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외교업무 처리를 위해 심양관은 호방(戶房), 예방(禮房),병방(兵房), 공방(工房) 등 4개 부서를 설치하여 호방은 재정,예방은 물품, 병방은 인마(人馬), 공방은 공장(工匠) 업무를 맡았다. 이러한 조직과 규모만을 보아도 심양관은 오늘날의 외교공관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청과 조선은 양측 모두 소현세자와 심양관을 통해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다. 그래서 양국 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몫이었다. 소현세자와 심양관은 볼모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외교 채널로 기능하면서 청의 압박에 대한 완충 역할도 감당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 중국 한국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주중 한국대사였던 셈이다.
청과 조선은 양측 모두 소현세자와 심양관을 통해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다. 그래서 양국 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몫이었다. 소현세자와 심양관은 볼모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외교 채널로 기능하면서 청의 압박에 대한 완충 역할도 감당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 중국 한국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주중 한국대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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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관은 교섭 창구로서 뿐만 아니라 청 내부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조정에 전달하여 조선의 정책 수립에 기여하는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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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소현세자가 가져온 과학 서적 중에서 훗날 수원성 축성 때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擧重機)가 발견된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새로운 조선을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명은 멸망했고 청은 더 이상 조선의 원수가 아니었다. 외교의 관점에서 명분을 떠나 실리로 따진다면 새로운 패권국가로 등장한 청은 조선의 사대국(事大國)이자 후원국인 강대국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성리학 이외에도 여지구가 보여주는 지구 반대편의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은 조선을 발전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기제가 될 수 있다고 세자는 인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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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더라면 조선의 근대화가 일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보다 200년이나 앞당겨질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부왕 인조는 소현세자를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친청 노선과 서양 오랑케에 편승해 자신의 왕위를 위협했던 몹쓸 아들로 치부했던 것이다
인질로 잡혀가서 존나 일만하다 오셧는데 왕이 죽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