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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유용/추천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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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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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온 불행에 맞서는 현명한 방법

서점을 갔다. 익일 배송보다 빨리 확인해야 할 책이 종종 있다. 내가 원하는 페이지가 웹의 미리보기 서비스에 나오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경험상 제로에 가깝다. 이렇게까지 급하게 필요한 책은 흡사 약속이라도 한듯 전자책 역시 나와 있지 않다. 이럴 때 보통 우리는 어디를 가더라. 그렇다. 서점이다.

그러나 동네마다 있었던 서점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세번 접어 정사각형이 된 오천원 지폐를 부적처럼 주머니에 넣고 찾아온 소년 소녀들의 삶을, 예상치 못한 문장과 함께 송두리째 뒤흔들어 바꾸어놓기 일쑤였던 동네 서점은 부동산과 카페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골목 깊숙이 뿌리를 내려 고목처럼 새겨져 있던 서점들도 어느 순간 버티지 못하고 뽑혀 사라졌다.

그렇게 급하게 필요한 책이 있을 때 찾는 곳이 있다. 용산의 상가 건물에 위치한 작은 서점이다. 스피커를 사러 갔다가 우연히 찾았다. 도심의 대형서점을 찾기 부담스러울 때 참 좋은 곳이다. 서점에 미리 전화를 걸어 재고를 확인한 뒤 집을 나섰다. 이 서점은 다 좋은 데 단점이 하나 있다. 주차장이다. 건물을 끼고 뒤로 돌아가는 상가 주차장인데 상당히 좁다. 게다가 출구와 입구가 같아서 무인 차단기를 가운데 두고 들어가려는 자와 나오려는 자가 대치하는 일이 간혹 벌어진다. 보통 이렇게 주차장이 좁은 경우 건물의 뒤로 돌아들어 가는 왼쪽 길에 입구가, 오른쪽 길에 출구가 있기 마련인데 왜 이렇게 설계를 했는지, 어떻게 허가가 났는지 모를 일이다.

서점에 도착하자 직원이 미리 빼놓았던 책을 건네주었다. 책을 받아들자 만족스럽다. 무게감도, 엄지와 검지가 표지에 닿는 감촉도 마음에 든다. 신용카드를 꺼내는 동안 직원이 묻는다. 차 가져오셨지요? 단골이기 때문에 그녀는 내 차 뒷번호를 알고 있다. 주차비가 선결제 되었다. 이것도 이 서점의 장점이다. 책을 사면 주차비는 공짜다.

건물을 나서 차에 탔다. 시동을 건 뒤 건물을 끼고 돌아 차단기로 접근했다. 선결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차단기는 자동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올라가지 않는다. 잠시 멈추어 있다가 조금 후진해서 다시 진입해 보았다. 차단기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뭐가 문제지? 나는 차에서 내려 주차장 관리실 쪽으로 달려갔다. 관리인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묻기도 전에 아저씨가 대답했다. 주차비 결제가 안 됐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신용카드를 꺼내 주차비를 결제했다. 이것 때문에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서점에 사정을 이야기하는 사이 차단기 반대편으로 들어오는 차가 있다면 곤란하다. 서둘러 차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뒤통수에 대고 아저씨가 소리쳤다. 센서가 인식 못 할 수 있으니까 충분히 후진했다가 나가야 해!

차에 타 정면을 보니 아뿔싸. 하얀색 차가 진입을 망설이며 이쪽을 보는 중이다. 나는 잠시 기다려달라고 수신호를 들어 보인 뒤 조금 후진했다가 차단기로 다가갔다. 여전히 올라가지 않는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이 후진했다. 그랬더니 하얀색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주차장으로 다시 들어가는 줄 안 모양이다. 나는 포기하고 최대한 후진해 주차장의 연석 코앞까지 차를 뺐다. 여기서 차를 꺾어 주차장으로 아예 들어가 버리면 하얀색 차가 들어올 공간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이 방법뿐이다.

차단기가 열리고 하얀색 차가 접근해 왔다. 그런데 주차장 쪽으로 꺾어 들어가지 않고 내 차 앞에 멀찍이 그냥 서버리는 게 아닌가. 왜 주차장으로 들어가지 않지. 가만 보니 진입하다가 내 차에 닿을까 봐 조금 더 후진하길 바라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 차와 하얀색 차 사이의 거리는 이미 꽤 멀다. 1톤 트럭도 지나가겠다. 저기 수영장도 파고 주차장도 하나 새로 만들겠다, 아니 왜 못 지나가는 건데. 아무래도 운전이 서투른 사람인가 싶어 조금이라도 더 통로 모서리에 붙여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차를 조금 앞으로 뺐다가 뒤로, 그리고 옆으로 바짝 붙였다. 그러다 빠바박, 긁히는 소리. 응? 연석에 닿았을 리 없는데? 짜증이 확 밀려온다. 창문을 열어 내다보니 왼편의 연석 위로 철제 장비가 비죽 튀어나와 있다. 하느님 맙소사.
기가 막히게도 여전히 하얀색 차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보다 못한 주차장 아저씨가 달려오더니 하얀색 차에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래도 얼른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공간이 넓은데 왜 못 들어오느냐고 역정을 내는 아저씨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제야 차가 천천히 움직인다. 조금씩 한번 조금씩 두번 돌더니 부자가 바늘귀를 통과하듯 세상 어렵게 빠져나간다. 나는 차에서 내려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길게 찢어진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아하아아.

집으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이 먹구름이다. 이걸 하지 않았으면 그걸 좀 제대로 해주었다면 저게 애초 없었다면, 따위의 말들이 문장부호 없이 어지럽게 뒤섞였다가 뭉개지기를 반복한다. 이 반복이 열번 이상 계속되고 나면 이성의 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주워 담을 수도 없이 이미 벌어져 끝난 일을 두고 왜 새롭게 고통받느냐는 생각이다. 머리를 흔들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어 본다. 30초가 지나고 나면 나는 앞선 생각들을 처음부터 되풀이하고 있다.

불행한 일을 겪으면 사람의 머릿속은 그렇게 된다. 그리고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져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 보며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내 차에 상처가 생긴 가장 큰 원인은 뭘까. 내가 원하는 페이지를 정확히 미리보기 서비스해주지 않은 인터넷 서점인가. 좀 더 기민하게 전자책 파일을 등록하지 않은 출판사인가. 주차비를 선결제하는 데 실패한 서점 직원인가. 좀 더 빨리 달려 나와 하얀색 차를 다그치지 않은 주차장 관리 아저씨인가. 연석 위에 비죽 튀어나오게 철제 장비를 방치해 둔 누군가인가.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면 그냥 가만히 있을 일이지 도와준답시고 연석에 좀 더 바짝 붙이려던 나인가. 차에 탄 채로 앞구르기를 해도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냥 버티고 서 있던 하얀색 차인가.

청년들의 고민을 듣다 보면 스무해 전에 내가 했던 고민과 똑같아 놀랄 때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이별 문제가 특히 그렇다. 이들은 대개 자신이 한 특정한 행동 때문에 상대가 결별을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그 특정한 행동을 바꿀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와 같은 생각에 몰두한다. 그래서 집 앞에 찾아가기도 하고 새벽 두시에 전화를 걸기도 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문제의 특정한 행동은 말 그대로 특정한 행동일 뿐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이며, 이것만 수정되면 상대가 이별을 철회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명의 상대를 떠나보내고 내가 떠나오기를 반복하며 삶을 살아내다 어느 순간 마침내 깨닫게 된다. 그것 때문에 헤어진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시간을 돌려 특정한 행동을 고치거나 아예 벌어지지 않게 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라는 걸 말이다. 관계가 이어졌다가 끊어지기까지의 과정에서 명확한 건 오직 시작과 끝뿐이다. 나머지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다. 거기서 선명한 원인 한가지를 찾아내겠다고 애쓰는 건 이미 먹고 있던 국수 그릇에서 처음 삼킨 면과 마지막에 삼킬 면의 시작과 끝을 찾아 이어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한 집착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인과관계를 창조한다.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철저하게 제거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개인사에서도 그렇고 국제정치에서도 그렇다. 스스로를 변치 않는 피해자로 설정하고 그러므로 옳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정치의 근성은 이 시대의 가장 비뚤어진 풍경 가운데 하나다. 당장 이기기 좋은 전략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사람을 망친다.

사람의 능력으로 특정할 수 있는 몇가지 원인을 고치거나 없앤다고 해서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피할 수 없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당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뿐이다.

오늘 밤도 똑같이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천장에 맞서 분투할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내일은 차를 수리해야겠다.

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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