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을 베고 힘껏 잠들어야지
당신이 떠난 봄날에 죽은듯이 누워서 사랑한다는 문장이나 핥아야지
-이용한, 묘생-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나태주, 내가 너를-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나의 여름이 모든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도 좋습니다
내가 세상의 꽃들과 들풀, 숲의 색을 모두 훔쳐올테니 전부 그대의 것 하십시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서덕준, 도둑이 든 여름-
먹지는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바라만 보며 향기만 맡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그런 첫사랑이 내게도 있었지
-서안나, 모과-
당신은 해질 무렵 붉은 석양에 걸려 있는 그리움입니다. 빛과 모양을 그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름입니다.
-파블로 네루다,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봄볕 푸르거니 겨우내 엎드렸던 볏짚 풀어놓고 언 잠 자던 지붕 밑 손 따숩게 들춰보아라.
거기 꽃 소식 벌써 듣는데 아직 설레는 가슴 남았거든 이 바람을 끝으로 옷섶 한 켠 열어두는 것 잊지 않으마.
내 살아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빛나는 너.
-고두현 남으로 띄우는 편지 중-
그러고 보니 나는 어느덧 덜그덕거리는 철물점이 돼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 가게가 크기를 늘려왔던 것은 아니다.
그저 흘러들어온 것들과 때로 애써 모은 것들, 더러는 쓴웃음으로 떠안아야 했던 것들이 누런 고철들이 되어서 빈곳을 남기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잘못 벽에서 튕겨져 나온 굵은 못처럼 그때 네가 내 심장으로 날아 들어온 것은 어쩌면 우연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너를 쫓는 숙명의 쇠망치까지 불러들였다.
-이선영, 사랑, 그것 중-
우정이라 하기에는 너무 오래고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해인, 사랑 중-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중-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모란이 피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