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이야기가 오가야 할 라커룸에 난데없이 전쟁 무용담이 난무했다.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 캐나다전을 앞둔 지난 14일(한국시간), 미국야구 대표팀 라커룸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등장했다.주인공은 전직 해군 특수부대(네이비실) 대원 로버트 J. 오닐. 2011년 오사마 빈 라덴 제거 작전인 '넵튠 스피어'에 팀 식스 소속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오닐은 선수들 앞에서 작전 당시 스텔스 블랙호크 헬기가 추락했던 긴박한 순간을 전하며 애국심을 자극했다. 추락한 헬기 잔해를 훈련용 모형으로 착각했던 일화를 소개하자 선수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닐이라는 인물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작전 내용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특수부대의 '침묵 코드'를 깨고 자신이 빈 라덴을 사살한 주인공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해 동료들의 거센 비난을 샀다. 함께 작전에 참가했던 일부 대원은 "오닐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실제 최후의 일격은 다른 대원이 가했다고 반박했다. 오닐은 현재 자신을 사기꾼이라 부른 팟캐스트 진행자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벌이는 중이다. 논란의 소지가 짙은 인물을 국가대표팀 동기부여 연사로 초청한 셈이다.
WBC가 전쟁인가…현지 비판 여론 봇물
미국은 오닐이 연설한 날 캐나다를 5대 3으로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팀에 큰 악영향을 끼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야구공이 아닌 전장의 언어가 라커룸을 채웠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온라인 상에서는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소셜미디어에서는 "도미니카공화국, 푸에르토리코, 이탈리아, 베네수엘라 등은 WBC에서 삶을 즐기고 있는데, 미국은 극우방송 패널을 초청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딴 짓이 말이 되냐, 이런 놈을 왜 띄워주냐"는 격한 표현도 있었다.
한 팬은 "미국이 얼마나 군사화돼 있는지 외에 다른 걸 강조하는 날이 단 한 번이라도 오면 좋겠다. 상대는 그냥 캐나다인데"라고 꼬집었고, 또 다른 반응은 "미국 라커룸이 기괴한 국수주의 의식의 장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비판의 핵심은 전쟁의 메시지를 야구 축제와 연결 짓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 저널리스트 크리스 커쉬너는 "미국 선수들이 개성을 드러내고 즐기는 건 허용이 안 되냐"고 꼬집었고, 르브론 제임스 미디어 회사의 디자인 총괄 알렉스 메디나는 "미국 대표팀의 경기 전 분위기도 다른 나라들처럼 돼야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실 이번 대회 내내 미국 대표팀 주변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타릭 스쿠발을 필두로 마이클 와카, 라이언 야브로, 클레이튼 커쇼, 매튜 보이드, 클레이 홈즈까지 총 6명의 투수가 대회 도중 소속팀 스프링 트레이닝으로 복귀했다. 스쿠발은 영국전에서 3이닝만 던지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돌아갔는데, 미국의 8강전이 열린 바로 다음 날 시범경기에 등판해 4.2이닝 3피안타 1실점 7탈삼진의 괴력 피칭을 펼쳤다. 이런 피칭을 대표팀에서 할 순 없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현지에서 쏟아져 나왔다.
벤치에서도 대형 논란이 터졌다. 마크 데로사 감독은 이탈리아전에서 대회 규정을 잘못 계산해 브라이스 하퍼, 알렉스 브레그먼, 칼 랄리 등 주전을 대거 뺐다가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데로사가 경기전 방송에서 "우리 팀은 8강이 확정됐다"는 발언을 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졌자. 시카고 트리뷴은 이 사건으로 데로사가 "WBC 역사상 가장 구설에 오른 감독"이 됐다고 평가했다.
또 투수 코치 앤디 페티트는 캐나다전 승리 직후 준결승 상대 도미니카공화국에 대한 준비가 아직 덜 됐다고 밝혀 팬들의 공분을 샀다. 전쟁 군인을 불러 억지로 주입한 애국심과 동기 부여가 무색해지는 장면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도미니카에겐 "조국이 곧 동기"…말 대신 몸으로 증명
같은 시간, 준결승 상대 도미니카공화국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토론토 블루제이스)는 기자회견에서 "도미니카 유니폼을 입는 순간 돈 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오직 조국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외부 강사가 억지로 주입해준 말이 아니었다. '월드시리즈와 WBC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에도 게레로 주니어는 양자택일을 거부하며 "나에게 이건 달라도 너무 다른 느낌"이라고 말했다.
도미니카 선수들은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한국과의 8강전에서 게레로 주니어는 1루 주자로 있다가 후니어 카미네로의 좌전 2루타에 홈까지 달려 슈퍼맨 다이빙으로 포수 태그를 피해냈다. 후안 소토도 게레로 주니어의 중전 2루타 때 1루에서 홈까지 달려 수영 동작으로 포수 태그를 따돌리는 장면을 연출했다.
7억 달러(약 1조 150억 원) 몸값의 소토가 홈 플레이트를 향해 온몸을 내던졌다. 외부 강사의 연설 없이도, 이들에겐 조국의 유니폼이 그 자체로 충분한 동기였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제이 마리오티는 "다른 나라들은 마음가짐이 제대로 돼 있다"며 'WBC 우승이 목록 최상단에 있다'는 훌리오 로드리게스의 말을 인용했다.
전쟁 군인을 연사로 불러 애국심을 주입하는 방식. 어쩌면 이런 시대착오적 시도 자체가 이 팀에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장면인지도 모른다. 주입식 애국심의 미국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미니카공화국. WBC를 전쟁처럼 치르려는 팀과 야구를 즐기러 나온 팀의 준결승은 한국 시간 16일 오전에 펼쳐진다. 결과는 왠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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