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호의 사인은 팔꿈치 내측 인대 재건 수술, 이른바 토미 존 수술 이후 발생한 폐색전증이었다. 혈전이 폐동맥을 막아버리는 아주 심각한 질환이다. 그리고 토미 존 수술 합병증으로 최초로 보고된 사망 사례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백상호의 사망 소식은 전해졌다. 하지만 부고와 사인을 알리는 수준에 그친 단신에 불과했다. 필자 또한 그의 이야기를 불과 몇 달 전에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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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설비를 관리하던 아버지 백승한과 오페라 가수를 육성하던 어머니 이은영 사이에서 태어난 백상호와 두 살 어린 동생 백선호로 구성된 네 식구는 아메리칸드림을 희망하며 태평양을 건넜다.
백상호는 8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스승은 1986년 KBO 리그 신인왕인 김건우였다. 강동 리틀 야구단에서 어린 백상호를 지켜본 김건우는 백상호가 뛰어난 어깨를 가졌기에 훌륭한 투수로 자라날 것이라고 평가했다. 류현진을 바라보며 메이저리거가 되겠다는 꿈을 꾼 백상호는 하루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유소년 세계 대회 중 하나인 2013 칼 립켄 월드 시리즈에 한국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잠재력이 있었다.
미국으로 가는 것이 결정된 후 백상호는 부모님에게 미국에서도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그만큼 그에게 야구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영어를 잘하지 못했던 백승한은 아들의 꿈을 이어주기 위해 비행기에 타기 전 다음의 세 문장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외웠다.
“Can my son play on your team? His name is Sang. He is a pitcher.”
우리 아들이 이 팀에서 뛸 수 있을까요? 이름은 상입니다. 투수예요.
백승한이 미국에서 가장 먼저 산 것은 낡은 검은색 자전거였다. 그걸 타고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퇴근 후 몇 날 며칠 동안 자전거를 타고 동네에 있는 모든 야구장을 돌았다. 백 씨 가족이 정착한 솔즈베리는 인구를 기준으로 서울의 33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야구팀은 제법 많았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백상호의 자리는 없었다. 그들이 솔즈베리에 처음 도착한 것은 4월, 이미 모든 유소년팀의 선수 모집이 마감되고도 한참이 지난 시점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노력과 사랑에 감동한 한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13살 백상호는 미국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야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김건우의 말처럼 백상호에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그것이 노력과 합쳐지며 백상호는 미국에서 야구로 소통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미국 첫 번째 포수인 레포트는 백상호 같은 투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면서 자기가 원하는 공을 자유롭게 던졌던 백상호를 회상했다.
https://x.com/yagongso/status/1860937548274819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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