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북미의 흑인 여자 노예들은 목화 뿌리를 씹었다. 카리브해의 노예들은 약초를 씹었다. 민간 피임법이었다.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흑인 노예의 재생산에 관심이 없었다. 노예가 부족해지면 서아프리카에서 끌고 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19세기 초 노예 무역이 금지되면서 농장주들이 흑인 노예의 감소에 대해 각별히 주위를 기울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성인 노예보다 아이 노예가 두 배의 가치가 있다고 공공연히 떠들 정도였다.
농장주 입장에서 노예의 피임은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곧이어 '영아 살해'가 등장하자 농장자들이 공포에 휩싸인 채 노예들을 부랴부랴 단속했다. 비참한 영양과 위생 때문에 영아가 죽어간 것을 영아 살해로 오인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산모와 흑인 산파가 영아를 살해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요컨대, 처절한 재생산 저항이었다. 출산 파업이었다. 자식에게 고통스러운 노예의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목화 뿌리를 질겅질겅 씹었던 것이다. 농장주는 인구 감소를 걱정했지만, 노예들은 삶의 추락에 절망했다. 삶이 절망일 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삶의 재생산 중단이었다.
최근 하루가 멀다하고 정부와 언론이 인구 감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고 해괴한 저출생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그때마다 목화 뿌리를 씹던 여자 노예들의 마음을 떠올리곤 한다. 그 허다한 대책들 어디에도 사람과 우리의 삶을 걱정하는 소리가 없다. 노예 노동력 감소에 당황하던 농장주들의 비명만이 존재한다.
케겔 강화 댄스로 괄약근을 조이고, 정관 수술비를 지원하며, 여학생 조기 입학을 권장하는 괴이한 인구 대책들을 보고 있자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여 인간으로 변신시키는 게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되겠다. 급기야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초등생들에게 야간자율학습을 시키고 부부들의 성생활을 독려하자는 윤석열 정부의 강구책은 B급 코미디의 정점을 찍는다.
시민들은 '사람'을 낳고 싶지만, 지배 권력과 자본은 '인구'를 낳기를 바란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못 받으니 아이를 안 낳는 것이다. 아무리 그럴 듯한 말과 갖은 공포의 언어로 치장해보았자 단순히 사람을 인구로 수단화하고, 그저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 납세 의무자, 소비자로만 대상화하면 시민들은 출산 파업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고단한 삶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데 한쪽에선 아동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대 아동 수출국이다. 한쪽에선 아이를 낳으라 극성을 피우는데, 다른 한쪽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하루에 35명꼴,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다. 통렬한 위선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