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 (1533년 ~ 1603년)
사자같이 불같은 성격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부왕 헨리 8세를 닮아 무척이나 불같은 성격이었다. 당시의 보수적 시대상이 여성에게 전형적으로 원하던 성격은 아니었는데, 그녀가 격노하면 신하들이 벌벌 떨 정도였다. 심지어는 회의 중에 격노하여 대신의 뺨을 치거나 슬리퍼를 집어던지기도 했다. 게다가 체격도 컸으니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그녀의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여왕의 키가 170cm가 넘었다고 했는데, 당시 남성들의 평균키도 170cm가 안 되던 것이 16세기 유럽이다.
말년에도 그 성정은 여전해, 에식스 백작의 반란 사건 때 연루되어 변명을 하러 온 해링턴 경에게 무시무시한 분노를 퍼부었는데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과연 헨리 8세의 딸이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신하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싶으면 "내가 남자였다면 그런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에 대해서도 언제나 "내가 사자는 아닐지라도 사자의 심장이 있는 새끼 사자임에는 분명하다"( I may not be a lion, but I am lion's cub and I have lion's heart.)고 즐겨 말했으며, 스페인과의 전쟁 당시 포고문에서는 "나의 몸은 여인의 것이나 나의 심장은 잉글랜드 국왕의 것이다."라고 언명하기도 했다.
여왕이 즉위했을 때 편견에 가득 찬 신하들은 처음에는 여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여성은 남성의 인도가 반드시 필요한 부족한 존재라는 편견이 팽배했던 시대이다. 가정에서 남편의 말에 순종하며 아이나 잘 낳아 기르는 것이 가장 중대한 사명이라고 생각된 시절이었고, 그것은 여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많은 신하들은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때만 해도 여왕이 곧 적절한 왕족과 결혼해서 왕자를 낳아 왕위를 물려주리라고 생각했다. 즉 남자로 왕위가 이어질 때까지의 일종의 징검다리라고 여긴 것이었다.
흉년이 들거나 국가에 위기가 올 때면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긴다'는 어이없는 불만을 표시하는 귀족들도 많았다. 그러나 여왕이 생각보다 오래 왕위를 지키면서 나라를 잘 이끌어나가자 그러한 비난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남다른 판단력과 능수능란한 정치적 수완에 감탄하여 왠만한 남성 왕을 뛰어넘는 군주라고 존경하는 신하들도 점점 많아졌다. 특히 여왕의 사후에 즉위한 남성 왕들이 줄줄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만큼, 그녀의 재위시절이 재평가되며 위대한 여왕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 되었다.
육체적으로도 강건해서 승마와 사냥을 즐겨했으며 매일 강도 높은 운동을 했다. 노환으로 사망하던 해에 이르기까지 코란토 춤을 시연해 보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척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성품이기도 했다.
성실한 공부광
어려서부터 학업에 상당히 열중한 걸로 유명했다. 특히 라틴어, 에스파냐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웨일즈어,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 이상을 유창하게 쓰고 말하는 등 어학 쪽으로 재능이 출중했다. 이는 외교관의 딸로 태어났던 생모 앤 불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귀족 여성들도 남성 못지 않게 교육시키는 상류층의 풍조 덕분에 그녀 역시 방대한 지식을 쌓았으며, 여왕이 되어서도 각종 국내외 현안에 통달하여 즉위 초기 그녀를 여자라 내심 얕잡아보던 참모들을 감탄시켰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궁궐 방마다 책을 가득 채워 놓아 혹자는 '잉글랜드 궁정에 처음 들어가 본 사람은 왕궁이 아니라 대학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여왕의 시녀들도 식견이 넓어야 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전을 번역하거나 성경을 읽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녀들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는 여왕을 위해 난해한 학술서를 큰 소리로 낭독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재위 말년, 폴란드 대사가 방문하여 엘리자베스의 어전에서 무례하게도 의전을 무시하고 라틴어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감히 여왕에게 있을 수 없는 위협적인 표정과 태도에 모두가 기가 막혀했으나 여왕은 즉시 옥좌를 박차고 일어나 유창한 라틴어로 대사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윽고 여왕이 "맙소사, 경들. 오늘 하도 안 쓴 지 오래되어 녹슬어 있던 라틴어를 본의 아니게 연습해 봤네요!"라고 외치자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았다.
백성에겐 자비로운 군주
백성들에게는 당시의 군주상과는 대조적인 자비로운 군주로, 여왕은 잉글랜드 왕실의 연례 행사인 국내 순행을 매우 즐겼다. 당시의 도로 사정을 생각해보면 마냥 즐거울리만은 없는 험난한 여정이었으나 그녀는 연례 순행을 매우 즐거워했고 가는 곳마다 많은 환영을 받았다. 여왕이 가는 도시마다 각종 행사와 환영회가 벌어졌으며 이후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여왕은 만나는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불만을 늘어놓는 백성들의 무례한 태도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런 소탈한 면이 백성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한국에서 숙종, 언니인 메리 1세가 경종에 비견되기도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 개인적 성품과 면모는 우리나라의 영조와 비슷한 점이 많다.
어머니가 귀족계급 출신이 아니었으며, 아버지 사후 배다른 형제/자매가 왕위에 오르자 몇몇 신하들의 음모로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썼으나 왕인 배다른 형제/자매가 죽이지 않고 그냥 넘어갔고 얼마 후 왕이 일찍 죽어 왕위를 물려받은 점, 자신의 아버지와 성격이 닮아 까다롭고 불 같으면서도 소탈한 성품이었던 것도 그렇고, 백성들을 자주 만났던 것도 그렇고, 공부를 좋아해서 개인적으로도 박식한 인물이었다는 점, 강력한 왕권을 누렸으며 장수하면서 재위기간이 길었던 것 등.
그 외
현재 남은 초상화를 보면 미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어머니보다는 아버지 쪽을 더 많이 닮았으며 아름답다기보다는 잘생긴 여장부형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키가 상당히 컸다. 또한 그 시대에는 키란 곧 군주의 위엄이라고 인식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키를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 온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메리 스튜어트와 자신 둘 중에 누가 더 키가 큰가를 묻자 그 전까지는 여왕의 자기 자랑에 적당히 맞장구쳤던 사신이 그 말에는 "우리 여왕께서 더 크십니다."라고 했고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놀라서 "그럼 너무 크군. 내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말일세."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메리 스튜어트는 180cm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