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고 있고, 내가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삶을 취미로 한 지 오래되었다.
/오래된 취미, 이현호
자꾸만 서리는 입김에
창을 열었더니
네가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창, 육춘기
변명 따윈 안 하겠소
쓰러져도 결국 나 자신에게 쓰러지고 만 거요
/학교에 갑시다, 정철훈
나는 계속 완벽한 실패에 대해 실패하였네
/시, 허민
나의 불행은 누가 꿈꾸던 미래였을까
/궤적사진, 이현호
나는 거지였다.
코를 박고 납작 엎드려 사랑을 구걸했다.
딱딱한 애정 한조각
어쩌다 흘린 미소 한 푼에 감지덕지했다.
나는 개였다.
걷어 차이고 돌을 맞으면서도
요요요 불러주기만 기다렸다.
부러져라 꼬리를 흔들며
피멍든 주둥이로 네 손을 핥았다.
/어떤 조사, 강무순
착각은 곧잘 나를 함부로 해.
물가에 푹 담가놓기도
겨울바람에 꽁꽁 얼리기도
착각은 슬금 달짝지근하다가
결론은 늘 죽을 맛이야.
/혹시나 하는 기대의 결말, 나선미
물어보자. 너 내가 아주 싫진 않았지?
그런데 그 사람이 조금 더 좋았던 것뿐이지?
/불의 검, 김혜린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장미꽃 나무 너무 다정할 때 그러하듯이
저녁 일몰 유독 다정할 때
유독 그러하듯이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다정이 나를, 김경미
잠시 머물렀다 가는
간이역이 돼도 좋다
그대, 부디 한 번만 정차하여라
/조우, 이훤
무얼 나눠 먹으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비참하지 않을까
/피에타, 정영
오래전에 던진 공이 있다
당신이 다시 던져줄 거라 믿었던
/오지 않는 공, 정영
사람은 많은데
그 사람은 없다
/터미널에서 낚시질, 길상호
너는 비가 좋다고 말했어, 하지만 우산을 폈지. 너는 햇빛을 사랑한다 말했어, 하지만 그늘을 찾았어. 너는 바람을 사랑한다고 말했어, 하지만 창문을 닫았어. 이게 내가 두려운 이유야. 넌 나도 사랑한다고 했잖아.
/작자미상
너의 슬픔을 가져오지 못한 게 아주 오래 아프다.
/천호동_장마 7, 허연
우린 단지 죽지 않으려고
사랑했던 거란다
/마리골드, 박시하
너는 끊임없이 그 핑계를 찾고 있어. 내가 볼 때 너는 정신적 불구야.
완벽하게 자기를 이해해줄 사람을 찾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어.
/퀴즈쇼, 김영하
나는 늘 잘 잃어버리는 것들을 사랑하곤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찾는 일은 없었다.
/유실물, 서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