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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21년 된 '망겜' 유저들이 넥슨을 찾아가 벌인 놀라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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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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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286] <내언니전지현과 나>

[김성호 기자]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법학도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언이다.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이 주장한 '권리 위에 잠든 자의 권리는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문구를 다듬은 것이다. 아무리 권리가 있더라도 스스로 주장하고 챙기지 않으면 법이 먼저 나서 보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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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언니전지현과 나 포스터
ⓒ 호우주의보

 

말은 쉽지만 실행하긴 어렵다. 대개 침해받는 권리를 나서서 주장하는 건 피곤하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게 아니라 권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무릎 꿇는 일이 비일비재한 게 현실이다.

갑질 고객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고, 수당도 없이 야근하며, 직장 내 괴롭힘에도 묵묵히 감내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거리가 좀 뜬다 싶으면 임차인을 내보내려 애쓰는 건물주가 한둘이 아니다.

하도 지고 깨지다보니 패배가 당연한 일이 된다. '나서 봐야 뭐가 되겠어?' '모난 돌이 정 맞지, 가만히 있자' 같은 생각이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부당한 고용주에 대한 직장인들의 저항은 곧은 소리와 투쟁보다는 '월급루팡' 같은 방식으로 이뤄질 때가 많다. 주인 눈을 피해 늘어져 자던 종놈 같은 태도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이래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박윤진도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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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언니전지현과 나 일랜시아 개발자를 만난 내언니전지현.
ⓒ 호우주의보

 
21년 된 잊힌 게임 '일랜시아'

우선 영화는 배우 전지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언니전지현'은 넥슨이 1999년 출시한 게임 '일랜시아' 속 아이디다. 한때 한국 최대 이용자수를 자랑했다는 이 게임은 21년이 흘러 이름을 기억하는 이도 찾기 어려운 고전이 됐다.

오래되고 잊힌 게임이지만 유저가 없는 건 아니다. 여전히 수백명의 게이머가 접속해 게임을 즐기고 있다. 다수 게이머가 24시간 언제든 접속해 진행하는 MMORPG 특성상 21년 간 일랜시아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고 가상공간에 존재해왔다.

영화는 일랜시아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21년 간 존재해온 일랜시아 세계는 낙후되고 방치됐다. 이렇다 할 업데이트도 없고 최소한의 관리도 되지 않아 버그가 속출한다. 불법 프로그램이 게임에 개입하는 매크로가 보편화돼 있다. 다른 게임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관리자가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MMORPG 특성상 신규 게이머 유입이 제한되는데 기존 게이머들은 하나 둘 다른 게임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용자가 많지 않고 게임 자체도 적극적으로 과금 하지 않는 형태라 수익성이 높지 않다. 정기적으로 게임을 돌보는 운영자를 붙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지던 당시, 일랜시아 마지막 업데이트는 2008년이었다. 게임 생태계는 완전한 무법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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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언니전지현과 나 넥슨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게 된 일랜시아 유저들.
ⓒ 호우주의보

 
고인물들이 창조주와 만났다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랜시아 유저 중 내언니전지현이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일랜시아를 해온 그녀가 오프라인 세상에서 카메라 하나를 들고 길드 유저를 찾아 떠난다. 길드원 수십 명을 한명씩 만나 각자에게 일랜시아가 갖는 의미를 듣는다. 그리고 이들의 의견을 모아 일랜시아를 만든 넥슨 개발자를 찾아간다.

회사와 개발자가 버린 게임에 남겨진 이용자들이 게임이 지켜져야 하는 이유를 추려 회사를 찾는 모습은 제법 멋이 있다. 온라인 세상에서 시간을 죽이는 일이라고만 게임을 생각해온 앞 세대조차 쉽게 하지 못한 당당한 일이다.

내언니전지현을 중심으로 한 여러 유저들은 넥슨의 전향적 자세를 이끌어낸다. 넥슨은 올 여름 일랜시아에서 공식 이벤트를 열었다. 게임 내에서 얼음조각을 모아 아이템과 바꾸는 평범한 행사였지만 12년 만에 이뤄진 공식 이벤트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수익성에 관계없이 서버 운영을 지속하겠다는 업체 입장까지 나왔다. 한국 온라인 게임 역사상 유례없는 잊힌 게임 유저들이 거둔 성과였다.

감독의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졸업작품이기도 한 <내 언니 전지현과 나>는 졸업작 다운 패기와 함께 아쉬움도 뚜렷하다. 성장이나 아이템 구매에 집중할 필요가 없는 게임의 높은 자유도를 현실세계 문제와 엮고자 했던 시도는 그다지 성과를 보지 못했다.

치열한 경쟁과 버거운 현실 속에서 자유도 높고 힘들여 노동할 필요가 없는 가상세계를 꿈꾼다는 해석도 그럴듯하지만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 "일랜시아를 돌봐주세요"하는 당당한 요구에 비해 "일랜시아 왜 하세요?"하는 물음은 효과적으로 표현되지 못한다. 둘 중 어느 하나에 집중했다면 보다 깊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영화는 우리가 알지 못하던 세계를 보여준다. 21년째 넥슨 서버에 존재하는 일랜시아 세계엔 여전히 수백명의 유저들이 접속해 게임을 즐기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들은 넥슨이 제가 뛰노는 세상을 먼저 돌아보고 혹은 끝내버리길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몸을 일으켜 마땅한 제 권리를 지켜내려는 일랜시아의 투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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