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규시즌이 끝나가던 2025년 9월 27일 서울 잠실구장. SSG 랜더스와 두산 베어스 경기 전 '어쩌면 가장 빛나는 주역들'로 소개된 장년의 남성과 여성이 각각 타석과 마운드에 섰다.
시타자는 26년 동안 선수들이 안전하게 최고의 경기력을 펼칠 수 있도록 잔디와 흙을 가꿔온 그라운드 키퍼 김종문(64) 관리이사였고, 시구자는 18년째 구내식당에서 선수들에게 따뜻하고 영양가 높은 한 끼를 내온 김현숙(69) 조리실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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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아픈 곳에 따라 처방이 다르잖아요. 잔디도 똑같습니다. 무슨 병인지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치료할 수 있어요."
김종문 관리이사가 매일 오전 7시 30분 출근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잔디 관찰이다. 그는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며 잔디색이 일정한지, 병충해가 생긴 곳은 없는지 살핀다.
그렇게 쌓인 노하우는 잔디 길이 0.5㎝의 차이도 놓치지 않는다. 여러 높이로 시험한 끝에 수비와 타구 바운드에 가장 적합한 2.5㎝를 찾아냈다.
홈팀의 취향에 따라 내야 흙도 달리 관리한다. LG는 단단한 내야를 선호했고, 두산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한때 비교적 부드러운 상태를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제게 잠실은 제2의 인생이다. 이곳에서 일하며 아이들을 키웠고 야구의 기쁨과 슬픔도 알게 됐다"며 "내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곳"이라고 돌아봤다.
이런 그의 마지막 소원은 올해 마지막 잠실구장에서 LG와 두산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 것이다.
그는 "제가 응원하는 팀은 LG와 두산뿐"이라며 "여기서 일하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이다. 잠실의 마지막 해에 두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다면 정말 대박"이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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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차가 됐지만, 아직도 제가 지은 밥을 먹고 선수들이 이기고 돌아오면 제 자식처럼 예쁘고 기뻐요."
김현숙 조리실장은 LG와 두산 선수들의 식성과 성격은 물론 경기 결과에 따른 표정까지 살피며 식사를 준비한다. 선수와 코치진, 구단 직원 등을 위해 만드는 음식은 하루 350∼400인분.
선수들이 식당에 들어서면 그날 꼭 먹어야 할 음식도 콕 집어 권한다. 반대로 미역국과 묵사발처럼 미끄러지거나 부진한 경기력을 연상시키는 음식은 꺼리는 선수도 있다.
김 실장은 "특정 음식을 먹은 뒤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시 먹지 않는 선수도 있다"며 "아욱국도 '아웃'을 떠올린다며 피하는 선수가 있어 이런 취향을 미리 알아둔다"고 말했다.
선수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육류 반찬을 두 가지 이상 마련하고, 홈 경기를 마치고 원정을 떠나는 날에는 야식까지 챙긴다.
경기 전 면요리도 빠뜨리지 않는다.
김 실장과 18년 동안 호흡을 맞춘 오경숙(63) 씨는 "면을 먹으면 30분 안에 에너지가 빠르게 올라온다고 한다"며 "그래서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내놓았다"고 설명했다.
입사 당시 막내급이던 정수빈(두산)이 최고참이 된 모습에서 세월을 실감한다는 김 실장은 하루 10시간씩 머문 조리실과도 작별을 앞뒀다.
올여름엔 오경숙 씨와 자주 조리실에서 나와 그라운드 전체를 눈에 담았다.
그는 "18년 동안 이곳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공간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울컥한다"며 "맛을 떠나 정말 정직하게 음식을 했다. 최선을 다했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잠실의 44년을 완성한 건 기록지에 남겨진 숱한 승패와 선수들의 빛나는 순간뿐만 아니라, 김 이사와 김 실장을 비롯한 '어쩌면 가장 빛나는 주역들'이 다진 흙과 지어낸 밥이기도 했다.
올 시즌이 끝나면 철거될 잠실구장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하루를 일군 사람들의 시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어쩌면 가장 빛나는 주역들'의 땀과 청춘은 잠실의 44년 곳곳에 오래도록 새겨져 있을 것이다.
https://m.sports.naver.com/kbaseball/article/001/0016202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