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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현 베트남 공화국이 베트남전 당시 이야기를 안하려는 이유 - `60년대의 탈레반이었던 북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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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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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워진 조작 관련글 과

그 글을 반박한 `베트남女 강간살해 뒤 한국군 미소? 日 우익이 사진조작했다 https://theqoo.net/2168580696  `이 글의 관련글임. 


1. 국제법 위반. 

-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면책특권을 가진 대한민국의 외교관을 5년간 불법적으로 감금,.고문.사상전향 시도함. 심지어  적대국인 북한으로 송환하려 노력함.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한적 없음. (이대용 전 주월 공사 본인이 가해자를 개인적으로 용서하신 사례는 있음.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119464#home

"이대용 전 공사는 1975년 4월 30일 월남(베트남)이 패망할 때 주월남 한국대사관 경제공사였다. 당시 철수본부장을 맡아 한 명의 교민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끝까지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에 남았다가 서병호 영사 등과 함께 월맹군에게 붙잡혔다.

이후 5년간 포로수용소에서 고초를 당했다. 작은 독방에서 10개월 동안 햇빛 한 번 못 보고 지내면서 체중이 78㎏에서 42㎏으로 줄었다. 특히 북한 공작 요원이 월북을 회유했으나 끝까지 버텼다. 그 가운데서도 몰래 쪽지를 한국에 보내 소식을 알렸다. 정부의 외교적 노력 끝에 이 전 공사는 80년 4월 12일 석방돼 귀국할 수 있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816025001


"월남이 사실상 패망한 1975년 4월30일. 이 주월 경제공사는 운명처럼 대사관 직원과 교민을 본국으로 안전 귀환시키는 철수 본부장직을 맡게 됐다. 김영관 당시 주베트남 대사 등 대부분의 공관원과 교민들이 이미 사이공을 떠난 뒤였다.

사이공 공항까지 북베트남군의 포격을 받는 위기일발 상황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안전하게 귀국시키려 안간힘을 쓰다 베트남 정보공작특별경찰조직인 안녕내정국에 체포됐다.

그는 “생각해 보니 그들은 아프간에서 무고한 외국인들을 납치·감금하는 탈레반과 다름 없었다.”고 회상했다. 치화 형무소에 수감된 그에게 외교관의 치외법권을 규정한 빈협정은 한낱 휴지조각이었다.1평도 안되는 독방에서 10개월 동안 햇빛 한번 못 보고 지낼 때도 있었다.

체중이 78㎏에서 42㎏으로 줄어들 정도로 참기 어려운 고통에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이 전 공사는 “아프간 한인 인질들이 기습적으로 납치되는 바람에 충격이 클 것”이라면서 “국가가 구출할 것이라고 믿고 침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건 목숨을 담보로 끊임없이 강요하는 사상전향 요구였다. 그는 공산 베트남 측의 ‘가이따우’(인간개조) 공작에 꿋꿋이 버텼다.‘극한 상황에서 강요에 의한 거짓 전향은 무죄’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중략)

이 전 공사와 서병호·안희완 두 영사가 억류되자 본국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와 외교 공관망을 총동원해 석방교섭을 펴도록 독려했다. 하지만 베트남과 외교관계가 단절된 데다 냉전하의 남북관계가 큰 걸림돌이 됐다. 북한 김일성 주석이 베트남 통일후 ‘남조선 해방´을 부르짖고 있는 가운데 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휘하는 노동당 제3호 청사가 북송 공작에 뛰어든 것이다.

●석방 교섭, 그때와 지금

78년 인도 뉴델리에서 남북한과 베트남간 비밀 3자회담이 열렸지만,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다. 북한이 이 전 공사 등의 북송을 최대치 목표로, 여의치 않으면 남한내 수감 간첩과의 교환을 추진하려 한 까닭이었다. 이 전 공사는 “탈레반이 피랍자와 탈레반 죄수들을 맞교환하려는 것과 너무 유사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 북측은 “중남미 테러세력들도 자국내 미 외교관들을 인질로 잡고 수감중인 도시게릴라들과 맞교환을 요구한다.”고 억지 사례를 들었다.“국제법의 보호를 받는 외교관과 간첩을 바꾸는 건 어불성설”이란 남측 주장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금언과 함께 석방의 전기는 왔다. 베트남이 미제 및 소련제 무기 등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위협을 느낀 중국이 견제에 나서면서다. 중국과 입장을 같이한 북한도 베트남에 캄보디아 철수를 요구하며 틈이 벌어졌다.

이때 한국정부는 거상 아이젠버그를 활용해 석방교섭을 성공시켰다. 그는 베트남의 외자유치를 도우며 커미션을 챙기던 유대계 미국인이었다.

물론 이는 이 공사가 생지옥 같은 긴 수감생활을 견뎠기에 가능했다. 그 이면에는 끊임없이 비밀 루트를 개척해 억류 외교관들과 접촉선을 유지하려 한 한국정부의 노력도 주효했다. 부패한 베트남 관리들을 구워삶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

1-2. 전시국제법 위반 




"【사이공=이방훈 특파원】한국군을 가장한 「베트콩」출현빈도가 잦아 주월한국군은 긴장하고 있다. 지난 13일 맹호부대에서 한국군 복장을한 「베트콩」1명을 생포한바 있는데 (김수동 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중부월남 「빈딘」성내에서 출몰한 한국군가장 「베트콩」수가 6회에 걸쳐 54명에 달하고있다.

출몰지역은 「빈딘」성「안녕」군. 「퀴논」시에서 서북쪽 30km떨어진 곳으로 월남군 22사단이 주둔하고 있다. 바로 맹호부대 책임전술지역(TAOR)과 인접해 있다. 월남군 22사단주력은 「캄보디아」작전에 참가하고 있어 이지역의「베트콩」침범도가 요즘 부쩍 늘고있다.

빈딘성서 6회에 걸쳐 54명이나|맹호부대「마크」달고 곳곳에 나타나 만행저질러 한-월 이간 획책하는 듯
19일 하오l시 「빈딘」성 「안녕」군 월남경찰이 한국군 맹호부대 「마크」를 붙인 수상한자가 월남군인 한명과 「혼다·오토바이」를 타고 이발을 한다음 하오4시 지방민병대원에게 M-16 실탄을 요구했으며 하오7시에는 한적한 곳에서 휴식하고 있는것을 목격했다고 신고했다.

21일하오 6시30분쯤 다시 이지역에서 월남 제13민병대 소대장이 「카키」복 반바지와 남방 「샤쓰」에 맹호부대 「마크」를 붙인 적 5명이 AK소총을 메고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며 같은날 하오 한국군 복장을한 「베트콩」30명이 15명씩 분산 은거하고 있는 사실을 「안녕」군 민간인이 목격했다고 한다.

22일 아침6시 60명의「베트콩」1개중대와 이 지역 제28민병대가 교전했는데 이중 15명이 맹호부대「마크」를 달고 1명이 십자성부대 「마크」를 달고있었다고 지역면장이 확인, 월남군 당국에 보고했다.

이러한 사실과 독수리 70∼1호작전중 맹호부대가 이지역에서 노획한 적의 한국말 녹음「테이프」, 전단인쇄기와 많은 전단내용을 검토해 볼때「베트콩」은 전술을 바꾸어 전면도전을 피하고 주민들에게 만행을 저지르고 그혐의를 한국군에 뒤집어 씌워 한월리간을 획책하고 있다는 징조가 뚜렷하다고 군정보기관은 분석하고 있다.

[출처: 중앙일보] 한국군위장 베트콩 출현"



2. 베트남 전 당시 무고한 민간인 학살 1위. 북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가장 많이 자행한 국가

1위  - 북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 = 당시 명칭 월맹.  현 베트남 정부  : 13만1천명~30만명 

2위  - 남베트남 = 당시 명칭 월남.  : 5만7천명~ 28만4천명. 

3위  - 미군   : 4000~1만명

4위 -  한국군  : 3000명.  




"이러한 현재적 상황에 대한 다층적인 접근과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 보다 먼저 베트남전쟁에 관한 지배적 시각과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으로 부터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베트남전쟁사를 해석하는 외부자적 관점에 치우치거나 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외세의 역할’을 전쟁사의 중심 혹은 인과론적 관점에서 절대화하는 베트남의 공식사 (official historiography) 적 관점으로부터도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정치사적 관점에서는 정치적 인과관계에만 집중해, 아시아의 냉전 경험을 냉전체제의 두 중심축인 미국과 구소련 혹은 중국의 ‘대리전 (proxy war) ’의 성격으로 파악하는 설명방식이 있다. 그러나 외인 ( 外因 ) 을 중심으로 전쟁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은 일면적일 뿐만 아니라, 냉전체제 자체를 구조적으로 일반 화하는 서구 중심적 시각에 가깝다.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에 대한 구소련과 중국, 북한 등의 지원 그리고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 호주, 한국 등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국제전의 성격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기간 동안, “누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가?”라는 상대적 가해와 피해의 윤리에 기초한 질문을 던졌을 때, 내전의 구체적 양상을 무시하는 것이 매우 협소한 관점이라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정치학자 루돌프 럼멜 (Rummel 1998) 은 제노사이드 (genocide) 와 정치살인 (politicide) 그리고 학살 (mass murder or massacre) 등을 포괄하는 학살 개념으로 ‘데모사이드 (democide) ’13) 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이 개념  에 따라 베트남전 희생자에 대한 통계적 추산작업을 진행하였다. 그에 따 르면 전쟁 기간 중 베트남에서 미군에 의한 데모사이드는 약 4,000명에 서 10,000명 정도이고, 한국군에 의한 경우는 약 3,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반면, 북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은 최소 약 131,000명에서 최대 302,000명, 남베트남은 57,000명에서 최대 284,000명에게 데모사이드 를 자행했다. 이 추산치는 군사작전과 전투 중에 사망한 군인, 시민군 및 민간인 수를 제외한 것이다. 비록 이러한 추산의 정확성 문제, 그리고 죽 음을 숫자화해 비교하는 통계학적 폭력성의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지만, 럼멜의 추산과 통계치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베트남의 분단 이후 전쟁 이 지속된 1954년에서 1975년까지의 기간 동안 북과 남으로 나뉜 베트남인들 상호간에 정치권력의 이해관계와 이념적 지향에 기반한 적대를 통해 거대한 규모의 인명살상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외국 군대를 배제하더라도 상호간 직접적인 정치적 폭력을 오랜 시간 지속적 이며 광범위하게 사용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만들어낸 부정적 생산과 그 유산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심주형, 「정처 없는 애도, 끝나지 않은 전쟁: 1968년 베트남 “후에 학살”을 중심으로」 중. 



저기서 언급되는 후에 학살



"후에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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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대학살(順化大虐殺, 베트남어: Thảm sát Tết Mậu Thân ở Huế)은 구정 대공세를 통해 후에의 점령과 함락, 후퇴 과정에서 베트콩과 베트남 인민군에 의해 자행된 즉결 처형과 대량 학살에 주어진 이름이다. 베트남 전쟁 중 가장 길고, 피를 많이 본 전투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후에 전투는 1968년 1월 31일에 시작하여, 총 26일 동안 지속 되었다. 뒤이어 몇 달 동안, 후에와 그 주변에서 수십 개의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성인 남녀 어린이와 유아가 포함되어 있었다.[1] 추정 사망자 2,800명에서 6,000명 사이였고, 민간인과 포로를 포함하여, 후에 전체 인구의 5 ~ 10%에 달하는 인원이었다.[2][3] or 5–10% of the total population of Huế.[4] 베트남 공화국은 살해되거나 납치되어 희생자 중 식별된 희생자 4,062명의 피해자의 목록을 발표했다.[5] 희생자는 구속되고, 고문당하고, 때때로 매장된 채 발견되었다. 맞아 죽은 많은 희생자들도 있었다.[6][7][8]

많은 미국과 남베트남 당국자와 그 사건을 조사한 많은 언론인들이 다른 증거자료와 함께 발굴을 했으며, 4주간의 점령 중 후에와 주변에서 대규모의 잔학 행위가 수행되었다는 증거로 삼았다. 그 살해 행위는 이 지역의 미군에게 친숙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전체 사회 계층을 대규모로 숙청하는 과정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이후 남베트남 ‘보복 분대’도 공산주의자 점령을 지원했었던 시민을 찾아내고, 처형을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9][10] 2017년에, 벤 키어넌(Ben Kiernan)은 후에 대학살은 ‘베트남 전쟁의 가장 잔악한 행위’였을 것이라고 후에 대학살을 설명했다.[11]"




2-2 

질문자 "그 당시 어린아이에게도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 사령부 사령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전쟁터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들입니다. 월남전은 6· 25처럼 밀고 밀리는 全面戰(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이요, 게릴라전이었습니다. 전선이 따로 없었고 피아 구분이 안되어 군인들은 눈뜬 장님 같은 처지일 때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사령관인 나도 두 번이나 테러를 당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나에게 폭발물을 숨기고 접근한 여자는 열 두세살 정도 되는 아이였습니다. 사령관도 그 지경인데 장병들에게는 어떤 상황일지 짐작해 보시오.

월남 사람들은 1년에 농사를 3모작 합니다. 그중 3분의 1은 정부 세금, 3분의 1은 월맹군과 베트콩 식량으로, 나머지는 자기들 먹을 식량으로 나눕니다.
어린아이 호주머니 속에서 안전핀이 덜렁거리는 수류탄이 나오질 않나, 부녀자 치마 속에 권총과 소총이 숨겨져 있질 않나… 심지어 그들은 낮에는 월남 정부공무원이고, 밤이면 베트콩이나 첩자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한 가족이 월남 정부 공무원, 베트콩 첩자, 월맹군 첩자, 민병대 등으로 뒤섞여 살고 있는 집도 있었지요.

하느님도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운 전쟁이었어요.

옆의 戰友(전우)가 여학생으로 위장한 저격병에게 쓰러지면 그쪽으로 총을 쏘지 않겠습니까? 귀엽게 생긴 일곱살짜리 꼬마가 장난기 어린 동작을 취하면서 달려와 수류탄을 떨구고 도망갑니다.

피하지 못한 전우戰友가 쓰러지면 그 쪽으로 총을 쏘지 않겠습니까? 이런 반사적인 보복행위가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은 어느 전쟁에서나 다 있고 월남전은 가장 심한 곳이었어요.

그렇다고 우리 軍이 양민을 무차별 학살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질문자 "민간인, 특히 아녀자가 전투행위를 했을 경우 이들을 향해 발포하면「양민 학살」 로 볼 수 있습니까? -


채명신 『제네바 협약 제1추가 의정서 37조1항은 「배신행위의 금지」란 내용입니다. 배신행 위란 「戰時에 군인이 민간인이나 非전투원의 지위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트콩이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하고 한국군에 공격을 가하면 엄연한 전쟁법 위반행위입니다. 이땐 당연히 보복의 권리가 따릅니다.

비록 아녀자라 할지라도 수류탄을 숨기고 접근해 공격행위를 하면 아녀자 이전에 敵軍(적군)이 되는 셈입니다. 그들이 양민이란건 말도 안되죠』


채명신  "『월맹이 통일한 지금, 현지인들이 월맹군에게 당했다고 할 것 같습니까? 한국이 만만하게 보이니까 우리더러 학살했다고 하는거죠.
게다가 당시에도 피아구분이 힘들었는데  지금와서 진상조사를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할 줄 알고서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과 방송들은 월남전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양민학살은 일체 거론하지 않고 「한국군」이 양민학살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그게 9000여명 이라고 했지요?

1968년 2월 「후에」 전투에서 월맹군은 공무원, 군인, 경찰, 교사, 종교인, 외국인등 그야말로 「진짜 양민」 5800여 명을 단 한번에 처형했어요. 우린 그런 아수라장을 막으러 간 겁니다』"


채명신 "65년부터 4년간의 월남 파병 사령관직에 있을 때에는 바나나를 파는 10살 안팎 여자 아이들의 수류탄 투척과 내 숙소에 대한 로켓포 및 기관총 집중 사격,내 승용차에 대한 저격과 수류탄 투척 등 베트콩의 허다한 습격과 테러 공격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보호해주셨습니다'

3. 후에 대학살과 관련된 자료 

미국에 망명한 남베트남인의 저술중.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mystery&no=8880&s_no=14341165&kind=total&page=1


"후에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주로 월맹군 800과 802대대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힘차고 기동력 있게 후에로 입성했다. 첫날 공격 새벽에 월맹군은 도시 전체를 장악했다. 예외가 있다면 남베트남군 1사단의 본부가 있던 곳과, 미군 고문관들이 있던 건물들뿐이다. 베트남군과 미군은 병력을 증강하여 두 개의 중요한 거점에 도달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다른 월맹군 대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804대대였다. 그들은 미군과 베트남군의 증강군을 차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차단에 실패했고 두 개의 거점에 미군과 베트남군은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전투는 점차 포위공격전으로 변했고, 월맹군은 오래된 성채들과 도시 서쪽의 끝으로 몰렸다. 미군과 베트남군은 세 방향에서 월맹군을 압박했다. 포격과 공중폭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월맹군이 숨은 성채들은 견고한 건축물들이었고 월맹 지휘부는 그곳을 ‘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월맹군들은 가옥과 가옥을, 블록과 블록을 이어가면서 후퇴하고 있었다. 전투는 점차 느려지고 값비싸졌다.


성채는 지하에 공간이 잘 구축되어 있었고, 미군 해병대와 베트남군은 1미터씩, 1미터씩 전진하는 판이었다. 1968년 2월 24일 아침, 남베트남 1사단 병사들이 외벽에 24일간 걸려 있던 월맹깃발을 뽑아버렸다. 월맹군은 전투에서 졌다. 도시에서는 산발적인 소규모 전투만이 이어졌고 점차 도시 외곽으로 후퇴했다. 2,500명의 월맹군이 전사했고, 또한 다른 2,500 명 정도가 나중에 후에를 떠나 미군에게 추적당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 미군은 총 357명이 전사했다.

 

이 혼돈의 전투 속에서, 남베트남 정부의 민간인에 대한 첫 번째 조치는 ‘긴급 구원’이라는 것이었다. 음식, 유행병의 예방, 긴급 의무 지원 등등. 그렇게 민간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후에에서 민간인 희생자의 통계를 조사했다.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민간인은 1,900명으로 조사되었으나, 비공개적으로는 5,800 명 정도를 추산했다.


공산주의자에 의한 첫 번째 학살 희생자들은 지아 호이 고등학교 마당에서 2월 26일 170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다음 몇 달 동은 18개의 단체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탕 쾅 투 파고다 근처에서 67구가 발견되었고, 바이 다우 77구, 초 통 지역에서 약 100구, 황실묘지에서 201구, 티엔 함에서 약 200구, 동 지에서 약 100구, 총 해서 약 1,200 명의 사체가 바삐 암매장된 채로 발견되었다.


이들 사체 중 반수는 매우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손이 등 쪽으로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사체들은 상처 없이 비틀려 있었다. 생매장된 것이다. 생매장 되면서 분대 규모의 군인들이 사격을 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체에 총 600개의 총구멍이 발견되었다.


두 번째 피해그룹들이 1969년 첫 7개월 동안 여러 군데서 다시 발견되었다. 남지나해 부근의 모래 둔덕에서는 매장도 되지 않은 800구 정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둔덕에 땅을 사망자들이 파게 한 뒤에 10-20명 씩 한 줄로 세운 뒤에 기관단총으로 살해되었다. (나중에 이곳에서 나온 러시아제 기관총의 탄피가 인기 있는 기념품으로 팔렸다) 3-4명 씩 죽여서 불태워 신분을 알 수 없는 사체도 많았다.


남 호아(Nam Hoa) 지역에서 세 번째 학살 증거가 나타났다. 다 마이 강안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푸 캄 죽음의 행진’이라는 명칭으로 불렸고 1969년 9월에 발견되었다. 3명의 공산주의자 망명자들은 미 101공수사단 여단 정보장교에게 다 마이 강가에서 수 백 명의 민간인을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다 마이 강변은 후에에서 남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그들은 그 학살이 1968년 2월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지역은 매우 거칠고 사람이 살지 않는 사실상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곳이다. 이 증언에 따라서 101사단의 여단이 그곳을 수색했고, 많은 사람들의 뼈가 발견되었다.


이 파편 같은 정보의 조각들은 다 마이 강가의 학살의 의미를 조합하게 해 주었다. 1968년 테트 공세의 15일째, 후에의 일부인 푸 캄 소도시에는 로마 카톨릭교를 믿는 4만 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를 피하고자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카톨릭 신자들이 오히려 아니었다. 공산당 정치위원이 이 성당에 도착했고, 400 명 정도의 민간인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 정치위원은 ‘해방지구’로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3일간의 재교육을 시킨 뒤에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약 15킬로미터 정도를 걸어서 공산주의자들의 본부가 있는 후에의 파고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때 20 명 정도의 사람이 이름이 불려서 그룹에서 이탈했다. 그들은 파고다가 있는 안뜰에 집합되었고 모두 월맹군에게 살해되고 불태워진 뒤에 암매장되었다.


이들이 처형되고 나서 나머지 민간인들은 강을 따라서 계속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역 베트콩부대에 인계되었다. 그 당시 그들을 인계한 정치위원은 아마도 재교육을 시킨 뒤에 민간인들을 돌려보낼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계가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들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많은 인원으로 인해서 며칠간 일대는 많은 도망친 민간인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이때 지역 베트콩들은 증거를 없애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결국 민간인들은 강변의 6킬로미터에 걸쳐 총에 맞거나 도륙된 뒤에 흐르는 물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들은 일대에 끌려온 사람들을 찾는 대로 모두 학살했다.


101사단의 여단은 그곳으로 향하면서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었고 강변에 도착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강변의 수풀은 엄청나게 두터웠다. 나무와 풀들이 두개의 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나무들의 가지는 높이 뻗어 있었다. 그 아래쪽은 거의 대낮에서 어둠에 가까웠다.

 

여단 공병은 길을 내기 위하여 그 두터운 수풀에 다이너마이트로 뚫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그리고 헬기의 랜딩존도 만들어야 했다. 사체들이 발견되면 헬기로 운구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매장 없이도 사체를 감추기에 매우 쉬운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수백 미터의 협곡이 있었고, 그 안에 수많은 해골들과 인간의 뼈들이 나왔다. 그들은 그냥 지상에 버려져 있었다. (동양인들은 사람이 매장되지 않고 지상에 방치될 경우 영원히 지상에 외롭게 남는다고 생각한다) 이후 20개월이 지나자 시체들은 점차 햐얗게 뼈로 변해갔다. 


다 마이 강가에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총 428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혁명의 반역자’라고 규정했다. 이들 428 명 중에 군인은 25% 정도였고 두 명의 장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하사관과 사병이었다. 다른 25%는 학생들이었고, 나머지 50%는 마을사람, 마을 서기, 고용인,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관청 공무원 등이었다.


네 번째 학살의 증거들이 다시 나타났다. 푸 투 지역의 소금밭에서 1969년 12월 발견된 것이다. 이는 루옹 비엔이라는 어촌 지역으로, 후에에서 동쪽 1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이 또한 매우 황폐한 지역이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1968년 연초부터 이 지역의 베트콩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강한 노력을 들였던 지역이다.

 

이 루옹 비엔의 인구는 약 700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 지역은 지역 베트콩의 보복이 20개월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이 거의 다 청소되자 주민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학살당한 사람은 적어도 300명, 그리고 최대 1천명으로 추산되었다. 사람들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다. 후에의 공무원들이 조사를 벌였으나 정확하지가 않았다. 그들은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실종중인 상태로 조사를 끝냈다.


후에 전투 후에, 남베트남 정부는 민간이 부상자만 7,600 명을 추산했고, 이들 중 1,900명은 전투행위 중간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전투행위 중간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5,700명으로 추산했고, 첫 번째 밝혀진  민간인 학살 사체의 수는 4,756구였다. 두 번째 발견된 학살에서 모래 둔덕 학살을 합하여 3,583구, 세 번째 밝혀진 학살에서는 다 마이 강변을 포함 2,774구, 네 번째 밝혀진 학살에서는 총 2,356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룹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민간인 사망자가 2천 구 정도 더 발견되었다."





이처럼. 한국측이 지속적으로 진상 규명에 협조하고, 책임질건 책임지고 사과하겠다고 해도, 베트남측이 응하지 않는 이유가 이거임.



죽은 사람이 진짜 양민인지. 양민이 맞다고 하더라도 죽인 사람이 한국 군인인지 아무도 알수 없고. 현 베트남 측 군인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음.


진보측이 약팔던거랑 다르게, 당시 북베트남이나 남측의 베트콩(현 베트남 정부의 전신)이 전쟁하는 수준은 탈레반이나 IS 나 할 짓 좀 많이 했음.


미성년자들에게 수류탄 쥐어주고 테러하라고 하고. 자기들에게 협조적이지 않다고 민간인들 대량 학살해서 겁줬음. 이건 전쟁범죄 아님? 


피해자 있는데? 민간인 대량학살은 모두 한국인 책임인데? 외인정앟해? 라고 수백플을 달리는게 몇년째 반복되고 있음. 

 

한겨레가 이런 맥락 제외하고 사기치려다가, 씨알도 안먹힌 적이 있음.


베트남전에서 한국군 전투원에게 죽은 무고한 양민이 있을 지는 모르겠는데. 그걸 밝히는건 법적으로 불가능함.


애초에 사실관계 자체를 밝히는게 현 상황에서 불가능함.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공정한 재판의 전제 조건이 보장되지 않는데. 그걸 왜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해?


베트남 정부측이 `한국군이 저질렀다는 학살에 대한 모든 자료 제공과 조사를 보장`하고, 국제 조사단의 참관 하에 가능하게 해준다면


재판 당연히 하고. 밝힐거 밝히고, 사과할 거 해야지. 한국은 당연히 해야함. 


... 근데 위에 읽어보면 그게 되겠냐고. 


이런 상황모르면서 `우리나라가 사과안하면 위안부 부정하는 일본이랑 같애 웅애웅~`하는 애들은 진짜 순진해보임."


선동에 놀아나지좀 말자. 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하고 있고. 


합리적인 조건이 갖춰지면 할거임. 그 조건을 요구하는데 관심이 없으면 그냥 국까나 머릿속이 꽃밭인 자기 만족주의자지.. 




추가 : 다른 덬들의 의견 


"베트남 정부랑 우리나라 정부랑 애초에 입장도 다르고 상황도 다름 일본의 '국가'정책 하에 이뤄진 전쟁범죄에 우리나라 '정부'가 항의하는 상황에 대해서, 파병된 한국'군'도 베트남전에서 학살하고 강간했으니 일본한테 사과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애들이 많으니까 이런 글도 올라오는 거지 한국군이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하는 게 아님"


"한국 정부에게 사과 바라는 베트남 << 이거 일본 넷우익이 퍼뜨리는 거임 한국도 베트남전쟁 때 민간인 학살하고 피해 보상 안 하는 나라니까 선량한 피해 국가는 아니다 라는 식으로 몰아서 한국 이미지 저하랑 위안부 문제 거론 못 하게 막으려고 하는 거...나중에 위안부 문제나 쪽발이 군대의 민간인 학살 이야기 하면 이 이야기 하면서 한국도 월남전에서 웅앵웅 했잖아 하고 도찐개찐이라고 물고 늘어지려고 밑작업 하는 거임...우리는 대통령이 사과 의사 표시한 적 있는데 베트남이 승전국은 자기들이었다면서 안 받았음 사실 제일 많이 민간인 학살한 게 베트남 공산군이어서 민간인 피해 자체를 언급 안 하고 싶어해서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뭔가 할 수 없는 상태라서 사정이 달라"


":베트남전은 내전에 공산주의 민주주의 진영까지 참전한 한국전쟁하고 비슷한 거야 우리는 반으로 갈라졌지만 베트남은 공산주의 진영이 승리해서 통일된 거 전쟁 끝나고 잘잘못 일일이 따지면 당연히 내분이 있을 수 밖에 없잖아 특히 베트남전은 베트콩하고 민간인이 뒤섞여서 구별하기도 힘들 정도로 게릴라전이 심했던 게 팩트라 베트콩으로 오인당해 죽은 민간인이 엄청 많았어 근데 진상규명해보니 현정부 세력이 무고한 내 가족 내 마을 사람들 학살한 거 밝혀지면 누가 좋아하겠냐고 무엇보다 한국은 미국 우방으로 참가한 국가일 뿐인데 미국이 뭘 안하는 이상 우리가 더 나서는 것도 한계가 있지 그러니 묻어둘 수 밖에"



추가) 일본 만화 <대사 각하의 요리사>중 주 베트남 일본 대사관의 요리사가 겪는 에피소드중. 


`한국의 베트남 양민학살`을 밝히려는 일본의 기자 관련 에피소드.


 첫번째 짤이 일본인 기자. 

 두,세번쨰 짤에서 일본인 기자와 이야기하는 일본인 외교관. 

 네번쨰짤은 일본인 기자가 `정의롭게 질책`하는 한국인 외교관. 


TouGR.jpghqXEX.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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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일본 만화에서 이럴정도면,  왜 일본애들이 사진 날조까지 해가면서 집요하게 저러는지 대충 이해가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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