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23일에 발매된 제4탄 싱글 『1/2의 신화』는, 나카모리 아키나에게 있어 데뷔 이래 최초의 오리콘 싱글 차트 첫등장 1위가 되었다.
그야말로 '쾌진격'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지만, 그 뒤에서 워너 파이오니아(현 워너 뮤직 재팬) 내부에서는 아키나의 「이적문제」가 심각화되어갔다.
"아키나를 위해 설립되었다"고 하는 신 레코드 회사 '허밍 버드'(그 후 '마이클 허밍 버드'로 명칭 변경)으로 이직한 토미오카 노부오(현 모모 앤 그레이프 컴퍼니 대표이사)가 당시를 회상한다.
"이적 이야기는 허밍 버드로 옮기고 얼마 안 있어 (아키나를 담당하고 있던) 디렉터가 갑자기 워너에 남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결국, 우리들 현장의 인간은 배제되고, 임원이나 관리직들만이 아키나의 획득을 목표로 했던 것입니다."
한편, 데뷔 이래 아키나를 담당해 온 토미오카로부터 프로모션을 인계받은, 당시 워너 방악선전과의 타나카 요시아키(현재는 작가 사와사토 유지로서 활동)는 말한다.
"주위의 사원들이 대부분 허밍 버드로 옮겨버려 대혼란이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쨌든 (아키나의 제작선전을 총괄했던) 테라바야시 (아키라) 씨(현 에이벡스 레이블 사업 본부 고문)가 워너에 남았다는 것만이 든든했었네요. 아키나의 이적 이야기가 전혀 매스컴에 흘러나가지 않았던 것은 신기했었고, 불행 중 다행이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아키나의 인기가 파죽지세였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1/2의 신화』만이 주목받고 있었습니다. 마츠다 세이코 씨와 나란히 '포스트 모모에'로 불리게 되어, 매스컴에서는 『1/2의 신화』의 '적당히 좀 해-'라는 구절이 모모에 씨의 '바보 취급 하지 마-'(『플레이백 PARTII』)에 필적하는 것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뭐, 그렇게 말한 시대였으니까요. 아키나의 이적을 기도하여 새로운 레코드 회사를 설립, 게다가 설립은 『1/2의 신화』의 발매일이니까, 지금이라면 와이드 쇼나 주간지가 달려들 큰 뉴스겠죠."
결국은 아키나 모친의 "이적은 시키고 싶지 않다"라는 한마디로 사태는 수습으로 향했지만, "(아키나의) 사무소와의 두터운 파이프에 의지한 설립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타이밍적으로도 새로운 레코드 회사로 옮기는 것에 대한 리스크도 고려했던 것 같습니다. 원래 아키나의 어머니가, 테라바야시 씨를 신뢰했던 것이 가장 컸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지금에 와서 보면 잡지도 않은 너구리의 가죽값을 계산한 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4월 정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사내에서는 허밍버드의 태세가 정비되면 또 이적을 꾀하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뿌리 깊었어요. 다만, 그것이 역으로 '뺏길까 보냐'라는 단결심이 되었다는 느낌도 듭니다." (타나카)
한편, 허밍버드로 이직한 토미오카는 새삼 말한다.
"계약을 무시한 이적은 고려할 수 없었고, 워너에게 있어서도 매상의 주축인 아키나를 간단하게 내놓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 것은, 아키나의 이적이 환상으로 끝나서 다행이었다는 것. 그렇지 않다면, 내가 맡았던 쿠도 유우키의 데뷔도 위험했고, 무엇보다 아사카 유이나 나카무라 아유미의 탄생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워너 내의 집안소동도 있고, 제5탄 싱글 『트와일라이트 -해질녘 편지-』는 보통의 로테이션에서, 꽤 늦은 6월 1일에 발매되었다. (경칭 생략)
연예 저널리스트 와타나베 유지
https://www.zakzak.co.jp/ent/news/201201/enn2012010005-n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