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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3호선 여드름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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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1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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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낮 12시 40분 학여울역에서 대화행 열차에 탑승해
아주머니 옆에 앉았던 여드름 난 학생입니다.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있었고 남색 긴팔티를 입고 손에는
미니 선풍기를 들고 있었던 거 기억나시죠? 노골적으로
제 얼굴 흘끔거리셨으니까요.



전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 선풍기 끄라고 눈치 주시는 건가
싶어 선풍기를 끄고 가방에 넣었는데 다음순간 ‘아 안되겠다’
라는 말과 함께 병원 명함을 받을 줄 몰랐습니다.


제 팔을 덥썩 잡고는 얼굴 여드름이 심하다고 병원에
상담이라도 받으러 오라고 명함을 건네려고 하시는데
그 순간 제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눈꼽만큼이라도 아시려나요.

학창시절 내내 간직했던 저의 가장 큰 외모 컴플렉스가
생면부지의 누군가에게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지적 당하고
절 호객 행위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게 이루 말할 수없이 비참하고 수치스러웠습니다.


상대하고 싶지 않아 눈도 마주치지 않고 괜찮아요라고
말하자 제 가슴 언저리 툭툭 치면서 ‘실례였다면 미안해요~’
하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죠.


저는 내릴 곳이 아니었지만 열차에서 바로 내렸어요.
내릴 때 그딴식으로 살지말라고 쪽팔리지도 않냐고 크게
한마디하고 내릴까도 생각했지만 세상에는 비상식적인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면전에 대고 한 말로 제가 돌려받게
될 말들이 상상되지 않아 겁이 나서 그냥 내렸습니다.
그 정도로 전 어렸거든요. 제가 몇살 정도로 보였는지는
몰라도 전 성인이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 학생입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지하철 화장실에 들어가 수치심과
분노에 울다가 5분도 채 안되어 나왔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울기에는 우리 부모님이 절 너무
소중하게 키워주셨거든요.


바로 다음 열차를 잡아서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또 당신과
비슷한 연배의 아주머니께서 앉으셨어요. 근데 앉음과 동시에
가방에서 책과 공책을 꺼내 열심히 무언가를 적으셨습니다.
그 분 옆에 앉아있으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어요. 사람들은 나한테, 나의 외모한테, 나의 여드름한테
관심이 없다고, 아까 만난 아주머니는 그저 재수없게 길 가다
밟은 오물 정도이니 신경 쓸 가치도 없다고 와닿았거든요.


상황을 온전히 벗어나고나서야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체계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전 명함에 적힌 병원 이름을
기억하고 짧은 시간동안 본 아주머니의 지갑과 가방 색깔
휴대폰 기종과 휴대폰 케이스 색깔까지 정확히 기억합니다.

매일 바뀌는 옷이면 몰라도 쉽게 바뀌지 않는 휴대폰과
지갑 그리고 마지막으로 40대 중후반에서 50대 정도로
보이고 들렸던 아주머니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들을 종합하면
병원에서 아주머니를 쉽게 찾아낼 수 있겠지요.
4-50대 상담실장은 병원마다 많아봤자 한둘일테니까요.


병원에 민원을 넣을까 고민해봤습니다. 병원 카톡창에 들어가
글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병원 측에서도 공공장소에서
무례한 언행을 하며 고객 유치는 커녕 영업에 방해만 준 직원을
그저 무시하고 넘어가진 않겠죠. 적어도 전 살면서 그 병원 
언저리에도 가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하지만 제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분이 자칫하면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음 쓰여 여전히 카톡은 고민중입니다. 


마음 속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혹은 제 옆에서 같이
분개하고 계신 엄마께서 민원 전화를 넣겠지만 우연한 기회로
이 글을 직접 보게 된 아주머니께서 제대로 된 사과를 전하는
결말을 미약하게나마 기대 해봅니다.



내릴 때가 되어 일어서서 보면 지하철 문 측면에는 성형외과
광고가 상단에는 피부과 광고가 붙어있을 정도로 외모와 관련된
산업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수요 없이 공급만
있을 수는 없으니 당연히 외모와 관련된 분야에 관심을 갖고
병원을 찾는 사람들도 수 없이 많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타인의 외모를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할 자격은 없습니다. 뻔하고 당연한 소리 같아도 실생활에
대입하면 이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의 난치성
여드름 흉터는 의사도 아닌 일반인이 초면에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치료를 권하는게 당연시 될 정도로 잘못된 게 아니라 그저 제가 사춘기 시절을 거치며 갖게 된 저의 외모 중 일부분일 뿐입니다. 제 피부관리 노력의 정도를 평가할 척도도 지적의 대상도 당신에게는 되지 못해요.


언젠가 처음으로 알바에 붙은 오빠가 신난 얼굴로 출근했다가
그날 저녁 한 손에는 비비크림을 들고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귀가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에는 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는데
오늘 제가 직접 겪고나니 비로소 그때 오빠가 근무처에서 아주머니와
비슷한 누군가를 만났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오늘 당신을 만난게
저라서 한편으로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오빠처럼
마음 여리고 피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대인 기피증까지 겪었던
사람이 아니었음에 안도합니다. 



내일이 되면 또 어디선가 저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무례를 
넉살 좋은 웃음으로 포장해 전하고 계실지 모르는 3호선 아주머니께.





ㅡㅡㅡㅡㅡㅡㅡㅡ

대놓고 여드름쟁이라고 놀림받으면 화라도 내지

저게 뭐야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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