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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감정을 다루는 직업이다. 어느 예술이나 감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지만, 연기만큼 즉각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작업은 드물다. 배우는 개인적으로 슬프지 않은 상황일 때도 감정을 끌어올려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하고, 화가 나지 않았음에도 분노를 끌어올려 격앙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일이다 보니 종종 받는 오해가 있다. 배우는 스스로의 감정을 잘 컨트롤할 수 있다는 오해다.
팝콘이가 세상을 떠나던 날, 나는 부산에 있었다. 영화 〈야구소녀〉가 2019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덕이었다. 막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된 때였고, 부산의 하늘은 맑았다. 오후로 예정된 무대인사를 기다리며 대기 중일 때 전화가 왔다. 팝콘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얘기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 무렵 팝콘이는 계속 아팠다. 고칠 방법도 없었다. 병원에서도 병명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함께한 세월만 벌써 11년이었으니,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팝콘이는 유독 나를 잘 따랐다. 긴 촬영을 마치고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도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동생 같은 존재였다. 그런 팝콘이가 세상을 떠났다는데,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몇 시간 후에는 관객들과 만나야 했고, 영화제 기간 내내 부산에 머무르며 해야 할 일정이 있었다. 그 순간엔 눈물을 조금 흘린 것도 같은데, 몇 시간 후엔 무대에 올랐다. 웃는 얼굴로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배우가 여느 예술가들과 다른 건, 자신이 원하는 감정을 선택해서 표출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 탓에 다른 감정보다 내 감정을 표출하는 데 서툴렀다. 영화제가 끝나고, 팝콘이가 세상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서울에 돌아왔다. 이미 팝콘이에 대한 물리적인 정리는 모두 끝나 있었다. 제대로 슬퍼하거나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어마어마한 양의 스케줄이 밀려들었다. 그 시기 나는 MBC 드라마 〈365: 운명을 거스르는 1년〉과 tvN 〈비밀의 숲2〉 두 편의 작품을 동시에 촬영하고 있었다. 나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볼 시간조차 모자랐다.
그 후로도 바쁜 나날이 한참이나 계속됐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휴식이 갑자기 찾아왔다. 역할에 몰입할 필요가 없는, 오랜만에 갖는 여유였다. 동시에 내 감정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제대로 된 추모를 하지도 못한 채 팝콘이를 떠나보냈지만, 무의식 어딘가 깊은 곳에서는 팝콘이를 잃어버린 슬픔이 점차 자란 건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텅 빈 듯 허전한 마음이었다. 강형욱 훈련사가 출연해 개와 교감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11년 동안 나는 팝콘이에게 좋은 가족이었을까? 팝콘이는 분명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가족이었고 우리는 너무 행복하게 잘 살았지만, 일 때문에 계속 집을 비웠던 탓에 팝콘이에게 해준 것보단 못 해준 게 더 많은 것 같았다. 떠나보내는 과정만큼은 제대로 해줘야겠다는 결심을 한 게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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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 끝에 완성된 게임이 바로 ‘안녕! 팝콘’이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게임을 처음 실행했을 때 느낀 건 그리움이나 애틋함이 아니었다. 이상했다. 그건 뿌듯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팝콘이의 반려인이라기보단 창작자로서의 마음이 좀 더 컸던 걸까? 나는 게임을 준비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며 어쩌면 무의식 상태에서 저절로 나의 마음이 정리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임이 공식 출시되기 전까지는.
감사하게도 출시 당일부터 수많은 사람이 게임을 해보고 리뷰를 남겨주었다. 작품을 끝내고도 리뷰를 찾아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날만큼은 하루 종일 리뷰만 보고 있었다. 그제야 갑자기 목 아래가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몇 년 사이, 그렇게 펑펑 울어본 건 오랜만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만 뒀던 슬픔이 터졌다.
모든 종류의 개를 사랑하는 반려인도 아니었으면서 어떻게 이런 게임을 준비했던 걸까. 나에게 ‘안녕! 팝콘’을 만들고 공개하는 과정은 내 마음에서 팝콘이를 떠나보내는 긴 장례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장례의 긴 과정을 거치며 남은 사람들은 보내는 이를 향한 감정을 정리한다. 게임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장례 절차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오열하기만 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식을 잘 치르고 난 다음에 모두가 감정을 잘 추스르는 것처럼. 지난한 장례 과정을 거친 뒤에는 슬픔보단 떠난 이가 좋은 곳으로 갔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커지는 법이다. 나에게는 ‘안녕! 팝콘’의 제작 자체가 그 모든 의식이었다.
‘안녕! 팝콘’은 나의 감정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기록까지 남겨주었다. 공개 직후 앱스토어 무료 인기 게임 순위 1위에 오른 것이다. 내가 보유할 줄 알았던 최고 점수가 다른 분들께 넘어간 게 살짝 아쉽긴 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팝콘이와 나의 이야기에 공감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도 팝콘이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그리고 나의 스마트폰 속에서 잊히지 않고 아주 긴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Who's the writer?
이준혁은 배우다. tvN 〈비밀의 숲〉 〈60일, 지정생존자〉 등의 드라마와 〈신과 함께〉 〈야구소녀〉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번 칼럼은 그의 글을 〈에스콰이어〉에서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