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로 나미에랑 케야키라니....
같이 언급되는 것 조차 영광이고, 공감되는 부분도 많아서 번역해 봤어.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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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아이돌수호지 외전 제 6 편
[아무로나미에와 케야키자카46 - 라이브와 아이돌]
이마와 앞머리
쇼와시대(1926~1989) 여성 아이돌에게 있어서 앞머리는 생명이었다.
[들국화의 무덤](1981)으로 영화에서 첫 주연이 된 마츠다 세이코(松田 聖子)는 전통 헤어 스타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래서 그때까지 [세이코짱 컷]으로 사수하던 이마를 깠을 때, 지금 생각해보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 마츠다 세이코 : 쇼와시대 최고의 아이돌. 지금도 자주 언급된다
[앞머리는 생명]이라는 이유, 그것은 내리는 쪽이 귀엽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부끄러우니까 라는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연예인만이 아니라, 사춘기를 맞이한 여성에게 공통인 ‘소녀심’이 부르는 업.
거창하게 말하면, 이마를 까는 건 자신의 알몸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 아닐까.
헤이세이(1989년~2019년) 시대가 되어서도, 아이돌의 [앞머리는 생명]은 별로 변하지 않아 보인다.
AKB그룹이나 사카미치 시리즈 등에서도 앞머리를 확실히 만들고 있는 멤버들이 많다.
아이돌에게 있어 [이마 까기]는 지금도 작지않은 리스크인 것이다.
* 코이케 미나미 : 대표적인 앞머리 집착증. 케야키자카 46 멤버 중 한명
그러나 그런 아이돌 중에, 예외라고 하기엔 너무 큰 존재가 있다.
바로, 아무로 나미에다.
1990년대 중반, 혜성처럼 등장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기본이 [이마 까기]이다.
머리 스타일 자체는 바리에이션이 다양하지만, 언제건 이마를 다 드러내고서 그녀는 라이브로 노래하고, 춤춘다.
그것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런 부분에서조차 정형적인 아이돌들과는 선을 긋는 그녀 자신의 위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 그런 [앞머리]가 여태까지의 아이돌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거세게 덮쳐오는 아이돌도 등장했다.
그것이 케야키자카 46의 센터를 맡고 있는 히라테 유리나다.
* 케야키자카 46, 히라테 유리나
존재감 넘치는 퍼포먼스와 엣지 있는 발언이 화제가 되는 그녀지만, 라이브 때 격렬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앞머리는,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방어]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보고 있는 이쪽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 같다.
그런 점에서 역시 아이돌이지만, 아이돌을 넘어선 무엇을 느껴버린다.
티비 등과는 다른 라이브. 거기엔 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
이번엔 이 두명을 통해 라이브와 헤이세이 여성 아이돌의 관계에 대해 찾아보고 싶다.
비트를 새기고
원조 아이돌 [미나미 사오리(1971년 데뷔)] 이후, 오키나와는 수많은 여아이돌 가수의 출신지였다.
나카마 유키에가 여배우로서 인기를 끌기 전에 도쿄퍼포먼스돌에 잠시 소속되어 있었던 것등은, 오키나와 출신 여아이돌 가수 층의 두터움을 느끼게 하는 에피소드다.
그리고 그 역사는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의 존재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MAX, SPEED, 미츠시마 히카리, 그리고 미우라 다이치가 있던 Folder, 치넨 리나등은 전부 이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 출신이다.
그리고 그 선구자가 된 것이, 아무로 나미에였다.
스쿨의 설립자인 [마키노 마사유키]가 돌이켜보면, 10살의 아무로 나미에는 처음 봤을 때부터 한눈에 달라 보였다.
*어린 시절의 아무로 나미에
“휙하고 몸을 흔드는 것만으로, 벌써 달랐어.
보통 애라면, 몸을 움직이면 다리도 스커트 자락도 같은 방향으로 흔들려.
그런데 그 아이는 허리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몸이 비틀리니까, 스커트 자락이 몸과는 반대로 몸에 휘감기는 동작이 되.”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의 레슨은 먼저 [하반신에 비트를 새기는 것부터 철저히 주입한다]에서 시작한다.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에선, [형]을 가르치지 않는다.
춤은 [형]를 보이는 것이 아닌, 연속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 방침은, 실은 노래를 중요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트를 밟을 때 머리를 쓰지마”
라고 마키노는 가르쳤다.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건 당연히 매우 어려운 것이지만, 춤추며 노래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키노는 “댄스는 어디까지나 보컬을 돕기 위한 것일 뿐”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쇼와 시대의 여아이돌 가수도 [노래하고 춤추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무로 나미에 이후, [노래하고 춤춘다]는 것의 의미는 180도 변했다고 말해도 될만큼 변해버렸다.그건, [안무]와 [댄스]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쇼와시대 아이돌 가수의 춤은 [안무]였다.
꽃의 중3 트리오라는 마츠다 세이코라고 해도, 그녀의 춤은 미리 정해진 몸짓이나 동작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키노 마사유키의 말에 따르자면 [형] 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하고 있을 뿐인,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아무로 나미에의 춤은 [댄스]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비트를 베이스로 해서, [연속된 움직임]으로 자신 안에 있는 생각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행위다.
그때, 여아이돌 가수의 역사에 있어서, [노래하며 춤춘다] 라는 것의 의미가 바뀌어 쓰여졌다.
노래와 춤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아무로 나미에는,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그녀의 라이브에서는 MC가 없다.
토크가 그 정도로 자신이 없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이상으로, 아무로 나미에에게 있어서 라이브란 [노래하고 춤춘다], 그것만으로도 끝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재생]의 장으로서의 라이브
어쨌든 아무로 나미에는 언제나 심플하다.
라이브의 의미에 관해서 물었을 때의 대답에도, 그런 일면이 엿보인다.
“콘서트는 유일하게 팬분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소”
“오늘 하루 싫은 일이 있었지만, 이 라이브가 끝난 뒤에는 왠지 시원하다던가, 내일부터 힘낼 수 있게 기운이 솟았다던가, 그런 기분이 들 수 있는 (중략) 콘서트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 몇 년 동안 라이브 했습니다.”
이런 그녀의 대답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라이브가 팬에게 있어, 그리고 아마도 아무로 나미에 자신에게도 있어 [재생]의 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그녀와 팬, 특히 같은 여성 팬들과 오랜 기간 키워온 특별한 관계성이 있다.
아무로 나미에의 인기는 음악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차색 머리에, 얇은 눈썹, 밀가루색 피부, 미니스커트, 부츠라는 그녀의 패션을 흉내낸 10대 갸루가 거리에 넘쳤고, 그런 패션이 [아무라] 라고 불렸던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1977년생인 아무로 나미에가 인기를 끌게 된 계기가 된 곡 [TRY ME ~ 私を信じて]가 발표된 것은 1995년 1월 25일.
즉, 한신/아와지 대지진 발생의 약 1주 후이다.
이 연재에서도 이전에 언급했지만, 1995년은 이후 3월에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이 일어나는 등 시대가 변하게 된 해였다.
단순하게 큰 재해와 사건이 있었던 것뿐만이 아니라, 그때까지 당연하게 계속된다고 생각해왔던 일상이 발밑부터 무너지는 감각을 우리들은 맛봤다.
그리고 그 결과, 누구라도 스스로의 삶을 한 번 더 찾아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정과 학교에 매몰되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온 갸루라는 존재는, 그런 표현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옴진리교 테러사건. 13명 사망. 5000명이상 부상. 5천명 이상의 부상자가 모두 사망할수도 있었던 참사였다.
아무로 나미에가 세상에 나타난 해는, 그런 해였다.
그래서 젊은 여성들에게 있어 [아무라] 라는 것은 패션 만이 아닌, 삶을 선택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건 꼭 세련되고, 멋지게 살아가는 인생은 아니었다.
아니, 미리 깔린 레일이 없었던 만큼 고생도 많았을 터이다.
아무로 자신은 20세에 결혼, 그리고 출산.
이후 이혼한 후에 싱글맘으로 살게 되었다.
팬들은 그런 그녀의 순풍만범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인생을 지켜보면서, 한편으론 제각기 [포스트 1995]를 필사적으로 살아가려고 했다.
그 때의 댄스는, 아무로 나미에로부터 팬에게 향한 가장 큰 메시지였다.
매일매일 맛보는 좌절과 고생에서 풀려나, 재생하는 계기를 주는 것.
그것이 그녀의 댄스임이 틀림없다.
카메라의 컷 분할에 의해 제약받는 티비가 아니라,
댄스하는 그녀의 모습을 제각각의 시점에서 눈에 새기는 것이 가능한 라이브야 말로,
댄스가 가진 진짜 파워를 팬들에게 노래와 함께 체감하게끔 했다.
이렇게 해서 라이브는, 아무로 나미에와 팬 1명 1명에게 있어서 특별한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아리아케 콜로세움, 덤벼봐
아무로 나미에의 인기로부터 20년후의 2015년 8월, 케야키자카 46이 탄생했다.
그 사이에 아이돌의 세계는 [현장]의 시대가 되었다.
티비를 통해서가 아니라, 라이브에서 직접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그런 체험이 더욱더 중시되게 되었다.
2005년 결성된 AKB48가 내건 [만나러 갈수 있는 아이돌]은 그런 시대를 상징하는 프레이즈가 되었다.
2005년 AKB48의 극장 첫 공연의 관객이 고작 7명이었던 이야기는 이젠 전설이다.
*AKB48의 첫 극장 공연. 유료 관객이 7명뿐이었고, 그뒤로 종종 관객이 아예 0명이라도 공연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이전부터 작은 회장이나 길거리에서 라이브활동을 계속하는 아이돌 그룹은 존재했다.
유감스럽게도 싹조차 나지 못하고 사라진 그룹도 적지 않았지만, 그중에는 눈부시게 성공을 거둔 그룹도 있었다.
[도쿄퍼포먼스돌]은 성공한 그룹의 대표다.
1990년 결성(시노하라 료코가 초기 멤버의 한명이었다) 되어, 정원 150명인 라이브 하우스 [하라주쿠 루이드]에서 [댄스 서미트]라고 이름 붙인 정기공연을 개시.
입소문등으로 서서히 관객동원을 늘려서 1993년 8월에는 드디어 일본무도관 공연을 실현시켰다.
*도쿄퍼포먼스돌(TPD). 아직도 기수제로 활동중
여기에 현재 아이돌그룹 활동 스타일의 원형이 있다.
활동의 목표를 물으면 [무도관 공연]이라고 대답하는 신인 그룹이 지금도 적지 않다.
아이돌이란, 한마디로, [성장 이야기]의 세계다.
라이브는 한번만이 아니고, 계속 쌓여간다.
그런 동안에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탄생한다.
선발멤버와 센터의 인선, 멤버의 가입과 탈퇴, 라이브 회장의 레벨업.
거기에 스캔들조차도, 팬도 하나가 된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단지, 그런 [현장]을 중심으로 한 [성장 이야기]도 도를 넘으면 일종의 신앙이 되고, 점점 거북하게 되어버린다.
거기에 돌을 던진 것이, 바로 케야키자카46이다.
2016년 4월 발매된 데뷔곡 [사일런트 마조리티]는 제목부터 아이돌답지 않다.
[너는 너답게 살아갈 자유가 있어. 어른들에게 지배당하지마]
라는 사비를 시작으로, 무리짓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No라고 소리치라고 다가오는 가사는, 마치 반체제 문화나 클레임을 노래하는 노래 같다.
그 후 발매된 [불협화음], [유리를 깨!]등에서도 그 톤은 변하지 않는다.
연차가 쌓인 아이돌 팬이라면, 그것이 작사가인 아키모토 야스시의 연출 중의 하나라고, 어쨌건 납득할 터이다.
일본 가요대상도 수상했던 톤네루즈의 [情けねえ](1991)는
[모두 시대의 잘못이라고 변명하지마, 인생의 방관자들은 내가 용서치 않아]
[장난치지마 자유가 울고 있어]
라고 노래했다.
단지 중요한 것은, 그것을 누가 부르는가, 이다.
저런 가사를 케야키자카46이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이 노래하며 춤춘다.
그런 것이 주목받지 않을 리가 없다.
[사일런트 마조리티]의 뮤직비디오는 그야말로 [이율배반 (ambivalent)]이다.
[미완성]을 상징하는 듯한 재개발 중인 시부야의 공사현장에서 노래하는 멤버들은, 이쪽을 향해 쏘는 듯이 쳐다보며 노래하고 춤춘다.
입고 있는 의상은 아이돌 특유의 제복 같기도 하지만, 어딘가 위엄있는 군복 같기도 하다.
움직임도 그렇다.
일사불란한 포메이션에서 피로되는 정연한 댄스의 한편엔, 사복으로 밤의 거리를 혼자 걷고, 거리와 역의 홈에서 춤추는 멤버들의 씬이 삽입되어 있다.
* 사일런트 뮤비 中
즉, 케야키자카46은 아이돌과 반 아이돌, 두가지 사이에서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다.
기존의 아이돌들이 순종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지 않는 [사일런트 마조리티]였다면, 그녀들은 그곳에서의 탈출을 노래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기존 아이돌과 다르지 않은 일면을 가지고 있는 아이돌이기도 하다.
2016년 12월에 개최된 아리아케 콜로세움에서의 첫 원맨 라이브.
결성한 이후의 역사를 모은 비디오가 흐른 후, 라이브는 [어른은 믿어주지 않아]로 막을 열었다.
이 노래는 어른들이 신경쓰지 않는 [나의 절망]을 노래한 노래다.
조명등의 연출도 포함하여 아이돌의 첫 라이브 오프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어둠이 내려온 스테이지.
그리고 최후에, [시대의 한켠에서 나는 살해당했다] 의 말로 노래가 끝나는 동시에 히라테 유리나가 단언했다.
“아리아케 콜로세움, 덤벼봐.”
* 아리아케 콜로세움에서 첫 원맨라이브
중2병을 넘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지는 사람마다 각각 다를터이다.
다만, 앞머리를 [방패]처럼 해서, 머리 아래 거의 숨겨진 얼굴 아래로 왼쪽 눈만을 빛내며 그녀가 던진 찌르는 듯한 이 한마디는, [현장]에 대한 선전포고의 울림이 있었다.
[나의 절망]을 회장을 가득 채운 팬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을 알 수 없다면, [현장]의 일체감을 무너뜨리는 것도 불사한다.
케야키자카46에 있어서 라이브는, 아무로 나미에 같은 [재생]의 장소가 아닌 [파괴]의 장이다.
그렇다, 히라테 유리나는 도발하고 있는 듯 했다.
이런 케야키자카46의 일련의 퍼포먼스를 [중2병]이라고 야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일런트 마조리티]를 발매하였을 때, 히라테 유리나는 말 그대로 14살이기도 했다.
라디오의 심야방송이 발상지라고 전해지는 [중2병]이란 단어는,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져서 정착했다.
10대 초반에 있기 쉬운 자기애의 강함이 가져오는 주변 세계에의 반발은, 지금까지라면 [사춘기]라고 표현되었을 것이다.
왜 [사춘기]가 아닌 [중2병]이라고 말하게 되었는가?
거기엔 헤이세이도 끝나려하는 지금의 시대가 비쳐 보이는 느낌이다.
10대 초반 발생하는 자기애의 비대함을 사춘기라고 부르는 사이에는, 누구라도 그것을 일시적인 열병처럼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이를 먹는 동안,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것을 기다리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열병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아이, 여기부터가 어른”
이라고 더욱 단언할 수 없게 되어버린 현재.
그래서 누구라도 어른과 아이의 사이에서 언제까지나 어중간함이 계속 될 수밖에 된 것이다.
[사춘기]는 끝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언제까지라도 처치곤란한 자기애를 시니컬하게 뿌리쳐볼 필요를 우리들은 강요당해 왔다.
그 결과가 [중2병]이라는 자학적인 표현이 되어버린게 아닐까.
그런 시대의 변화에 사람들은 당황하면서도, 나름대로 [어른이 될 수 없는 자신]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의 끝에 확실한 희망이 있는지를 묻는다면, 누구라도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굳이 묻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케야키자카46은 분위기도 읽지 못하고,
[중2병]이라는 꼬리표 따위는 어찌되던 상관없다는 듯이,
절망과 희망이 어떠한지 스트레이트로 질문한다.
그것은 일찍이 쇼와시대에, 어른과 아이들의 사이에서 흔들리던 [사춘기]의 상징이었던 아이돌, 이기 때문에야 말로 할 수 있는 [폭거]일지도 모른다.
시대는 이제 한바퀴 돌아, 새로운 시대로 가려 하고 있다.
- 헤이세이 아이돌수호지 외전 제 6 편. [ex 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