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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남자든 여자든 ‘결혼은 무조건 내 손해’라고 여기는 게 요즘 추세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거의 욕에 가까운 말까지 퍼부으며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대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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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8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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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칼럼임 다들 읽어봤으면 좋겠어서 퍼옴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결혼하겠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돌아온 답변들의 수위가 예상보다 높았다. 여자도 그렇고 남자도 그랬다. 좋은 변화라고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결혼은 무조건 내 손해’라고 여기는 게 요즘 추세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거의 욕에 가까운 말까지 퍼부으며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대할 줄은 몰랐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대화의 질이 왜 이런가 싶어 고개를 들고 표정들을 읽어 보았다. 더 지독하게 응수해주려 했으나 흡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같은 눈빛을 보고 관두었다. 긴 머리의 여자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병원에 오는 우울증 환자들 가운데 기혼자들의 9할은 배우자 때문에 우울하다.” 나는 멀쩡하게 결혼해서 훌쩍 커버린 아이들과 함께 대체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만 같았던 이들이 대체 왜 이런가 싶었고, 특히 벤저민 프랭클린이 자기 이야기 대신 환자들의 사정을 예시로 든 이유가 궁금했지만 캐묻지 않기로 했다. 너무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마음속 깊이 물음표를 남겨두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날의 대화는 두어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다.

살면서 혼자라서 문제였던 적은 딱히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영원히 잊지 못할 스무살의 그 날 이후 늘 그랬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그날 만들어졌다. 서울에서 혼자 대학교에 다니면서 하루 세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너무 고되었다. 방학이 되면 스키를 타러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가정을 책임지지 못한 건 부모의 사정인데 왜 내가 등록금부터 집세며 생활비 모두를 혼자 다 감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술만 마시면 고시원 바닥을 뒹굴면서 애꿎은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도무지 분노를 주체할 방법이 없었다.

자존심을 이기고 술기운을 빌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가 교수로 재직 중인 학교에서 자녀의 등록금이 지원된다는 사실을, 나는 쓸데없이 잘 알고 있었다. 같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지만, 그래도 장남이 아니던가. 덥고 습한 여름밤, 하나로마트 앞이었다.

영겁과 같은 통화 연결음이 지나가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주절주절 사정을 빌고 거기에 더해 반드시 갚겠다며 못 지킬 약속을 산더미처럼 쏟아냈다. 강철 은행의 대출 심사관도 눈물을 흘리며 다 들고 가지도 못할 만큼의 황금을 안겨주었을 최후 진술이 끝났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명료했다. “등록금을 줄 수 없다”고 읽고 ‘네게 돈을 주고 싶지 않다’로 알아먹어야 할 말을 아버지에게 듣고 난 뒤 고시원 방으로 돌아와 기절해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맹세했다. 나는 혼자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나는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고 선배도 없다. 혼자서 해내지 못하면 그냥 끝이다. 우습게 보여도 그냥 끝이다. 내게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없다.

이후로는 별문제 없이 잘 살았다. 어느 이름 모를 학부 선배가 고기를 산다는 소문이 돌면 반드시 찾아가 구석에 앉아 당대의 히트 상품인 대패 삼겹살을 미친 듯이 먹고 “쟤 누구냐”라는 말이 들려오기 전에 자리를 떴다. 고시원 밥통에는 화수분처럼 늘 쌀밥이 솟아나기 마련이니 옆방 아저씨가 내어놓은 짜장면 그릇에 밥을 말아 곧잘 비벼 먹었다. 아저씨도 이름 모를 선배도 잠잠하면 편의점에서 천원에 열개들이 치즈 빵을 사 먹었다. 아르바이트 월급을 떼이면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노동청 임금체불 담당자 대신 지옥 끝까지 추적해 쫓아가 돈을 받아냈다.

써놓고 보니 궁상맞지만, 요는 더 이상 아무것도 창피할 게 없다는 거다. 모든 게 생존의 문제였다. 나는 혼자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몸을 만들자.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4학년 때 취업한 이후로 여태껏 혼자 힘으로 몸을 굴려 밥을 벌어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달콤하며 떳떳한 노릇인지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연애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내가 누군가를 몹시 좋아하면 속수무책으로 믿고 지나치게 의지해버린다는 사실을 힘겹게 깨달았다. 내심 혼자 힘으로 늘 온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연애를 통해 이기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헤어질 때 너무 고되다. 흡사 아버지에게 “등록금을 줄 수 없다”는 말을 24시간 동안 듣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 된다.

그들 탓은 아니었다. 헤어질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엄정하게 돌아보면 대개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언제든지 더 이상 의지할 수 없고 더 이상 믿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매번 잊어버린 내 잘못이었다.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몸을 만드는 데 실패한 거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난 뒤 나는 너무 믿지 않고, 너무 기대하지 않았다. 물론 한두번 다짐을 까먹고 다시 주저앉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별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최소한 겉보기에는 그랬다.

삼십대 후반의 어느 날 나는 연애를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몸을 유지하기 위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연애를 하기 위해 나와 너 사이의 거리를 너무 벌려놓았다. 끊임없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무 믿지 않고, 너무 기대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그럴싸한 말장난이다. 그걸 대체 연애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지난 몇년간의 연애가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완벽한 실패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정한 거리감이라는 게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10보가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반보가 필요하다. 그보다 더하거나 덜하면 둘 사이를 잇고 있는 다리가 붕괴된다. 인간관계란 그 거리감을 셈하는 일이다.

이 거리감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늘 전자기력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인력과 강력, 약력 그리고 전자기력 이렇게 4가지 힘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내 손이 키보드를 그냥 통과하지 않고 누를 수 있는 건 전자기력 때문이다. 전자기력은 ‘나’를 ‘나’라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를테면 고슴도치의 가시 길이나 <에반게리온>의 ‘에이티(AT)필드’처럼 내가 나라는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인 것이다. 너무 외롭다고 해서 아예 걷어버리면 나라는 형태가 허물어진다. 반대로 타인이 너무 두려워 보호막으로 두텁게 에워싸면 속절없이 너무 멀어져 버린다. 요컨대 타인과의 거리라는 것은 바로 나의 보호막과 너의 보호막의 두께를 어림잡아 더하는 일이다.

삶에 있어 큰 사고라고 할 만한 최근의 일을 통과하면서, 나는 나의 가시와 보호막이 터무니없이 길고 두터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길이와 두께는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오랫동안 비대해져 왔다. 그래서는 애초 타인과의 정확한 거리를 셈하는 게 무의미하다. 어떻게 해도 서로의 말이 닿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나의 셈은 틀렸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결혼해야겠다는 말을 듣고 실망한 친구들의 셈도, 나는 조금씩 어긋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은 나와 너의 거리감이라는 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 친구들은 단지 ‘때가 되어서’ 결혼을 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다. 이유와 확신을 가지고 결혼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완벽해 보였던 셈이 이제 와서는 틀어져 버린 것이다.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매번 셈하는 건 고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익숙하고 편한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나면, 고된 셈 따위에는 흥미를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혼자서 살아남기 위한 몸을 만드는 일을 포기한 건 아니다. 아마 남은 평생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다만 애초 왜 그런 맹세를 했는지 질문을 다시 해보았을 뿐이다. 그건 버티기 위해서다.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혼자서 살아남기 위한 몸을 만들어야 했다. 당시의 내 상황에선 맞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버틴다는 것이 혼자서 영영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우리는 모두 동지가 필요하다.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서 배우 브래드 피트는 태양계 경계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절대적인 고독 앞에 혼자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다는 걸 깨닫고 지구로 귀환한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간단한 걸 우주 끝까지 가서야 알 수 있냐며 조소한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데는 늘 큰 비용이 든다. 무려 암에 걸리고서야 그걸 알았냐고. 그러게 말이다.

원문보기: 
http://m.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923053.html#csidx55837d846c08b90adbd25be1bcca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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