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도 썼지만 심심해서 한 번 적어봤어! 다들 재미로 봐주길 ㅎㅎ
많은 히트곡을 불렀거나 꾸준한 연예활동으로 아주 유명하고
지금까지도 이따금씩 방송에서 네타로 쓰이는 에피소드를 가진 유명한 가수들만 골라서 모아봤어.
덬질로 얻은 소소한 얘깃거리와 예전 홍백에 대한 소소한 얘기를 ㅎㅎ
그리고 쇼와 후기의 밴드나 락 가수는 나도 잘 모르고 출장을 많이한 것은 아니라서 엔카 가수가 많으니 주의!!
지금도 많이 불리고 방송에 나오는 대표곡은 밑줄을 그어놨어.
그리고 몇 장 팔렸는지 100만매, 200만매, 80만매... 등등 있는데 확실하지 않은 것도 많아서 그냥 적지 않았어. 찾아보기도 어렵고 ㅠ
곡은 내가 잘 알고 갖고 있는 곡도 있지만 모르는 곡도 있고 발매연도도 잘 몰라서 위키 참조했어!
1951년(쇼와26년) 홍백가합전 제1회 출장 가수
1. 菅原都々子 스가와라 츠즈코(1927~)
이른바 엘레지의 여왕.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음방에 출연해서 특색 있는 창법을 보여주신 분이야.
음색이 특이하지는 않지만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창법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데
개인적으로는 70세 80세의 연세에도 비교적 목소리를 잘 유지하셔서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해.
다만 연로하시면서는 그 독특한 창법이 좀 더 강해져서 쿠세가 심해졌다고 할까.
무척 순하고 상냥한 성격인데 조용하고 침착한 편이라 옛날부터 토크방송은 자주 출연하지 않았지만 음방엔 자주 출연셔.
노래에 대한 열정이 아직도 식지 않은, 홍백가합전 1회 출연자 중 마지막 생존자이자 내가 아는 일본 예능계의 최고 원로 가수.
쇼텐(세계에서 가장 오래 방송된 예능방송) 사회자로 유명했던 라쿠고가 카츠라 우타마루(1936-2018)의 형제자이자 스승이었던 4대 카츠라 요네마루(1925~)가 원로 예능인으로 대표적인 인물.. 이분도 현역이셔, 일본 연예계에서는 스가와라 츠즈코, 일본 전통예능계에서는 요네마루상.
원래 만담가로 우치무라 등과 같은 사무소였던 마세키 소속인 우츠미 케이코(1922-2020)가 최고령이었는데 작년 돌아가셨어, 콤비게닌인 나이츠가 자주 네타로 삼았었던 분이시지 ㅠㅠ
히트곡↓
月がとっても青いから (1955. 이 곡만 부르는 대회도 존재.....)
連絡船の唄 (1951. 한국에서 장세정이 번안하여 발매, 연락선은 떠난다)
江の島悲歌 (1951. 영화화되어 히트,
일본은 쇼와 초기부터 노래를 주제로 삼아 영화화하거나 영화에 맞춰 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고 가수가 배우를 겸업하는 경우도 아주 많았음.)
2. 菊池章子 키쿠치 아키코(1924-2002)
원래 이분은 비파를 연주하시던 분인데 노래를 잘해서 오디션을 받아 데뷔하셨어
이분도 개성적인 음색과 뚝뚝 잘라내는 듯한 창법이 특징적인데 히트한 대표곡 두 곡의 가사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고 해.
첫 번째 히트곡인 星の流れに는 매춘에 종사하던 여성을 노래한 곡으로 가사가 당시 일본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곡이 발매할 당시 미군정 시기라 미국에 대한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검열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히트한 곡이야.
특히 후렴구가 こんな女に誰がした로 세 번 반복되는데 유흥가 여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었다고 해.
그리고 이때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본 엔카계에서는 특히 여성팬이 큰손으로 수요가 많았는데
키쿠치 아키코나 미소라 히바리 같은 당찬 여장부들이 많은 여성팬을 거느리고 국민적인 인기를 구가하게 됐어.
두 번째 히트곡은 岸壁の母라는 곡.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었는데 바닷가 절벽에 서서 전쟁에 끌려간 아들이 언제 돌아오나 오매불망 그리는 노래야
일본 패전 후에 국민들이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도 극에 달했었고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의 심정이 큰 감동을 일으켜서 순식간에 히트했어.
곡을 커버한 사람들도 많은데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후타바 유리코라는 로쿄쿠시(로쿄쿠는 나니와부시라고 해서, 한국 판소리 영향을 받았다는 일본 전통예능 중 하나야.)가
70년대에 리메이크해서 공전의 히트를 쳤어. 리메이크 중에는 10분이 넘는 긴 곡도 있는데 그 곡의 대사 중에는 대놓고 내 아들을 돌려달라고 소리치는 대목도 있어.
부모가 자식의 생사도 모르는 일이 어떻게 된 일이냐면서 반전운동에도 영향을 줬다고 해.
히트곡↓
星の流れに(1947)
岸壁の母(1954)
3. 東海林太郎 쇼지 타로(1898-1972)
대체 東海林太郎라는 이름이 어떻게 쇼지 타로로 읽히는 건지 이해가 안돼. ㅋㅋㅋㅋ
원래 성악을 하시던 분으로 클래식을 하던 사람인데 가요계로 들어오면서 부르는 노래는 바뀌었지만 성악가처럼 차렷하고 서서 연미복에 안경,
사진 속의 모습 그대로 모든 공연을 해내면서 저 모습이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졌어.
저 모습을 다른 가수들이 똑같이 따라하면서(모노마네)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어.
일본 6-70년대.. 아님 80년대까지도 포함될지 모르겠지만 신인 가수들은 자기 노래를 거의 부르지 못하고─사실상 신인가수들은 히트곡이 없으니까─ 다른 가수들의 히트곡을 먼저 부르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좀 더 유머러스하게 재밌게 하면서 많이 패러디된 분이기도 해.
목석처럼 비브라토도 없이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서서 무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면 쇼지 타로 모노마네구나, 하고 못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
근데 패전 직전인 1940년대에는 군가도 많이 부른 어두운 면도 있어. 쇼와 시기 가수 중에선 사실 군가를 한 번쯤은 다 불러봤다고 해야되고..... 커버한 사람도 많아. 난 아예 그런 제목이면 안들어서 좋고 나쁜진 모르겠지만.
히트곡↓
4. 藤山一郎 후지야마 이치로(1911-1993)
일본에서 미소라 히바리에 필적하는 유일한 남자가수, 국민영예상을 수상했어.
이분도 앞의 쇼지 타로처럼 서양음악을 배워서 음대생 출신의 성악가였는데 지휘자의 이미지가 강해. 홍백가합전에서 매년 지휘자를 맡았었기 때문이야.
홍백이나 다른 음방이 요즘은 녹음된 음원을 재생시켜서 노래를 부르지만
옛날엔 밴드를 대기시키고 라이브로 생연주에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는데 홍백가합전의 밴드 지휘를 도맡아서 했었고
연로한 뒤에도 방송 종료 직전에 다같이 합창하는 호타루노히카리 지휘를 맡으면서 쇼와의 홍백에서는 빠질 수 없는 분이었어.
그리고 앞의 쇼지 타로가 꼿꼿한 차렷 자세로 유명했다면 후지야마 이치로는 갖고 있는 음색도 남성적이고 부드러운,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바리톤에 반드시 정장, 정확한 발음과 정확한 음계를 지키면서 악보대로 노래를 부르는 게 이분의 개성이자 특징이라면 특징이었어.
또 교가나 응원가를 많이 남겼고 이분이 특히 발음을 중시해서 가사의 의미를 잘 전달해줘야 프로 가수라고 할 수 있다라는 지론을 갖고 있어서
그후로도 일본 엔카 가수들은 발음을 많이 신경 썼고, 엔카나 쇼와시대의 노래는 일본어 발음을 잘 해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편이야
야마구치 모모에의 아들인 미우라 유타로도 어머니 곡을 커버하겠다면서, 어머니인 모모에에게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지 조언을 구했더니
발음을 잘 해야한다, 비탁음을 신경 써라. 그렇게 얘기해줬다고 해.
히트곡↓
1952년(쇼와26년) 홍백가합전 제2회 출장 가수
5. 久保幸江 쿠보 유키에(1924-2010)
이분은 게이샤 출신 가수로 처음 전국적인 히트곡을 연달아 불렀어.
이때 일본이 전후 고도성장, 특히 한국전쟁으로 인해... ^^ .... 한국은 정말 힘들고 역사적으로도 비극적인 시기였지만
일본은 반대로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해서 이자나기 경기니, 진무 경기니 하는... 어부지리로 현대 일본의 기초 경제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에 따라서 유흥문화도 발달해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노는 게 일상이 되었어.
쿠보 유키에가 부른 노래는 일본 전통 민요조에 쿵짝쿵짝하는, 박수로 박자만 맞춰줘도 어디서나 부를 수 있고 어렵지 않은 노래라
대중에게 친숙해지면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고 이때 점점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미소라 히바리보다 더한 인기를 얻었어
이분이 히트하기 전부터 일본 게이샤들 중에서 목소리가 좋고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은 가수활동을 했지만 이분이 가장 먼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서
게이샤 출신 가수들이 활동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해줬어. 아카사카 코우메나 카구라자카 항코, 이치마루, 코우타 카츠타로.... 등등등등
히트곡↓
ヤットン節(1952)
トンコ節(1949)
6. 笠置シヅ子 카사기 시즈코(1914-1985)
일본문화 덕질을 하다보면 반드시 들어봤을 노래, 도쿄 부기우기나 캉캉무스메를 부른.. 부기의 여왕.
여배우로도 활동하면서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었는데
미소라 히바리가 이분 노래를 입버릇처럼 불렀었고, 이분의 모노마네를 하면서 데뷔했어.
활기 가득찬 밝디 밝은 노래가 크게 유행했는데
그때의 활짝 웃는 포스터 사진이 지금 보기에는 너무 과하게 웃는 것 같아서 괴기스럽다고도 하는데
일본은 전후에 히로뽕이 사회에 만연해서.... 정말 약빨고 찍은 사진 아니냐고도 해.
그런데 여왕답게 자기 자신의 직업인 가수에 대한 긍지가 높은 분이라 히트곡의 유행이 사그라들고나서
중년으로 접어들어갈 무렵에 춤과 노래로 보는 사람들을 만족시켜줄 수 없으니, 즉각 노래를 그만 부르겠다고
딱 노래를 접어버려서 콧노래도 부르지 않고 다른 예능활동에 전념했다고 해
아마 전후, 현대 일본 가요계에서 깔끔하게 용퇴를 결심한 건 이분이 처음이 아닐까 싶어.
앞에 적진 않았지만 이분과 같은 세대의 가수 중에 나미키 미치코라는 분이 계신데 リンゴの唄라는 노래를 불렀어.
아카이링고니 쿠치비루요세테~ 하는 노래인데 들어보지 않았으려나.
그분은 저 노래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 다른 곡은 잘 히트하지 못했는데 카사기 시즈코도 비슷한 케이스였어.
대신 앞서 후지야마 이치로의 아오이산먀쿠, 나미키 미치코의 링고노우타, 카사기 시즈코의 도쿄 부기우기가
전후 일본을 상징하는 3대 악곡이야.
히트곡↓
7. 越路吹雪 코시지 후부키(1924-1980)
샹송의 여왕.
엔카 가수는 아니고 프랑스 샹송을 번안해서 많이 불렀는데 이분은 출신이 비범해
다카라즈카 극단 남자배역으로 먼저 탑스타가 되었어
다른 동기들(즈키오카 유메지, 오토와 노부코, 얼마 전 돌아가신 오오지 미치오 등)도 가수활동과 배우활동을 겸업했는데 이분이 가장 대성하셨어.
코시지 후부키는 남자배역으로 이름을 알리고 영화출연을 하면서 다카라즈카에서 나왔어.
다카라즈카에서 유일하게 술담배를 즐기는 불량한 일면도 있어서 이걸로도 영 안좋게 유명세를 얻기도 했대.
그런데 사람들 돌봐주길 좋아하고 돈씀씀이도 넉넉해서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고 해.
비록 다카라즈카에서 퇴단했지만, 전후에 극단이 어려워져서 모두 퇴단하는데 동기들과 남아서 극단을 일으켜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존경도 많이 받고 무척 유명해서
지금도 탑여배우인 아마미 유키가 코시지 후부키를 연기한 적이 있었지.
남편 되는 분께선 코시지 후부키 밴드에 속한 피아니스트라서 항상 따라다녔는데 둘이서 부부 사이가 정말 좋았다고 해
DVD나 무대 영상을 보면 노래하다가 피아노에 다가가서 윙크하고 장난치면 웃으면서 받아주는 장면이 있기도 하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였고
여장부 같은 분이셨지만 남편 앞에서는 얌전하고 남편 말이라면 꿈뻑 죽었다고.... ㅎㅎ
아 나카모리 아키나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이 사람 한국에도 팬이 꽤 많아진 것 같은데... ^^
아키나의 어머니가 코시지 후부키의 광팬이라, 아키나도 코시지 후부키 노래를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
산마의 아내였던 오오타케 시노부가 이 사람이 부른 사랑의 찬가를 부르면서 홍백에 출장하기도 했었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가수 중에서는 무척 걸출한 사람이야
다카라즈카답게 드레스를 입고 무대를 거의 뛰어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퍼포먼스도 엄청나서 팬이 많았어.
히트곡↓
1953년(쇼와28년) 홍백가합전 제4회 출장 가수
8. 淡谷のり子 아와야 노리코(1907-1999)
각 부문마다 여왕이 많지 ㅎㅎ 블루스, 샹송, 엔카, 등등..... 그런데 아와야 노리코는 대중에게 음악으로 잘 알려지기보다도
1954년(쇼와29년) 홍백가합전 제5회 출장 가수
10. 美空ひばり 미소라 히바리(1937-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