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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왜 이럴까?] 가슴 속에 묵은 한(恨)의 심리학
그 일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 없습니다. 밤에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게 됩니다. 시원하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아예 확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아니면 경찰에 고소하여 엄청난 배상을 받아내는 상상도 합니다. 가슴이 꼭 죄이도록 고통스럽다가, 금새 통쾌한 기분이 듭니다. 절대 잊지 않고 응어리진 마음을 갚아줄 작정입니다. 하지만 결심만 하고, 벌써 수십년이 흘렀습니다.
오늘은 ‘한(恨)’의 심리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절대 잊지 않을테다
앙심은 원한을 품고 앙갚음하려 벼르는 마음입니다. 가슴에 맺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상태죠. 부드럽게 말하면 ‘쿨’ 하지 못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뒤끝’있는 것입니다. 한(恨)이라고 하면 서정적인 느낌이 들지만, 심리학적으로 앙심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나 원한이 조금은 다 있습니다. 세상 살면서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겪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들은 모두 잊지 못할 한이 있기 마련입니다. 집단은 집단의 논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소한 기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게 모르게 매일같이 누군가는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하지만 쌓인 원한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애 어머니를 둔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늘 어머니가 창피했는데, 친구와 다투다가 ‘이런 병신 자식이!’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물론 그 친구가 어머니의 장애 여부를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이 날의 일을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어머니를 볼 때 마다, 그 날의 모욕적 기억을 되뇝니다. 차라리 자신의 일이라면 참겠는데, 어머니를 욕한 것이니 더더욱 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수십년 전 우리 어머니를 욕했으니 사과해라’라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기억도 잘 나지 않을 것 입니다. 설령 ‘내가 그랬었다면 정말 미안하다. 초등학교 때 모르고 한 말이다’라는 사과를 듣는다 해도 속이 시원할 리 없습니다. 수십 년 간 고통받았으니, 사과 한 마디로 끝날 일이 아니죠. 때린 놈은 기억 못하고, 맞은 놈만 억울한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일단 굳어진 앙심은, 마치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평생토록 마음 속에서 되풀이됩니다.
언더독 효과: 약자를 자처하는 심리
퇴계 이황의 이야기입니다
“오씨 성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그는 늘 자신에 대해 ‘소인’이라 하지 않고 ‘나’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 밖에 나더니 결국 동네에서 쫓겨나 외딴집에 살다가 죽었는데, 죽은 지 며칠이 지나도록 사람들은 그 사실조차 몰랐다”- 이규태,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내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앙심의 심리는, 결국 약자자처(弱者自處)의 심리로 이어집니다. ‘약자’란 말 그대로 ‘약한 사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 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스스로 강자가 되는 것이 불편해지는 역설입니다. 약자로 계속 남아 있어야, 가슴 속 깊은 원한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점점 내적인 발전이 정체됩니다. 야구 경기를 볼 때 지는 팀을 응원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응원을 받기 위해서 일부러 지는 팀이 생긴다면 곤란합니다.
한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약자자처의 심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급기야는 타인에게도 ‘약해질’ 것을 강요합니다. 자신은 ‘소인’이 아닌데, 왜 ‘소인’으로 낮추어 불러야 하냐던 오씨 성 남자는 결국 배척을 받고 외롭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겸손과 다른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솔직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과도한 자기 비하는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시작됩니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피해자로 기만하려는 것이죠.
이러한 약자자처, 강자배척의 심리가 작용하면 역설적 상황을 생기기도 합니다. 우수한 직원을 뽑겠다는 면접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학비재한 사람이지만……’라는 사람이 선발됩니다. ‘저는 우수한 경력과 다양한 재주가 있다며 어필하는 지원자는 종종 낮은 평가를 받습니다. 도대체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겠다는 것인지, 능력이 없는 사람을 뽑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조직이 잘 굴러갈 리 없습니다.
물론 패배자에게도 힘찬 박수를 보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응원이 아니라, 내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약자자처, 강자배척의 심리때문이라면 문제가 됩니다. 점점 이긴 자의 승리를 ‘무엇인가 부당한 것’으로 의심하게 합니다. 자강에 힘쓴 사람을 부당하게 질시합니다. 심지어 ‘경기에서 진 것도 슬플 텐데 그냥 이긴 것으로 쳐주자, 하지만 쟤는 늘 우승하니 뭐가 부럽냐, 그냥 좀 져줘라’라는 비이성적 반응도 생깁니다. 과도하게 자신을 약자에게 투사하여 생기는 일입니다.
끊임없는 분노: 밖으로 폭발한 앙심
남자는 땅을 30평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신축 부지에 포함되자, 건설회사는 평가를 거쳐 1억원을 보상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억울했습니다. 무려 4억원을 달라고 했는데, 회사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죠. 앙심을 품었습니다. 재벌 회사와 국가가 평범한 시민의 땅을 빼앗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발이 닳도록 시청에 찾아가 탄원서를 쓰고, 회사에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청와대에도 진정서를 냈습니다. 불평은 그의 일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해결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땅만 빼고 아파트가 건설되고, 2차선으로 계획된 도로는 1차선으로 바뀌었습니다. 건설회사는 그의 땅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자의 원한은 사회 전체를 향했습니다.
남자는 급기야 창경궁에 불을 지릅니다. 다행히 불은 금방 꺼졌습니다. 그런데 창경궁 방화 수리비를 내라는 판결을 받자, 분노는 극에 달합니다. 결국 남대문에 몰래 올라가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지릅니다. 1398년에 건립된 국보 1호 남대문은 이 사건으로 인해 거의 전소됩니다.
정신의학적으로 과도한 앙심을 품는 성격을, 불평 성격(Querulent Personality)이라고 칭합니다. 항상 의심이 심하며, 어떤 제안에도 반대하고, 처우에 대해 불평하며, 쉽게 노하는 성격이죠. 주로 40대 이후에 생기는데, 남성이 약 네 배 정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보통 교육 수준도 높고, 가정도 가진 ‘건실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내적으로 힘든 일이 닥치면, 점점 지속적인 불평과 불만을 호소하고, 세상을 불신하게 됩니다.
피해 망상과 비슷하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불만의 원인은 망상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죠. 분명 억울한 일입니다. 다만 1만큼 억울한데, 100만큼 불평한다든가,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도 절대 잊지 않는다는 점이 다릅니다.
한을 푼다는 것
한으로 가득 찬 마음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습니다. 수십 년 간 품어온 앙심은 수십 년 간 자란 나무처럼, 그 뿌리가 아주 깊고 견고합니다. 게다가 누가 봐도 억울한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니 보상으로도, 보복으로도 도저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수십 년 간 고통받은 마음을 어떻게 보상받겠습니까? 무슨 수로 보복하겠습니까?
사실 억울한 일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심리적 모듈은, 진화적 측면에서 분명 적응적 이득이 있습니다. 게임이론에서는 이를 방아쇠 전략(trigger strategy)이라고 합니다. 한번만 방아쇠가 걸리면, 이후에는 무조건 쏴 버리는 것이죠. 배신자에게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하는 대인관계의 전략입니다. 조금만 충실성에 의심이 가도 절대 영원히 협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아주 위험합니다.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고, 본인 스스로도 고립됩니다. 우리들은 모두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합니다. 의도하고 상처를 준 적도 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미안할 일을 서로 주고 받습니다. 작은 잘못은 그냥 넘어가야 현명합니다. 큰 잘못이라도 시간이 지나 잊혀지면 용서해야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고수하면 세상에는 장님만 남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입니다.
물론 편집적 심리 모듈은 깊은 감정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간단히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의도적인 용서와 화해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에 눈감고, 불의와 타협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잊혀질 리야 있겠냐마는, 그래도 잊어가는 것입니다. 행복과 미래를 위해서 깊은 한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 필자소개
박한선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진화와 사회에 대해 강의하며, 정신의 진화 과정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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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사람을 위한 요약
한은 심리학적으로 앙심과 다를 바 없다.
한이 있는 사람은 약자라는 걸 인정 받고 싶어 자기 인생을 약자가 될 구렁텅이에 몰아 넣을 수 있다. (언더독 효과)
그러다 약자에게 너무 감정이입해서 강자-승자를 부정하고 그 성과를 무시하려는 오류도 범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앙심 잘 품는 사람의 한이 쌓이고 쌓이다 숭례문에 불 질렀다.
이렇게 불평 성격(40대 이상 남성에 4배 많음)을 가지고 원한을 잊지 않으면 방아쇠 전략(무관용으로 배신자를 쏴버리는 게임 전략)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반복하면 결과 맹인만 남는다- 마하트마 간디.
자기 자신과 사회를 위해 작은 원한은 잊고, 큰 원한은 화해하여 행복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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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정서가 스스로를 약자로 만들어 배려를 얻으려 한다는 거 ㄷㄷㄷ
일본 속담에 남을 저주하려면 무덤 (내 것과 남의 것) 두 개를 파야 한다는 게 있는데, 그거 생각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