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30대 여성 기자가 야구 붐을 바라보는 짧은 연재 “‘얼빠’ 아니고 ‘야빠’인데요”를 시작합니다. 안타가 뭔지도 모르던 ‘야알못’이 어떻게 ‘야빠’가 되었는지, 야구장 ‘큰 손’이 된 여성 관객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지 함께 이야기 나눠 봤으면 합니다.
꽤 오랫동안, 야구 보는 사람을 한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릇 한국의 프로 야구란 말이죠, 그 태생부터가 불순하지 않던가요. 학창 시절 근현대사 수업에서 제가 배운 야구는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민심을 다스리겠다며 도입한 우민화 정책의 대표 격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세상에 대한 이유 모를 저항감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어린 저는 ‘스포츠, 스크린, 섹스’의 3S 중에서도 제일 앞에 위치한 스포츠, 즉 야구가 그 역할을 아주 충실히 이행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탐탁지 않았죠.
주위의 야구 팬들은 혀를 차게 만들었습니다. 야구는 1년에 정규시즌만 144경기, 월요일 빼고 주 6일, 그것도 저녁 내내 합니다. ‘야빠’들은 길을 가면서, 밥을 먹으면서, 심지어는 대화 도중에도 실시간으로 경기 결과를 확인한다고 난리를 부려서 가끔 저를 곤란하게 했습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와 쭉쭉 뻗은 팔다리를 자랑하는 다른 스포츠 선수와 달리 야구 선수들의 둥그렇고 편안한 체형은 의아함을 더했죠. ‘저것이 정녕 프로의 몸인가, 과연 야구는 국민 스포츠, 아 아니 그보다 일단 스포츠가 맞는가. 도대체 ‘그깟 공놀이’가 뭐라고 이 야단법석이란 말이더냐?’
그랬던 제가 야구를 봅니다. 지난해 8월 15일 친구 H를 따라간 야구장에서 ‘입덕’ 한 뒤로 올해 8월 15일까지 꼭 1년 동안 18번 야구장을 찾았고 중계방송은 거의 매일 챙겨봤습니다. 경기가 끝나면 하이라이트 영상을 돌려보고 방구석 감독답게 그날의 경기력을 평가했고요. 선수들의 안타와 도루 하나에, 실책 하나하나에 분노하거나 기뻐했습니다.
출근길엔 팀 응원가를 흥얼거리고, 유니폼을 사서 응원하는 선수의 이름과 번호를 마킹하고, 가방에는 팀 마스코트 배지와 키링을 주렁주렁 달고 다닙니다. 길을 가면서, 밥을 먹으면서, 심지어는 대화 도중에도 실시간으로 경기 결과를 확인한다고 난리를 부리죠.
그러니까 이건, 그깟 공놀이에 제가 완전히 빠지게 된 이야기입니다.
올해 KBO리그는 역대급 흥행 기록을 세웠습니다. 정규시즌에 한국 프로스포츠 최초로 1000만 관중을 달성했고, 총 720경기 중 30.7%에 달하는 221경기가 매진됐습니다. 포스트시즌은 16경기 전부 만원 관중이었습니다. 여성 팬, 특히 2030 여성 팬의 대거 유입이 야구 ‘붐 업’을 이끈 요인으로 손꼽힙니다. 저도 아마 그중 하나겠죠.
우리는 왜 야구장으로 갔을까요.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의 분석은 퍽 안일하고도 남성중심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온라인 중계권 사업자가 바뀌면서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경기 영상을 올릴 수 있게 됐다, 이 숏폼 콘텐츠가 진입 장벽을 낮췄다, 영화나 뮤지컬 같은 다른 문화 콘텐츠보다 저렴하다, 정도엔 고개를 끄덕였어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야구장이 과시용 인증사진을 찍기에 좋기 때문’이라는 것부터 ‘젊고 잘생긴 남자 선수들을 보러 가는 것’이라는 지적에는 즉각 반발심이 일었습니다. 특정 선수를 따라다니며 망원 렌즈를 단 대포 카메라로 촬영하고 SNS에 올리는, 아이돌 팬덤 문화가 야구판에도 들어왔다는 식의 비난에선 혐오를 담은 시선을 느꼈습니다. 여성 팬을 한 명의 스포츠 팬이 아니라 주변부에 있는 존재로 대하는 아주 익숙하고도 불쾌한 시선이었죠.
저 역시 어떤 남성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어색한 사이에서 분위기를 바꾸려면 야구만큼 좋은 소재가 없죠. 그에게 “혹시 야구 보시냐”고 물었습니다. 상대방은 반색하면서도 ‘웬일?’이라는 표정을 짓더군요. 그리고 대뜸 이어지는 질문.
“야구 룰은 다 알고 보세요?”
‘이보세요, 룰을 모르는데 경기를 어떻게 보나요.’
또다른 남성은 제게 야구 본다는 말을 일부러 “야동(야구 동영상) 본다”고 했습니다. 농담이랍시고 던지고는 제 반응이 어떤지 기대하는 눈치였어요. 제 친구는 야구장에서 일면식도 없는 남자에게 “여자들은 뭣도 모르면서 여길 왜 오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건 ‘xxx’고, 책을 사 읽는 건 ‘과시용 독서’ 또는 ‘텍스트 힙’이고, 스포츠를 보는 건 ‘얼빠’라서다… 하나같이 여성의 취향, 여성의 소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낮잡아 보는 시각에서 나온 말들이죠.
30대 여성인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해 가을을 빛낸 NC 다이노스에게 반했습니다.
그날, 그러니까 야구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2023년 8월 15일, 친구 H와 함께 갔던 늦여름의 창원NC파크는 찔듯이 더웠습니다. 푸르고 드넓은 야구장 한가운데 위치한 전광판에 선수 라인업이 나와 있었고, NC는 손아섭-박민우-박건우로 이어지는 ‘손박박’ 라인으로 시작했죠. 그걸 보고 H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박민우랑 박건우랑 형제다?”
“엥? 대박. 형제가 어떻게 같은 팀에 있음?”
그때만 해도 야구에 대한 제 지식은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로 습득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일단 이름과 나이가 비슷하고, 왠지 얼굴이 닮은 것도 같아(?)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하고 있을 때 H가 옆에서 푸하하 웃으며 말했죠.
“뻥이야.”
그날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는 크게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지지부진한 공격과 수비가 12회까지 이어진 끝에 3 대3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열기에 머리가 익어서인지 H의 농담은 너무 즐거웠고, 응원 배트를 흔들면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감각만은 생생합니다.
이후 정규시즌을 4위로 마친 NC는 포스트시즌에서 5위 팀에게 패할 거라던 우려를 보기 좋게 깨뜨렸고, 파죽지세로 6연승을 내달리며 한국시리즈 코앞까지 갔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역전 만루홈런을 만들어내고, 다이빙하듯 점프해 글러브 안으로 상대의 공을 낚아채고, 유니폼에 흙이 잔뜩 묻은 채 환호성을 내지르는 선수들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나, 야구 좋아하는구나.’
제가 간 야구장에 ‘젊고 잘생긴 남자 선수’는 없었습니다(얼빠라면 야구장에 가면 안 됩니다). 잘하는 선수와 못하는 선수가 있을 뿐이죠. 잘하는 선수는 뭘 해도 예뻐 보이고, 못하는 선수는 속이 터지지만 그 나름대로 안타깝고 짠해서 응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응원하는 선수들이 고전하다가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경기가 뒤집히는 걸 보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죠.
그게 우리가 야구장에 가는, 야구를 응원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얼빠’라서 그렇다”, “룰도 모르면서 인증샷 찍으려고 온다”, 야구 보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을 텐데요.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또는 직접 뛰고 운동하면서 겪은 불합리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아래 링크에 남겨주세요. 우리 함께 이야기 나눠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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