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정보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이동진 칼럼)
32,568 693
2019.02.03 02:19
32,568 693

oTHvz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 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주어집니다. 그건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 설명에 따르면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포기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요.

구약 성서에서 롯의 아내도 그랬습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 받을 때 이를 간신히 피해 떠나가다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까요. 금기를 깨고 뒤돌아보았다가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전세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탐욕스런 어느 부자의 집이 물로 심판 받을 때 뒤돌아본 그의 며느리가 바위가 되고 마는 충남 연기의 장자못 전설을 비롯해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여러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니까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입니다.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신들의 나라에서 돼지가 된 부모를 구출해 돌아가던 소녀 치히로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동안 결코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거지요.

그런데 왜 허다한 이야기들에 이런 ‘돌아보지 말 것’에 대한 금기가 원형(原型)처럼 반복되는 걸까요. 그건 혹시 삶에서 지난했던 한 단계의 마무리는 결국 그 단계를 되짚어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르페우스처럼, 그리움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지나온 단계를 되돌아볼 때 그 단계의 찌꺼기는 도돌이표처럼 지루하게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금 기둥과 며느리 바위는 그 찌꺼기들이 퇴적해 남긴 과거의 퇴층 같은 게 아닐까요.

류시화 시인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시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나였다/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고 했지요. 정해종 시인도 ‘엑스트라’에서 “그냥 지나가야 한다/말 걸지 말고/뒤돌아보지 말고/모든 필연을/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고 했구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치히로가 그 힘든 모험을 마치고 빠져 나오는 통로가 다리가 아닌 터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엔 다리와 터널이 있겠지요. 다리는 텅 빈 공간에 ‘놓는’ 것이라면, 터널은 (이미 흙이나 암반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을 ‘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가 ‘더하기의 통로’라면 터널은 ‘빼기의 통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삶의 단계들을 지날 때 중요한 것은 얻어낸 것들을 어떻게 한껏 지고 나가느냐가 아니라, 삭제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훌훌 털어내느냐,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초입을 터널로 지나면서 치히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욕망과 집착을 조금 덜어내는 법을 배웠겠지요.

박흥식 감독의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사랑이 잘 풀리지 않을 무렵, 윤주는 봉수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고 되뇌지만 결국 뒤를 돌아 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쓸쓸히 확인한 것은 봉수의 부재(不在)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정말로 뒤돌아보고 싶다면 터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돌아서서 보세요. 치히로가 마침내 부모와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표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뒤돌아본 이후가 아니었던가요.



목록 스크랩 (585)
댓글 693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영화이벤트] 디즈니+ <애콜라이트> 팬시사 & 미니GV with 이정재 67 00:09 3,092
공지 공지접기 기능 개선안내 [📢4월 1일 부로 공지 접힘 기능의 공지 읽음 여부 저장방식이 변경되어서 새로 읽어줘야 접힙니다.📢] 23.11.01 3,949,882
공지 비밀번호 초기화 관련 안내 23.06.25 4,684,373
공지 ◤더쿠 이용 규칙◢ 20.04.29 21,081,314
공지 성별관련 공지 (언급금지단어 필수!! 확인) 16.05.21 22,266,293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46 21.08.23 3,704,633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18 20.09.29 2,562,411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368 20.05.17 3,261,940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59 20.04.30 3,844,480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스퀘어 저격판 사용 무통보 차단 주의) 1236 18.08.31 8,224,421
모든 공지 확인하기()
2420009 유머 태국 마사지 받다가 잠든 아이돌 멤버ㅋㅋㅋㅋㅋㅋㅋㅋㅋ 04:00 305
2420008 유머 대중교통 옆자리에서는 절대 만나고 싶지않은 야구선수 3 03:52 645
2420007 이슈 도서관에서 책 반납하고 나오는데 어떤 어린이가 자기 곧 당근거래하는데 멀리서 지켜보다가 자기가 위험해진 거 같으면 가족인척 도와달라구 함.twt 9 03:48 1,001
2420006 이슈 술집 새우칩 과자 신기한 점 9 03:40 1,453
2420005 이슈 정은지가 짧게 불러준 뮤지컬 시카고 + 레베카 넘버..twt 6 03:39 288
2420004 이슈 지금은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휴대폰 기능.jpg 18 03:31 2,571
2420003 유머 @: 한 아이가 운전하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2 03:30 571
2420002 이슈 한강놀러갈때 흰옷입지말아야하는 이유.ytb (부제 - 동양하루살이 근황)🫠🫠🫠🫠) 6 03:30 874
2420001 유머 남사친한테 고백했는데 차인 이유 9 03:24 1,580
2420000 이슈 자동차로 전국을 돌며 강아지 목욕시키는 걸로 돈 버는 사장님.youtube 4 03:24 694
2419999 이슈 강바오가 중국 사육사에게 부탁했던 것.jpg 9 03:22 1,679
2419998 팁/유용/추천 아직도 드라마 여주의 찐사하면 제법 갈리는 드라마.jpg 21 03:20 1,685
2419997 이슈 펜타닐의 성지라고 불렸던 병원 원장 인터뷰.jpg 9 03:18 1,965
2419996 이슈 셀레나 고메즈, 조 샐다나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6 03:16 1,036
2419995 이슈 강아지가 무지개 다리를 건넌 후 일상생활하다 울음 터지는 이유.jpg 21 03:16 1,765
2419994 이슈 50만명 거주하는 중국 아파트 단지 18 03:13 2,215
2419993 정보 일상 속 일본식 표현.jpg 11 03:12 1,538
2419992 유머 트위터 인용 남긴 풀무원 공계...jpg 9 03:09 2,054
2419991 이슈 쾌녀스웩 지대로인 백종원뺨치는 알바생 3 03:09 721
2419990 이슈 안지영이 커버한 테일러 스위프트 Cruel Summer 03:06 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