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하긴, 사랑 자체가 홀로 버텨내야 할 생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요 (이동진 칼럼 中)
9,126 74
2018.09.18 19:21
9,126 74

255BC441586A50B71E10A7




우리가 도망쳐 온 것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관하여)


 이동진 / 영화평론가


중세 독일의 전설에 이런 게 있지요. 

독일 바덴 지방의 어느 젊은 백작이 덴마크를 여행하다가 아름다운 성의 정원에서 놀고 있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합니다. 

그는 그 성에 머물며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살아가던 오라뮨데 백작 부인과 깊은 사랑을 나눕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을 때 그는 “네 개의 눈이 있는 한 당신을 바덴으로 데려갈 수 없다오. 

네 개의 눈이 사라지면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네 개의 눈이란 자신의 부모를 뜻하는 말이었지요.

 

집으로 돌아간 그는 수개월 뒤 반대할 줄 알았던 부모로부터 의외로 쉽게 허락을 받자 기쁨에 들떠 덴마크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이 아이들을 살해한 뒤 죄의식에 몸져 누운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백작 부인은 ‘네 개의 눈’이 새로운 사랑에 방해가 되는 아이들인 걸로 오해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거지요. 

자초지종을 알게 된 독일 백작은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그 처참한 사랑으로부터 말입니다.

 


26593741586A50B6227FE9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대학생 츠네오가 다리를 쓰지 못해 집에만 틀어박힌 조제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 조제와 사랑을 나누다가 서로 다른 처지 때문에 헤어지게 된 츠네오는 조제의 할머니가 죽자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 함께 삽니다.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에게 소개시키기 위해 조제와 자동차를 타고 떠난 츠네오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갈 수 없게 됐다고 전화를 합니다. 

전화를 받던 동생은 “형, 지쳤어?”라고 되묻지요.

 

그 여행 후 결국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집니다. 

영화 속 이별의 순간은 의외로 너무나 깔끔합니다. 

조제는 담담히 떠나보내고, 츠네오는 별다른 위로의 말 없이 그냥 일상적인 출근이라도 하는 듯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섭니다.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옛 여자친구는 그를 만나자마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합니다. 

묵묵히 들으며 함께 걷던 츠네오는 갑자기 무릎을 꺾고 길가의 가드 레일을 잡은 채 통곡합니다. 

그 순간 츠네오의 독백이 낮게 깔립니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가지 댈 수 있지만, 사실은 단 하나 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결국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우리가 도망쳐 떠나온 모든 것에 바치는 영화입니다. 

한 때는 삶을 바쳐 지켜내리라 결심했지만 결국은 허겁지겁 달아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처참한 결말을 논외로 두고 사랑 자체의 강렬함만으로 따지면 오라뮨데 백작 부인 만큼 온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없겠지요.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조제만큼 절박하게 사랑이 필요한 경우도 드물 거고요. 

공포 때문일 수도 있고 권태나 이기심 탓일 수도 있겠지요. 

동생이 되물었듯, 츠네오는 그저 지쳤던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떠나갑니다.

 

 

모든 이별의 이유는 사실 핑계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긴, 사랑 자체가 홀로 버텨내야 할 생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사랑에만 해당되는 문제일까요. 

도망쳐야 했던 것은 어느 시절 웅대한 포부로 품었던

이상일 수도 있고, 

세월이 부과하는 책임일 수도 있으며, 

격렬하게 타올랐던 감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국 번번이 도주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냅니다. 

그리고 항해는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깨끗하게 묶은 조제의 뒷모습처럼, 


결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진 않기를.

 

2713F9345482B96903EA82







+)


최애칼럼.. 너무 좋아ㅠㅠ

목록 스크랩 (55)
댓글 74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뉴트로지나 X 더쿠] 건조로 인한 가려움엔 <인텐스 리페어 시카 에멀젼> 체험 이벤트 300 09.10 15,038
공지 ▀▄▀▄▀【필독】 비밀번호 변경 권장 공지 ▀▄▀▄▀ 04.09 2,512,193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6,180,035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핫게 중계 공지 주의] 20.04.29 24,001,679
공지 ◤성별 관련 공지◢ [언금단어 사용 시 📢무📢통📢보📢차📢단📢] 16.05.21 25,279,112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51 21.08.23 4,630,967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30 20.09.29 3,604,332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37 20.05.17 4,159,467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76 20.04.30 4,691,177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18번 특정 모 커뮤니티 출처 자극적인 주작(어그로)글 무통보 삭제] 1236 18.08.31 9,318,479
모든 공지 확인하기()
2497351 유머 오늘 축구 끝나고 나온 쿠플 엔딩곡 03:06 1
2497350 이슈 히딩크가 평가한 2002년 국대 멤버 3 03:01 188
2497349 이슈 현재 유튜브 인동 1위 영상 1 02:56 883
2497348 유머 나 방금 편돌이한테 농락당한 것 같음..jpg 9 02:40 1,201
2497347 이슈 역대 아이즈원 타이틀곡 중 최애 곡은? 19 02:40 222
2497346 이슈 오혁 콘서트 내내 열마디도 안함...근데 옆남자무리가 오늘은 말 꽤 하네~ 이래서 ??? 상태로 첫콘 후기 찾아보니까 총 네마디했대 제발.twt 2 02:35 1,084
2497345 유머 미성년자한테 사과한 편돌이 14 02:29 1,638
2497344 이슈 U20 월드컵 가서 열심히 덕질하고 있는 여자u20 월드컵 대표팀 부주장 배예빈.jpg 5 02:24 581
2497343 유머 모르는 돌멩이😶 vs 할부지😆🐼 9 02:22 968
2497342 기사/뉴스 역대급 세수 결손에도…부자감세 '유산취득세' 드라이브 02:18 288
2497341 유머 한국의 편돌이로 환생한 히틀러.jpg 10 02:16 2,450
2497340 이슈 대부분 지역이 열대야인 실시간 전국 날씨.jpg 17 02:14 1,274
2497339 이슈 [축구] 남자축구 여자축구 분위기 모두 안좋은 아시아축구연맹 가입 국가.jpg 8 02:12 1,162
2497338 유머 나는솔로에서 귀한 장면 5 02:11 1,590
2497337 기사/뉴스 쯔양 협박해 2억 뜯은 여성 2명, 구속 영장 기각… “증거 이미 확보” 3 02:06 1,001
2497336 이슈 고래밥 먹는 아가한테 고래허락 받았냐고 물어봄 37 02:05 2,604
2497335 유머 자기의 반려견을 자랑하시는 가게 사장님들 14 01:58 2,094
2497334 정보 일본인들이 봉지라면 보다 컵라면을 좋아하는 이유 36 01:54 3,610
2497333 유머 가오가 뇌를 지배하는 상황.gif 6 01:53 1,901
2497332 유머 극단적이고 광기가 어린 다이어트 식단.gif 34 01:52 3,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