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사의 찬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는 쓸쓸하고 가련해 보이는 이종석의 뒷모습이다. “원하는 대로
영문과에 보내줬으니 돌아와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명령하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을 극단 비용으로 충당하면서도, “쓸데없는
책들은 책상 위에 올려놓지 말고”라는 아버지의 말이 못내 신경 쓰여 책상 아래로 원고지를 내려놓는 사람. 고된 성장과정을 겪고
관비유학생이 돼서 음악 대학을 다니는 윤심덕보다도 오히려 그가 더 처량하게 보이면서, 윤심덕은 그에게 이끌린다. 어느새 이종석은
논란 속에 있는 김우진과 윤심덕의 사랑을 설득하는 대변인이 된다.
일제
치하의 지식인으로서, 이종석은 다른 많은 드라마의 캐릭터들처럼 총을 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다만 내 나름의 방식으로 내
조국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비록 나라는 짓밟혔어도 조선 사람들의 얼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신극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요. 심덕 씨도 그런 마음으로 노래하는 것 아닌가요?” 유약해 보이던 그가 윤심덕을 향해 나지막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종석은 비로소 자신의 외모 안에 숨겨져 있던 강단을 드러낸다. SBS ‘너의 목소리가 들려’, ‘피노키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이종석은 하늘거리는 가느다란 몸으로 사건 현장을 뛰어다니고, 상처 받은 소년이 어른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캐릭터들은 대부분 아픔을 극복하고 행복해졌다. 그러나 ‘사의 찬미’에서 이종석은 신발 한 켤레만 남겨두고 바다로
몸을 던진다. 희고 말갛게 생긴 그의 얼굴과 비극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일은 극단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스스로 자신의 외양을 한껏
이용한 배역을 통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종석이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준 캐릭터들과 겹쳐지며 김우진은 더욱
정의롭고 고결한 젊은이로 거듭난다.
역사적
인물을 이야기의 소재로 꺼내올 때, 배우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를 얼마나 현실감 있게 연기하느냐가 연기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아예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내야 하는 경우와는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우진의 대사인 “다만 내 나름의 방식”은 이종석의 현재다. 불륜을 미화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기만큼은 ‘사의 찬미’라는
제목과 잘 어울리는, 일제 치하의 우아한 청년 예술가로 손색이 없다. 이종석은 김우진이 되고, 김우진은 이종석을 통해 역사
속에서 나와 새로운 얼굴을 갖는다. 이쯤 되면 물어볼 만하다. ‘사의 찬미’의 이 남자는, 이종석인가, 김우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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