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번화한 홍대거리에서 여전히 노동자들은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적인 안전장비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바쁘게 오가는 주말 홍대거리 한 켠에 ‘반성문’이 붙었다.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앞 삼성디지털프라자 홍대점 공사장 앞이다.
‘이 근처에 살고 있지만 뒤늦게 소식을 접한 한 시민’이라 소개한 글쓴이는 “지난 16일 이곳에서 한 노동자가 사망했다”며 “우리 곁에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죽음의 릴레이는 반드시 멈춰야 한다”고 밝혔다. 대자보 옆에는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힌 메모지 여러 장이 붙었다. 공사장 옆 골목을 돌아서면 “삼성전자 초일류 매장 구축을 위해 새단장 리뉴얼을 진행한다”는 현수막이 휘날린다. 20일 이곳을 찾았다.
소방당국 등에 따르면 지난 16일 오후 한 노동자가 이곳 승강기 통로에서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작동한 승강기에 끼어 숨졌다. 관할 노동청은 지난 18일 “승강기 방화벽체 작업 중 협착으로 인한 중대재해가 발생”했다며 해당 승강기에 사용중지명령을 내렸다. 경찰과 소방은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앞 삼성디지털프라자 홍대점 공사장 외벽에 시민들의 대자보와 메모지가 붙어 있다. 지난 16일 이곳에서는 한 건설노동자가 승강기 통로에서 작업 중에 끼임 사고로 숨졌다. 조해람 기자
글쓴이는 “이 기업이 우리의 돈을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쓰고 있는지에 대한 소비자로서의 책임을, 정부가 이 죽음을 제대로 예방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자”며 “저 또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이 반성문을 그 노동자분의 영전에 바친다”고 밝혔다.
자신을 ‘성산동 주민’이라 소개한 시민도 그 옆에 나란히 대자보를 붙였다. 그는 “제가 매일 출퇴근 할 때마다 다니는 이 길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이 그냥 쉬이 묻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며 “누구나 알고 있다. 기한을 맞추기 위해 빨리 일을 끝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안전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이라고 적었다. 그는 “홍대 거리를 지나는 여러분께 호소드린다. 더 이상 산업재해·안전사고로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함께해달라”고 덧붙였다.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앞 도로에서 한 시민이 발걸음을 멈추고 대자보를 읽고 있다. 조해람 기자
지나가던 시민들도 발길을 멈추고 대자보를 읽거나 사진을 찍어 갔다. 프리랜서 사진작가 정정은씨(33)는 “서점에 가는 길인데 이 자보로 처음 알았다”며 “나도 지인의 아버지가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경험이 있다. 일하다 죽지 않아야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2020년에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직장인 전예진씨(27)는 자보를 읽자마자 휴대전화에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청원을 검색했다. 전씨는 “SNS에도 공유하려 한다. 돌아가신 소식을 기사로도 못 접했다.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되고 노동자만 현장에서 고통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https://news.v.daum.net/v/20200920164944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