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의 작은 핸드백을 들어주는 남자를 두고 설왕설래 하던 것도 옛말. 이제 남자들도 자신의 핸드백을 메는 시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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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백을 멘 남자가 온다
요즘 남자 아이돌의 ‘공항패션’에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작은 핸드백이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과는 별도로, 손바닥 크기의 작은 핸드백을 어깨에 메거나 손에 드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이돌 그룹 엑소의 카이는 핸드백 패션을 자주 선보이는 스타다. 지난 1월에는 구찌 패션쇼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중간 크기 토트백 형태의 ‘러기지 백’을 든 공항패션을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장지갑 형태의 노랑 크로스백을 메고 패션 행사장에 나타났고, 2018년 9월에는 완벽하게 여성용으로 보이는 붉은 숄더백을 들고 공항에 등장해 화제가 됐다.
그룹 빅뱅의 지드래곤 역시 핸드백 패션 하면 떠오르는 스타다. 지난달 17일에는 청바지와 항공 점퍼를 입고 베이지색 핸드백을 어깨에 멘 채 공항에 등장해 주목을 받았다. 해외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의 어깨에는 작은 핸드백이 걸려 있었다. 같은 그룹 멤버인 태양도 올 블랙 패션에 작은 사이즈의 검정 핸드백을 메 지나치게 튀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공항 패션을 선보였다. 이외에도 방탄소년단의 지민, 뷔 등도 핸드백을 애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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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니커즈 다음은 핸드백일까
전통적으로 남성 패션 잡화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품목은 신발이다. 그에 비하면 남성용 잡화 시장에서 백팩을 제외한 다른 가방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품목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롯데백화점 해외잡화 담당 바이어는 “과거보다 가방을 찾는 남성 고객들이 확실히 늘었다”며 “클러치, 패니 팩(Fanny pack·허리에 차는 지퍼 달린 가방), 작은 사이즈 핸드백까지 다양한 형태의 남성 가방에 관심이 높다”고 했다.
온라인 럭셔리 편집숍 미스터 포터에 따르면 한국 시장의 남성용 가방 카테고리 성장률은 2019년 기준 전년 대비 62%를 기록했다. 전 세계 성장률 31% 수준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손으로 드는 형태의 토트백이 가장 인기가 많지만 벨트 백, 메신저 백(어깨에 메는 숄더백)도 판매 상위 순위권에 올랐다.
다가오는 봄의 유행 흐름을 미리 알 수 있는 ‘2020 봄·여름 남성 컬렉션’에서도 핸드백을 멘 남자들이 무대 위로 쏟아져 나왔다. 어깨에 메서 몸에 밀착되는 형태의 ‘크로스 바디백’이 대세. 디올의 남자 모델들은 단정한 슈트나 재킷 등의 정장 차림에 아담한 크기의 크로스 바디백을 멨다. 지방시 역시 슈트 차림에 크로스 바디백을 사용한 남자 모델을 등장시켰다.
루이 비통의 모델들은 도시락처럼 네모반듯한 핸드백을 짧게 멘 역동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다. 지갑보다 더 작은 크기의 가방을 착용한 모델들도 눈에 띄었다. 디자이너 브랜드 자크뮈스의 미소년들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한 작은 가방을 목과 어깨에 둘렀다. 발렌티노 쇼에선 지갑만 한 작은 가방을 멘 모델들이 줄줄이 걸어 나왔다. 이런 형태를 두고 남자(Man)와 지갑(Purse)을 합한 ‘머스(Murse·남성용 손지갑)라고 부른다.
프라다 역시 여행지나 일상에서 편히 활용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브리크 백’을 내놨다. 제품 상단에 손잡이와 긴 어깨끈이 함께 있는 제품이다. 펜디는 브랜드의 대표 상품인 ‘바게트 백’ 남성용을 내놨다. 펜디 관계자는 “남성 신제품 중에서 가방이 중요 아이템으로 부각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디올은 여행용 가방 브랜드 리모와와 손잡고 알루미늄 소재의 남성용 클러치백(끈 없이 손에 드는 작은 가방)을 선보였다. 별도의 가죽 끈을 이용하면 어깨에 멜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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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핸드백 패션은 최근 소비문화의 화두인 ‘젠더리스(genderless)’ 영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남성용·여성용의 경계와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 것으로, 패션 용어로는 앤드로지너스 룩(Androgynous Look)이 있다.
2020 봄·여름 남성 컬렉션의 주요 브랜드들의 패션쇼도 이런 흐름을 반영해 남성다움을 많이 덜어낸 모습이었다. 디올은 온통 핑크로 무대를 물들였고, 자크뮈스 쇼에선 분홍색 카펫 위로 소년같은 모델들이 걸어 나왔다.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가 이끈 루이 비통 쇼에선 꽃이 주요 모티브로 등장했다. 꽃무늬 옷은 물론, 꽃목걸이를 건 모델이 등장하고 가방에도 꽃이 한아름 담겼다.
보테가 베네타의 ‘카세트 백’은 여성용으로 출시됐지만 최근에는 남자들도 탐내는 제품이 됐다. 방탄소년단의 멤버 뷔가 청재킷에 이 카세트 백을 매치해 주목받은 덕이다. 반대로 프라다의 브리크 백은 남성용으로 출시됐지만 여성들이 많이 찾는다. 프라다 관계자는 “최근에는 남성용·여성용 가방을 따로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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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을수록 멋스럽다
미니 사이즈를 넘어, 마이크로(micro) 미니 사이즈라는 말이 나올 만큼 초소형 가방이 인기인 점도 남자가 핸드백을 들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이한욱 스타일리스트는 “요즘에는 옷을 오버사이즈로 크게 입기 때문에 가방까지 큰 가방을 들면 전체적으로 너무 무거워 보인다”며 “옷이 클수록 가방은 작게 포인트를 주는 게 세련돼 보인다”고 설명했다.
끈이 길어 어깨에 멜 수 있는 작은 가방이나, 페니 팩처럼 허리에 두르는 가방은 두 손이 자유로울 수 있어 실용적이라는 장점도 있다. MCM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책임자 디르크 쇤베르거는 남자들의 핸드백 패션을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젠더리스’와 양 손에 자유를 주는 ‘핸즈프리(hands-free)’의 결합, 즉 실용적인 패션을 선호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으로 분석했다. 쇤베르거는 “늘 핸드폰을 손에 들고 다니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게 양손이 자유로운 디자인은 필수”라고 말했다.
유지연기자yoo.jiyo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