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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전여친의 출산 소식에 눈물이 나는 이유를 모르겠는 후기 (동성, 긴 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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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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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덬에게는 5년간 연애한 언니가 있어. 나는 양성애자야. 지금은 남자친구가 있거든. 언니랑 나는 스무살의 여름에 만났고, 스물다섯의 겨울에 헤어졌어. 딱 일년 반 전에. 우리는 되게 이상하게 만났어. 나는 방학 때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에 알바를 하러 갔었어. 거기서 언니를 만났는데, 처음 나한테 일을 알려주는 언니는 진짜 예뻤어. 막 아이돌처럼, 연예인처럼 예쁜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예쁜 거 있잖아, 왜. 분위기가 예쁜 거. 따뜻하고, 친절하고, 사랑스럽고, 온화하고 또 부드럽고. 나덬은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의 따스함, 이런 건 전혀 모르고 커왔는데, 언니랑 같이 일을 하고 매일 얼굴을 보고 친해지면서 엄마가 있었다면 이런 사람이었을 것 같다, 라고 나 혼자 멋대로 생각했었어. 공장에 한달 반 가까이 다니면서 한 번 회식을 간 적이 있었어. 그때 술에 잔뜩 취한 언니가 담배를 피러 나갈 건데 같이 나가자고 해서 같이 나갔고, 삼겹살집 옆에 어두운 골목에서 내 손을 잡고 키스를 했었어. 피하지 않은 나도 이상하지만, 그 뒤에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자기 자취방에 날 데리고 갔던 언니도 이상했어. 관계는 처음인데, 여자끼리는 어떻게 하는 거지, 나한테 뭘 하려는 거지, 온갖 생각을 하면서 따라갔던 거 같은데, 언니는 침대에 누워서 나한테 웅얼거리면서 고백을 했었어. 미안해, 기분 나빴어? 난 항상 불안하고 무서운데, 회사에서 니가 옆에 있고 너랑 친해진 이후로는 안 불안하고 안 무서워. 나는 니가 좋은가 봐. 언니 자는 것만 보고 가, 미안해. 너무 떨리고 두근거려서 5년 동안 수시로 기억하고 되뇌었던 말이라서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

사귀자, 연애하자 그런 말은 언니도 나도 안 했어. 사실 나는 연애라는 게 언니가 처음이었어서 언니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이게 사랑인지, 좋아하는 건지, 하나도 몰랐어.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에도 1년이나 걸렸던 것 같아.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 말고 한참이나 울던 언니가 기억나. 나는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을 자퇴했어. 그리고 아예 그 지역으로 내 짐들을 다 옮겨서 언니랑 동거를 했어. 공장 일이라는 게, 하찮고 우습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손이나 다리도 아프고, 일머리가 필요한 일이라서 정말 많이 힘들었어. 힘들어서 회사 화장실에서 울기도 하고. 그래도 회사에서, 집에서 항상 다정한 언니가 내 옆에 있어서 정말 좋았어. 야간 일을 하고 아침에 퇴근을 해서 언니랑 같이 아침을 하고 있으면 언니랑 이렇게 소소하고 행복하게 오래 살 수 있었으면, 오늘도 언니랑 출근해서 일하고 언니랑 퇴근하고, 내일 아침엔 이거 해먹어야지, 하는 생각이 매일 들었어. 남자가 결혼을 하고 가정이 생기면 마음에 안정이 온다고들 하잖아. 나는 그 언니랑 지내는 시간들이 그랬어. 오버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언니가 나의 보호자, 하늘, 방패막, 전부 같았어. 일찍 돌아가신 엄마와 내가 엄마랑 많이 닮았다고 늘 화내고 욕하고 가끔은 때리던 아빠가 내 전부였는데, 언니는 나를 처음으로 보듬어준 사람이었거든.

언니는 아기를 좋아했어. 마트에서도 길에서도 아기만 보면 귀여워서 발을 동동 구르고, 아기 엄마분이 손 한 번 잡아보셔요~ 해도, 자기 손에 더러운 게 많아서 아기 손에 균 옮으면 안 된다고 주먹만 쥐었다 폈다 했어. 또 항상 아기를 갖고 싶다고 했어. 나는 언니가 그럴 때마다 그럴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어. 그리고 우리 둘, 나중에 꼭 돈 많이 모아서 여자끼리 결혼할 수 있는 곳에 가자, 거기 가서 입양하자. 그게 안 되면 힘들고 안쓰러운 아이들 도와주며 살자, 약속했었어. 언니가 아기를 갖고 싶다고 할 때마다 그렇게 약속했어. 나는 내가 남자든 여자든 늘 상관이 없었는데, 언니가 아기 이야기를 꺼낼 때는 늘 내가 남자가 아닌 사실이 싫고, 미안했어. 언니를 닮은 딸이면 엄청 예쁠 거고, 아들이면 되게 잘생겼을 텐데 라고 상상했어.

우리가 헤어지던 해의 겨울에 언니한테는 남자가 생겼어. 같은 회사에 다니던 오빠였는데, 언니한테 반해서 많이 대쉬를 했었나봐. 언니랑 내 사이는 당연히 모두에게 비밀이었으니까, 언니는 늘 애인 없어요 라고 말하고 다녔어. 그 오빠가 잘못한 건 어무것도 없는데도 나는 그 오빠가 미웠어. 그래서 회사에서도 사적으로도 그 오빠한테 참 나쁜 짓을 많이 했어. 그래봤자 내가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그 오빠의 차를 얻어 탔을 때 차에 일부러 음료수를 흘리거나 회사에서 그 오빠와 마주치면 노려본다거나, 뭐. 언니도 처음엔 별로야, 싫어, 니가 더 좋아, 하다가 점점 흔들렸나봐. 내 생일 일주일 전에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내 생일이 되면 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어. 그 오빠가 좋다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어. 남들한테 애인 자랑도 하고, 커플 사진도 지갑에 넣어다니고 싶고, 커플링도 커플티도 커플 운동화도 다 하고 싶다고 했어. 우리는 늘 붙어있어서, 내가 남들의 눈이 무서워서 그런 흔한 커플 아이템이 하나도 없었거든. 미안했어. 다 해주고 싶고, 다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고작 남들의 눈이 무서워서 그 흔한 거 하나 해주지 못해서. 언니를 잡고 싶었어. 따로 살기 시작한 이후에 잠을 너무 못 자서 엉망인 얼굴로 언니한테 찾아간 날에, 언니는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얼굴 보러 왔어, 하고 돌아왔어.

일년 반이 지났는데, 우연히 언니의 친구를 회사에서 만났어. 어제 내가 다른 부서로 심부름을 갔는데 거기 있었어. 그 친구 분은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언니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던 분이었어. 그 친구 분이 머뭇거리다가 나한테 사진을 보여줬어. 아기였어. 거짓말처럼 보자마자 알았어. 눈치도 눈치지만 그 아기가 언니랑 너무 닮아서. 눈이랑, 입이랑. 친구 분이 걔, 지난 달에 아기 낳았어. 안 아프게 금방, 순산했어. 라고 전해줬어. 그 친구 분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아, 그래요?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아기가 너무 예쁘네요. 했어. 퇴근할 때까지 일도 아무렇지 않게 잘 했어. 근데 집에 가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 헤어진 후로 언니가 이사를 가고 서로 연락도 안 하고, 나는 sns도 안 해서 소식을 전혀 몰랐거든. 결혼은 했을까, 헤어지진 않았을까. 헤어졌으면 내 생각을 하진 않을까, 생각만 했는데 막상 언니의 친구 분에게서 아기 사진도 보고,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조금이라도 나쁘게 생각했던 내가 미안하고, 그 소식을 듣고 울어서 지금의 남자친구에게도 미안하고, 그냥. 정확하게 뭐라고 말을 못 하겠어. 회사에는 아프다고 둘러대고 출근도 안 하고 오늘 내내 멀쩡하다가 울다가 반복했어. 누구에게 말을 할 수도 없고, 지금 내 감정이 뭔지 왜 눈물이 나는 건지 모르겠고.

언니랑 내가 만났던 시간들이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은 안 해. 평범하게 남들 다 하는 연애를 했는데, 그냥 조금 특이했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냥 내 생각은 그래. 지금 나도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고, 그 남자친구를 너무너무 사랑해. 매일 아침 같이 밥을 먹고, 매일 같이 잠들고 싶고, 그런 상상을 하면 행복해지는 사람이야. 근데도 왜 언니의 소식에 눈물이 나는지 마음이 복잡해서 종일 기운이 없는지 모르겠어. 다음주 월요일에 통장 비밀번호부터 바꿔야 될 것 같아. 아직도 언니랑 만났던 기념일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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