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m.blog.naver.com/pere_zoso/221311402838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에서,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과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6월 5일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대와 합체한 상태로 휴대폰을 손에 쥐고 손가락만 열심히 움직이며 꼼지락거리기를 십여분.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바르셀로나'를 검색했다가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같은 날 새벽에 올린 걸로 추정되는 영상이 하나 있었다. '드디어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며 베시시 웃는 영상 속 남자는 토니안, '우리 승호오빠'였다.
바르셀로나에 온 뒤로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해본 적 없다. 딱 한 번, '미친듯이' 한국에 가고 싶어 끙끙거린 시기가 있는데, 바로 '무한도전 토토가3' 때문에 들썩이던 지난 2월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소년, 안승호가 보고 싶어서.
내 학창시절은 H.O.T.가 전부다. 어느 정도냐면, 연도를 보면 내가 몇학년이었는지가 먼저 생각나는 게 아니라 "1998년이면 H.O.T. 3집 때니까 내가 몇학년이었겠네!"라는 순서로 기억이 떠오른다. 구구절절 세세한 사연들을 굳이 나열할 필요도 없이, 그냥 말 그대로 내 학창시절은 H.O.T. 그 중에서도 토니안, 승호오빠가 통째로 다 가져가버렸다.
대학에 가고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리저리 삶에 치이며 나는 점점 승호오빠와 멀어졌다. 여느 대중과 다를 바 없이 연예 뉴스를 통해 간간히 소식을 접했다. 사업수완이 좋구나, 군대에 갔구나, 우울증으로 많이 힘들었구나, 예전엔 라이벌이었던 김재덕과 같이 사는구나, 오래 전에 사진으로만 뵀던 어머니가 이제 함께 티비 프로그램에 출연하시는구나...그러다 '무한도전 토토가3' 덕분에 정말이지 오랜만에 학창시절의 그 수많은 기억들을 되짚어 본 지도 어느덧 3개월이 지난 후였다.
바르셀로나가 아무리 좁다고 해도 마주칠 수 있을까 싶었다. 맘 먹으면 왠지 숙소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개인적인 여행인데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집 하수구에 문제가 생겼다. 아랫집 남자와 만나고, 집주인 아저씨와 연락하고, 배관공을 부르고, 걱정에 발동동하며 하루이틀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가끔 올라오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승호오빠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그 좋아하는 라면을 1도 안챙겨왔고, 유럽여행은 처음이라 바르셀로나에 편의점이 없다는 걸 뒤늦게 알고 좌절했고, 라면이 아닌 느끼한 유럽식 조식으로 해장을 해 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었다.
6월 7일이 됐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날짜, 승호오빠의 생일이다. 오후 2시에 배관공이 오기로 해서 오전에 할 일들을 다 마치고 1시 반 즈음 거실에 앉아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는데, 오빠가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생일이라고 팬들 생각해서 방송을 하는 구나! 반가운 마음에 얼른 들어갔다.
고딕지구에서 이리저리 길을 헤매면서 오빠는 계속 '가우디 성당에 가야한다'고 했다. 아니,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훨씬 멀리있는데 왜 고딕지구에서 가우디 성당을 찾는거지? 갸우뚱하며 지켜봤는데 알고보니 대성당을 찾는 중이었다. 좁고 복잡한 고딕지구에서 쉬이 길을 잃는 여느 여행객들처럼, 승호오빠는 피성당 근처에서 한참을 배회하다가, 결국 팬들의 조언대로 구글맵을 켜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흥미롭게 방송을 보다가 문득 머리가 핑, 했다. "앗! 우리오빠 라면으로 해장해야 하는데!!"
집에서 대성당은 구글맵 기준 도보 9분, 뛰면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배관공 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두어시간 전에 아저씨가 조금 일찍 도착할 것 같다고 연락까지 해왔던 터라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손에 잡히는 아무 종이백에 집에 있던 너구리 컵라면 두개를 주워담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거울 볼 시간도 없었다. 문도 제대로 안잠궜던 것 같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마음만은 [클래식]의 손예진이었지만 다급함에 우사인볼트 저리가라할 속도로 람블라스 거리를 가로지르고 고딕지구 골목을 내달렸다. 그동안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사람을 볼때마다 소매치기이거나, 소매치기에게 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슬쩍 가방을 여미곤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미친듯이 질주하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성당 앞에 도착했더니 마켓이 열려있어서 평소보다 더 복잡했다. 맘이 급해 눈에 아무것도 안들어왔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되뇌이며 천천히 주변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곧 카탈루냐 건축가협회 건물 피카소 그림 아래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작은 머리에 쫑긋한 귀, 우리 승호오빠였다.
"오빠!"하고 부르며 다가가 얼른 라면이 든 종이백을 내밀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동안 횡설수설 아무말 대잔치를 했던 것 같다. 오빠 라면 드리러 왔어요, 해장을 못하신 거 같길래요, 제가 이 근처에 사는데요, 이것밖에 없어서요, 생일 진짜 축하드려요, 아이고 이렇게 비가 와서...
승호오빠는 정말 라면이 그리웠던건지 "아니 이 귀한걸..."하면서 살짝 안아주고 같이 사진도 찍어주셨다. 사실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는데(지금 생각해보니 다 TMI여서 안하길 백번 잘했다), 배관공 올 시간이 다 돼서 "오빠 여행 잘하세요!"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시 집으로 뛰어갔다. 얼떨떨하고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행히 배관공 아저씨보다 먼저 집에 도착했고, 아저씨가 일을 하시는 동안 틈틈이 인스타그램을 살폈다. 오빠는 그 날 두 번의 라이브 방송을 더 했다. 라면 고맙다는 인사도 방송을 통해 한 번 더 했고, 그 라면으로 먹방까지 했다.
나중에 보니 내가 젓가락을 안챙기는 바람에, 젓가락 찾아 삼만리 우여곡절 끝에 라면먹방에 성공했다. 고작 라면 두개 선물하고 이런 인증을 받다니, 너무 벅차서 그날밤 잠도 제대로 못잤다.
중학생 때, 진심으로 '죽고싶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라디오에서 승호오빠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내 사연을 읽어줘서 나는 그 지옥같은 시기를 견뎠다. 어처구니 없지만 정말이다. 최근에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일들이 많아 괴로웠는데, 승호오빠가 또 이렇게 불쑥 나타나 내게 힘을 줬다. 한국도 아닌, 여기 멀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말이다.
피카소 그림 아래, 오빠의 동글동글한 뒷모습을 발견했던 그 순간을 나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항상 건강하고 늘 행복하길. 내 첫사랑, 내 인생 유일한 아이돌, 안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