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파벨만스>- 함께 골라준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또한 영화 만들기에 관한 메타 영화다.
<파벨만스>는 보고 난 직후보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내 안에 은은하게 자리 잡았다. 영화 팬의 정체성과 카메라에 찍히는 사람(배우)의 정체성을 모두 가진 사람이라 그런지 이 작품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이야기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새미(가브리엘 라벨)는 물론 자기를 왜 이렇게 멋있게 찍었냐며 울분을 토하는 로건(샘 레흐너)의 부끄러움까지 이해가 간다.
- 연기 모니터링을 쑥스러워하나.
그보다는 CF 속 내 모습을 볼 때 ‘이게 말이 돼?’ 싶다. (좌중 폭소) 작품엔 그 시절의 내가 남지 않나. 촬영 당시 내가 본 영화에 영향을 받은 내 모습까지 그대로 되살아난다. 로건을 멋들어지게 찍는 새미의 프레이밍이 꼭 스필버그의 다른 영화 같다.
- 구체적으로 들려달라.
모든 작품이 그렇진 않지만, 스필버그 감독만의 휴머니즘이 있다. 영화가 세계의 참상을 다룰 때, 모든 영화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여야 할까? 스필버그에겐 <쉰들러 리스트>가 있는데. 영화가 사실과 진실 사이를 오가는 매체라면, 다소의 희망이 삶의 의지를 더해주는 픽션에 마음이 간다. 우리에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악보다 오스카 쉰들러(리암 니슨)의 선의가 필요하다. <액트 오브 킬링>은 걸작이다. 하지만 <액트 오브 킬링>만 걸린 영화관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한 감독의 세계와 영화의 본질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게 건방져 보일까 싶어 조심스럽지만 웬만하면 어떤 영화든 그 영화의 방법론을 옹호해주고 싶다.
<피닉스>- 그 순애보가 늘 신기하다. 같이 영화를 보고도 내가 마뜩잖게 본 구석을 말하면 당신은 늘 작품의 예쁜 구석을 찾아준다. 산업 내부에서 전후 사정을 아는 사람의 지지 유세와는 다른 결의 칭찬이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좋아서 그렇다. 데니스 퀘이드가 주연한 <피닉스>(2004)를 기억
하나. 금방 잊힌 액션 블록버스터고, 좋아하는 관객도 그리 많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볼 때 말도 안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기분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허술함의 극단을 달리는 영화가 싫지 않았다. 엇박으로 뛰는 영화에도 미덕은 있고, 그 미덕이 우리 사이의 대화 주제를 제공한다. <레전드 오브 타잔>(2016)을 본 날 내가 무얼 보고 있나 싶어 당황했다. 그렇지만 하나는 챙겼다. 그 안에서 크리스토프 발츠가 명연을 펼치거든. 발츠의 연기는 건진 셈이니 이 영화의 좋은 점이 내 안에 훅 들어온다. 전세계적으로 영화 산업 전반이 좀 아프다. 그럴수록 내가 사랑하는 영화를 좀더 보듬고 싶다. 어떻게 매 끼니를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먹나. 달달한 디저트가 당기는 날도 있는데. 불량식품도 맛있게 먹으려면 맛있다.
- 애덤 샌들러나 캐머런 디아스처럼 출중한 배우가 소위 팝콘무비에서 자신의 재능을 전방위로 발휘하는 걸 지켜보는 즐거움도 있으니까.
윌럼 더포를 존경한다. 그런데 그분의 열연을 매일 볼 수는 없다. 배리 키오건 못지않게 등장만 하면 우선 불안한 얼굴인데, 그런 배우가 <노스페라투>(2024)에서 정의롭게 나오니 좋더라.
- 언급한 두 영화 모두 규모에 한해 극장 경험을 요하는 작품이긴 하다. 영화의 ‘권위’가 지금과 다른 시절의 영화고.
그맘때의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다. <스폰> (1997) 속 스폰(마이클 제이 화이트)이 정말 멋진 히어로였는데 누가 리메이크하거나 다시 극장에서 틀어줬으면 좋겠다. <배트맨 포에버> (1995)도 깔깔거리며 다시 극장에서 만나면 어떨까. 좋아하는 배우가 슈퍼히어로로 나온다고 평과 무관하게 설레며 극장에 갈 때의 감흥도 좋았다. 벤 애플렉이 좋아서 <데어데블>(2003)도 보러 갔는데…. (웃음)
- 언젠가 따로 <추락의 해부>의 산드라(잔드라 휠러)의 진술이나 <오펜하이머>의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심사를 연기의 메커니즘으로 독해한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흥미로웠다. <파워 오브 도그>의 삼촌 관계를 스타덤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배우의 자아를 투영해 작품을 읽어내는 관점은 배우 경력이 쌓인 이후 생긴 건가.
그럴 수도 있다. 특히 20대 중반부터는 계속 배우로 일을 했으니 아무래도 관람 당시의 나를 거쳐 영화를 보는 습관이 굳어졌을 것이다. 어릴 때야 막무가내로 봤다. 하교 후에 심심하니까 비디오 대여점 진열장에 꽂힌 테이프를 있는 대로 고르는 재미가 컸다. 그때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그냥’이었다. 그 그냥이 매일 반복되고 잦아지며 취향이 자랐다.
- ‘그냥’의 양을 누적하며 질의 변화를 경험했나.
그렇게 영화와 친구가 됐다. 이 친구가 때론 공감하는 이야기를, 때론 끔찍한 이야기를 건넨다. 내 사고의 방향을 급전환시키기도 한다.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많이 전하는 친구라 어느 순간 만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겼다. 좀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출연한 작품보다 훨씬 좋은 영화를 극장에서 만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좋은 영화가 내게 힘을 주고 배우로서 다음 꿈을 꾸게 한다. 그 마음을 갖고 촬영장에 가면 또다시 사람끼리 부대끼며 영화를 찍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딪힘, 이 경험이 어떤 영화보다 덜 영화적이라고 말할 순 없다.
강한 사람, 압도적 존재감 - <도그빌> <서브스턴스>
<도그빌>.- 지지난해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에 출연해 <도그빌>을 두고 강해지고 싶냐는 질문에 덜 아프고 싶다고 답한 적 있다.
<도그빌>의 엔딩을 좋아한다. 시쳇말로 사이다다. 내 생각엔 영화 속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는 전능한 신적 존재다. 그레이스가 수난을 당할지언정 데미지는 입지 않거든. 신이기 때문에 도그빌의 주민들이 가하는 폭력도 기꺼이 뒤집어쓴다. 내가 그레이스처럼 단단한 내심을 갖춘다면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처에 덜 취약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레이스처럼 자잘한 상처는 내 몫으로 감당하며 덜 흔들리고 싶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도 관용을 베풀고 싶다. 사실 <도그빌>과 닮은꼴 영화는 <범죄도시> 시리즈다.
- 도대체 어디가.
장첸(윤계상), 강해상(손석구), 백창기(김무열) 그리고 내가 연기한 주성철이 영화에서 저지른 범죄를 생각해 보면 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듬어진 부분이 있다. 그 범죄의 실상은 <도그빌> 못지않게 끔찍하다. 하지만 우리 모두 선하고 힘이 센 마석도가 매 시리즈 동안 다치지 않고 흉악범을 응징하리란 걸 염두에 둔 채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레이스도 마찬가지다. 관객 모두가 도그빌에 가해질 응징을 기다리고 그레이스는 그 기대에 부응해 냉혹한 판단을 내린다. 또 그레이스는 오만하리만치 자신의 결정에 상처 입지 않는다. 이때 니콜 키드먼이 동요 없이 아주 담담한 얼굴을 비친다. 마피아인 아버지(제임스 칸)가 동네를 쓸어버리자고 해도 처음엔 거부한다. 개인적 고통 따윈 초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의사 표시다.
- 리스트에서 가장 튀는 작품이 <서브스턴스>다.
<서브스턴스>는 보디 호러의 정보 없이 봤다. 3막에 이르니 고어가 극단에 이르고 그때부턴 어떻게 이 극단을 수습할까 궁금했는데 정말 끝까지 가더라.
- 이 영화가 쇼비즈니스 산업을 다룬다는 점에서 남달리 주목한 지점이 있나.
우선 데미 무어의 건재한 존재감이 감동이었다. 이어 그가 연기한 엘리자베스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엘리자베스와 수(마거릿 퀄리)가 서브스턴스 약물의 주의사항처럼 한 존재라면, 왜 수는 새 일터를 구하지 않고 모욕적으로 소비될 것이 빤한 옛 직장에서 구직할까. 게다가 욕망의 역치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데, 전과 같은 선택을 하는 둘이 답답했다. 그런데 영화 밖에서 생각해본다면, 이야기가 그렇게 짜였기 때문에 데미 무어 못지않게 마거릿 퀄리가 배우로서 자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다. 필요할 땐 자기를 죽이고 온전히 재능 있는 후배에게 영화의 공간을 내주는 데미 무어의 도량이 유독 눈에 밟힌다.
- 좋아하는 동시에 잘할 수 있는 일을 입방아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관철해냈기 때문에 데미 무어의 성취가 영화 팬들에게 남달리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공연한 부탁이지만 오래 영화를 좋아해 달라. <씨네21>도 함께하겠다.
내가 <씨네21>보다 나이는 많지만 어째 <씨네21>이 좀더 형 같다. 데뷔 이전부터 구독하고 구매하던 잡지여서 그런가 보다. 동경하던 배우를 현장에서 동료로 만날 때 황홀하듯, 어린 시절부터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잡지에서 이렇게 영화 이야기를 나눠서 행복하다. 나의 친구 <씨네21>, 영원히 영화와 함께해달라. 나보다 오래 살아달라. 친구가 먼저 가는 건 좀 그렇다. (웃음)

1. 재개봉 촉구작
<죠스>나 <터미네이터>, 좀더 뒤로 가면 <더 록> <콘에어> 같은 영화들. 개봉 당시에 극장에서 못 보고 비디오로 볼 수밖에 없었던 영화들을 꼭 한번 큰 스크린과 좋은 음향을 갖춘 영화관에서 다시 보고 싶다. <다이 하드3>도 동시상영관에서 보느라 거의 손상된 필름으로 감상했다. 블루레이 말고 DCP로 온전히 다시 보는 날이 오길.
2. 지구 멸망의 날 보고 싶은 영화
<멜랑콜리아> 봐야지. 멸망의 날 드러나는 인간 군상을 미리 예습하겠다.
3. 나만 해봤을 것 같은 극장 경험
너무 옛날 사람 같긴 한데(웃음) 극장의 음향과 영화의 음향이 동시에 좋아져서 깜짝 놀란 경험이 있다. 내겐 그 시작이 <가위>였다. ‘대사가 이렇게 잘 들린다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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