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이슈 내 사랑은 계산이 빠르고 겁이 많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애가 좋았지만 그애의 불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었다. 가난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게.
22,303 417
2019.06.16 20:23
22,303 417
그 애.txt 







그 애. 

우리는 개천쪽으로 문이 난 납작한 집들이 게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는 동네에서 자랐다. 그 동네에선 누구나 그렇듯 그애와 나도 가난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번번히 월급이 밀리는 시원찮은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그애의 아버지는 한쪽 안구에 개눈을 박아넣고 지하철에서 구걸을 했다. 내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산처럼 쌓아놓은 개구리인형에 눈을 밖았다. 그애의 어머니는 청계천 골목에서 커피도 팔고 박카스도 팔고 이따금 곱창집 뒷방에서 몸도 팔았다. 우리집은 네 가족이 방두 개짜리 전세금에 쩔쩔맸고, 그애는 화장실 옆에 천막을 치고 아궁이를 걸어 간이부엌을 만든 하코방에서 살았다. 나는 어린이날 탕수육을 못 먹고 짜장면만 먹는다고 울었고, 그애는 엄마가 외박하는 밤이면 아버지의 허리띠를 피해서 맨발로 포도를 다다다닥 달렸다. 말하자면 그렇다. 우리집은 가난했고, 그애는 불행했다. 

가난한 동네는 국민학교도 작았다. 우리는 4학년때 처음 한 반이 되었다. 우연히 그애 집을 지나가다가 길가로 훤히 드러나는 아궁이에다 라면을 끓이는 그애를 보았다. 그애가 입은 늘어난 러닝셔츠엔 김치국물이 묻어있었고 얼굴엔 김치국물 같은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었다. 눈싸움인지 서로를 노려보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니네부엌 뽑기만들기에 최고다. 나는 집에서 국자와 설탕을 훔쳐왔고, 국자바닥을 까맣게 태우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사정이 좀 풀려서 우리집은 서울 반대편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친척이 소개시켜준 회사에 나갔다. 월급은 밀리지 않았고 어머니는 부업을 그만두었다. 나는 가끔 그애에게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에는 일년동안 쓴 딱딱한 커버의 일기장을 그애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애는 얇은 공책을 하나 보냈다. 일기는 몇 장 되지 않았다. 3월4일 개학했다. 선생님한테 맞았다. 6월1일 딸기를 먹었다. 9월3일 누나가 아파서 아버지가 화냈다. 11월4일 생일이다. 그애는 딸기를 먹으면 일기를 썼다. 딸기를 먹는 것이 일기를 쓸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애 아버지는 그애 누나가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나는 그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그애는 이따금 캄캄한 밤이면 아무 연립주택이나 문 열린 옥상에 올라가 스티로플에 키우는 고추며 토마토를 따버린다고 편지를 썼다. 이제 담배를 배웠다고 했다. 나는 새로 들어간 미술부며 롯데리아에서 처음 한 미팅 따위에 대해 썼다. 한번 보자, 만날 얘기했지만 한번도 서로 전화는 하지 않았다. 어느날 그애의 편지가 그쳤고, 나는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고3 생일에 전화가 왔다. 우리는 피맛골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생일선물이라며 신라면 한 박스를 어깨에 메고 온 그애는 왼쪽다리를 절뚝거렸다. 오토바이사고라고 했다. 라면은 구멍가게 앞에 쌓인 것을 그냥 들고 날랐다고 했다. 강변역 앞에서 삐끼한다고 했다. 놀러오면 서비스 기차게 해줄께. 얼큰하게 취해서 그애가 말했다. 아냐. 오지마. 우울한 일이 있으면 나는 그애가 준 신라면을 하나씩 끓여먹었다. 파도 계란도 안 넣고. 뻘겋게 취한 그애의 얼굴 같은 라면국물을. 

나는 미대를 졸업했고 회사원이 되었다. 어느날 그애가 미니홈피로 찾아왔다. 공익으로 지하철에서 자살한 사람의 갈린 살점을 대야에 쓸어담으면서 2년을 보냈다고 했다. 강원도 어디의 도살장에서 소를 잡으면서 또 2년을 보냈다고 했다. 하루에 몇백마리의 소머리에 징을 내려치면서, 하루종일 탁주와 핏물에 젖어서. 어느날 은행에 갔더니 모두 날 피하더라고. 옷은 갈아입었어도 피냄새가 배인거지. 그날 밤 작업장에 앉아있는데 소머리들이 모두 내 얼굴로 보이데.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애는 술집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나직하게, 나는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는 걸까. 

그애가 다단계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만나지마. 국민학교때 친구 하나가 전화를 해주었다. 그애 연락을 받고, 나는 옥장판이나 정수기라면 하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취직하고 집에 내놓은 것도 없으니 이참에 생색도 내고. 그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면 가끔 만나서 술을 마셨다. 추운 겨울엔 오뎅탕에 정종. 마음이 따뜻해졌다. 

부천의 어느 물류창고에 직장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등학교때 정신을 놓아버린 그애의 누나는 나이차이 많이 나는 홀아비에게 재취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애가 둘인데 다 착한가봐. 손찌검도 안하는 거 같고. 월급은 적어. 그래도 월급나오면 감자탕 사줄께. 

그애는 물류창고에서 트럭에 치여 죽었다. 27살이었다. 



그애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였다. 한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이따금 나는 우리가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손도 잡은 적 없지만 그애의 작고 마른 몸을 안고 매일 잠이 드는 상상도 했다. 언젠가. 난 왜 이렇게 나쁜 패만 뒤집을까. 그 말 뒤에 그애는 조용히 그러니까 난 소중한 건 아주 귀하게 여길꺼야. 나한텐 그런 게 별로 없으니까. 말했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계산이 빠르고 겁이 많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애가 좋았지만 그애의 불행이 두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 수도 있었다. 가난하더라도 불행하지는 않게. 
목록 스크랩 (287)
댓글 417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영화이벤트] 세상의 주인이 바뀌었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예매권 증정 이벤트 289 04.24 19,718
공지 ▀▄▀▄▀【필독】 비밀번호 변경 권장 공지 ▀▄▀▄▀ 04.09 543,188
공지 공지접기 기능 개선안내 [📢4월 1일 부로 공지 접힘 기능의 공지 읽음 여부 저장방식이 변경되어서 새로 읽어줘야 접힙니다.📢] 23.11.01 2,995,174
공지 비밀번호 초기화 관련 안내 23.06.25 3,799,938
공지 ◤더쿠 이용 규칙◢ 20.04.29 20,288,924
공지 성별관련 공지 (언급금지단어 필수!! 확인) 16.05.21 21,279,989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43 21.08.23 3,408,518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17 20.09.29 2,238,375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341 20.05.17 2,962,859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53 20.04.30 3,520,126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글쓰기 권한 포인트 상향 조정) 1236 18.08.31 7,891,212
모든 공지 확인하기()
2391560 기사/뉴스 [단독]위너즈 사기코인 의혹 일자… 유명배우, 경영진에 “발 빼라” 조언 08:05 376
2391559 이슈 전소연의 Super Lady 평가 08:05 126
2391558 이슈 [KBO] 4월 25일 각팀 선발투수 & 중계방송사 & 중계진 & 날씨 4 08:02 212
2391557 정보 네이버페이12원 14 08:01 668
2391556 이슈 [여고추리반3] D-1👀 모두가 레벨업한 세계관 미리보기 | 캐릭터 스포일러 | TVING 3 08:00 195
2391555 이슈 33년 전 오늘 발매♬ 마키하라 노리유키 'ANSWER/北風' 07:52 34
2391554 이슈 안무 박수소리 다 들어가던 2세대 아이돌들 라이브 2 07:51 671
2391553 이슈 이번 세븐틴 티저에서 소름돋는다는 반응 많은 부분 1 07:51 932
2391552 이슈 새벽에 뜬 티저짤 한장으로 시작된 세븐틴 원우 캐해상플 9 07:42 1,178
2391551 기사/뉴스 또 급발진 의심 사고‥11개월 손녀와 '공포의 질주' 24 07:40 2,386
2391550 이슈 한국말중 정반대의 해석이 섞여있어서 어려운 단어 16 07:30 3,773
2391549 이슈 24명 컨셉 포토 공개된 걸그룹 트리플에스.jpg 9 07:25 1,216
2391548 이슈 유럽에 출장왔는데 직장후배가 비둘기만 보면 난리쳐 215 07:23 17,967
2391547 이슈 [MLB] 마이크 트라웃 시즌 10호 홈런 1 07:10 453
2391546 정보 신한플러스/플레이 정답 10 07:05 663
2391545 유머 😺어서오세요 오전에만 운영하는 치즈냥 식당입니다~ 3 06:34 675
2391544 이슈 동생 후이바오한테 치대는 루이바오 17 06:23 6,419
2391543 이슈 23년 전 오늘 발매♬ 카와무라 류이치 'Ne' 1 06:22 405
2391542 유머 🐱어서오세요 오전에도 운영하는 바둑냥 식당입니다~ 3 06:15 738
2391541 유머 🐱어서오세요 오전에도 운영하는 고등어 식당 입니다~ 4 05:58 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