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_나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 배우는 지금 찍고 있는 걸 그냥 ‘현실’로 받아들이는구나. 많은 배우들은 ‘컷’ 하면 그 감정에서 못 빠져나와 겸연쩍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송강호는 그런 게 없다. 이 배우는 그저 서로 다른 수많은 현실의 집합 속에 있구나, 감독인 나도 그런 현실감각을 잃지 말아야지, 그렇게 계속 신선한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송강호라는 배우는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정말 뛰어난 현실 연기를 선보이지만, 막상 처음 모여 시나리오 리딩을 할 때는 정말 못한다. 그렇게 못할 수가 없다. (일동 대공감) 종종 신인배우들이 리딩 때 “감독님, 저 너무 못하죠. 죄송해요”라고 울상이 될 때 ‘대한민국에서 리딩 제일 못하는 배우’로 송강호의 예를 든다.
박찬욱_그 소문이 김지운 감독 때문에 다 퍼졌구나. (웃음)
송강호_그러게,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 (웃음)
박찬욱_심지어 나는 리딩 시작하기 전에 ‘송강호는 원래 못하니까 너희들도 굳이 잘할 필요는 없다’고 미리 얘기까지 해둔다. (일동 웃음)
한재림_<관상> 때는 리딩 잘하셨는데.
송강호_이거 참, <관상> 리딩 끝나고 “촬영 들어가면 그렇게 안 하실 거죠?”라고 했으면서. (일동 웃음) 나는 지금껏 <관상> 리딩을 가장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김지운_그래서 송강호라는 배우는 대사가 자기 입에 붙을 때까지 그 리듬과 호흡을 어떤 과정을 거쳐 가져가는지 궁금했다. 여기 있는 감독들 모두 송강호의 뭔가 부족한 리딩과 너무 뛰어난 현장에서의 연기, 그 사이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송강호_수많은 시나리오를 받아 보는데, 출연할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당연히 내 배역을 읽으면서 본다. 당연히 리딩하러 모이기 전에도 크게 소리내 읽으면서 본다.
감독 일동_진짜?
송강호_허, 이분들이 참. (웃음) 그런데 솔직히 <관상>(2013) 전까지는 대사를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상당히 어려웠다. 김지운 감독님이 얘기한 그 현실감이라는 것이, 그냥 앉아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읽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글로만 알 수 있는 그 인물을 내가 끄집어 올리기까지 ‘읽는다’는 행위 외의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크랭크인이 다가오면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면서 그 인물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기계적인 훈련 그 자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관상> 막바지 촬영 때쯤 <변호인>이 들어왔다. 한재림 감독님 앞에서 이런 얘기하기가 너무 미안한데, 현장에서 <변호인> 시나리오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이게 대충해서 될 게 아니더라. 거의 1인극이나 다름없어서 감독 모르게 훈련을 많이 했다. 그러다 <변호인> 리딩을 하러 갔는데 김지운 감독님이 퍼트린 그 소문을 다들 알고 편하게들 왔더라고. (웃음) 그래서 그 리딩 시간이 형식적인 시간일 거라 생각하며 농담 주고받으며 시작했는데, 옆 사무실에서 싸움난 줄 알고 구경 올 정도였다. 내가 리딩을 그렇게 하는 걸 보고 다들 깜짝 놀랐을 거다.
김지운_듣고 보니 송강호의 예를 들면서 배우들에게 “네 것이 아닌 건 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리딩 그 자체보다 인물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강호씨가 리딩 단계에서는 동기 부여라는 측면에서 “아직 내 것이 아니어서 잘 안 된다”고 했던 것 같다. 보통 리딩을 정확하게 잘 해내는 배우들은 막상 촬영 들어가서도 그것과 똑같이 한다. 만족스럽긴 하지만 딱히 긴장감이 생기지는 않는다. 반면 송강호는 나중에 현장에서 어떻게 할까 너무 궁금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