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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내가 소취하는 역할은 이런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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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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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최고의 멋쟁이다. 그의 바람직한 기럭지와 화려한 옷발은 지금 바로 압구정동에 갖다 옮겨 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싶다. 
로이드안경에 맥고모자, 폭넓은 넥타이에 가죽구두, 신소재로 만든 스틱까지... 어떠한 옷도 거뜬히 소화해내는 그는 혼마찌(명동) 에서 일명 ‘패션계의 소화제’로 통한다.

뻔뻔스러운 바람둥이다. 근대 문물과 함께 탄생한 ‘자유연애’의 조류는 아마도 신이 그를 위해 준비한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10분이면 충분하다. 10분이면 왼 경성의 여자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뻥이 아니라 실험에 실험, 검증에 검증을 거친 확연한 사실이다. 

잘생겼다. 영화감독들이 만나기만 하면 영화 한편 찍자고 덤벼든다.
너무 귀찮고 성가셔서 한 동안 까페 출입을 삼갔던 적도 있다. 
주색잡기로 공사다망하여 영화 따위에 신경 쓸 틈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가 맘먹고 영화계에 데뷔했으면 조선의 나운규나 미국의 쪼온 크로포드는 끊긴 밥줄을 붙잡고 대성통곡해야 했을 것이다. 
벌써 눈치 챘겠지만 재수가 좀 없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거만함이 온 대지를 덮는다. 

마초기질이 다분하다. 대책이 안 설 만큼 혈기 왕성한 그의 객기만큼이나, 그의 의리 또한 혈기왕성하고 대책 없다.
한번 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도, 지킨다(중요한 말이다!). 그의 유일한 장점이다.

온갖 잡스러운 기사들을 싣는 월간 대중문화 잡지 <지라시>의 객원기자다.
선배 김탁구의 부탁도 있고, 노느니 땅 판다고 그냥 재미 삼아 시작한 일이지만, 기사를 조작하는 탁월한 능력, 정교한 사진합성 실력(물론 사진을 오려 붙이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덕분에 그는 팽팽 놀고도 돈 받아간다. 얄밉다.

태어나보니 유한계급의 아들이었다. 운이 좋은 편이다. 잘 먹고, 잘 입고,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태어나보니 식민지 조선이었다. 운이 나쁜 편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머리에 먹물 든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났던 동경 유학을 중도 작파했다. 신학문은 그에게 절망만을 안겨주었다. 교과서 어디에도 조선을 위한 이론은 없었다. 약육강식. 사회진화론. 모두 강국의 이론일 뿐이었다. 
먹물 적신 머리로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친일세력에 편승하거나, 민족해방 투사가 되거나, 프롤레타리아 세력과 규합하거나... 셋 다 싫었다. 

룸펜이 되었다. 그렇다고 방구석에만 쳐 박혀 지내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액티브한 그의 피가 그를 유흥의 세계로 안내했다. 
오호, 체질에 딱 맞았다. 이렇게 놀고, 먹고, 즐기다 보면 그럭저럭 한 평생이 끝날 테고, 운이 좋으면 사는 동안 조국이 해방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물론 그도 조국 해방을 원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건 ‘투사’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몫이지 자신의 몫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여러 계급이 있고, 여러 가치관이 있으며, 다양한 선택이 있는 법이다. 그는 그 중에 ‘데카당스’ 로서의 삶을 선택 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평생을 놀고먹어도 남아 돌 만큼의 재산을 소유한 아버지가 있다. 신세기와 지민식 같은, 비슷한 부류의 친구들도 있다. 여자들을 환장하게 만드는 멋진 시보레도 한 대 가지고 있다. 

공부 때려 친 지 한 달 만에 그는 ‘경성 사교계의 황태자’로 등극한다. 실로 놀라운 성과라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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