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9일, CBS 창사 69주년 기념 뮤지컬 갈라 콘서트 'The Show'를 관람했다. 길지도 짧지 않은 10여 년 무대 관람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참사의 날이었다.
공연 내용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대에 올라온 배우들은 모두 훌륭했다. 정선아 배우는 'Never Enough(영화 <위대한 쇼맨>)'와 'Memory(뮤지컬 <캣츠>)'에서 폭발했고, 카이의 '지금 이 순간(This is the moment: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과 'Stars(뮤지컬 <레미제라블>)'는 배우의 '클래스'를 상기시켰다. 유리아의 '데스노트(뮤지컬 <데스노트>)'와 '중력을 넘어서(Defying Gravity: 뮤지컬 <위키드>)'는 차기 뮤지컬 디바 퀸의 위엄을 보여줬고, 임정모의 '거인을 데려와(뮤지컬 <시라노>)'는 듣는 이를 울컥하게 했다.
문제는 관객들의 관람 태도였다. 옆자리에 앉은 10대 남학생은 공연 내내 휴대전화로 웹툰을 보거나,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온몸을 뒤척였다. 앞자리에 앉은 중년 남성은 여성 배우 무대 때마다 허리를 한껏 수그려서 무대를 가려버렸다. 그 옆의 여성은 수시로 휴대전화로 무언가를 검색했다. 뒷자리에 단체로 앉은 이들은 본인들이 속한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앞좌석을 발로 쿵쿵 차거나, 심지어 무언가 먹을 것을 가져와 비닐봉지에서 부스럭거리며 꺼내기도 했다.
분명히 공연이 끝나고 난 뒤에만 사진과 영상 촬영이 가능하다고 안내를 받았는데, 공연 중에 거의 대놓고 이를 촬영하는 관객도 있었다. 하우스 어셔들은 이 모든 총체적 난국을 제대로 제지하고 관리하지 못했다. 콘서트홀의 답답한 음향도 한몫했지만, 배우의 노래에 집중할 만하면 주변 관객들의 방해로 불쾌감이 엄습했다. 공연을 그렇게 자주 즐기지 않는 짝꿍 역시 "도저히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라며 불편함을 호소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러 언론 매체들이 대한민국 공연 관객들의 '시체관극' 문화를 비판했다. 한 달여 만에 한국의 '시체관극' 문화가 사라진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지난 연말, 공연계 최대 화두 중 하나는 바로 '시체관극' 문화였다. 새로운 지적은 아니다. 마니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의 공연 관람 문화가 마치 '시체'처럼 아무런 반응이나 움직임 없이 공연을 관람할 것을 강요한다는 비판이다(관련기사 : '시체관극' 논란 부른 기자의 노트 필기, 대체 뭐길래).
물론 한국의 관극 문화가 다른 장르 혹은 해외 관극 문화에 비해 다소 경직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너무 엄격한 기준 탓에 신규 관객 유입의 허들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같은 비판이 일견 타당함에도, 재차 불거진 이 '시체관극' 비판 담론은 시작부터 잘못됐다. 언론이 논란을 촉발한 칼럼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지적하지 않은 채, 공연 관객들 비판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논란을 일으켰던 2023년 12월 9일 자 <디컬쳐>의 취재 수첩 논지는 이렇다. 해당 글의 필자는 기자이고, 공연 관람 중에 당연히 메모할 권리가 있는데 이를 주변 관객과 공연장으로부터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소극장에서 공연 중 메모하는 게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는 아니다. 물론, 전관을 프레스 리뷰로 대관하거나, 프레스콜 때 전막 시연을 하는 경우라면 당연히 이야기는 다르다. 필기는 물론이고, 이때는 대부분 기자가 노트북도 꺼내 든다. 공연 중간중간 사진과 영상도 계속 촬영한다.
그러나 상연 중인 회차를 프레스 초대로 관람할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기자에게 취재할 권리가 있다면, 옆에 앉은 관객 역시 정당하게 본인의 관람을 즐길 권리가 있다. 공연 중에 메모하는 기자도 있고, 메모하지 않는 기자도 있지만, 필기를 하더라도 주변 관객에게 양해부터 구했다면 어땠을까?
또한 대극장과 소극장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대극장의 경우 특정 구역을 프레스 관람 및 초대 구역으로 따로 지정해 놓기 때문에 '기자들끼리' 앉는 자리가 만들어지고는 한다. 공간감과 음향이 다르기에, 설사 메모하더라도 주변 관객을 방해할 가능성도 다소 줄어든다. 하지만 휴대전화 진동 소리조차 공연에 방해될 수 있는 소극장이라면 어떨까? '옆 사람 침 삼키는 소리'와 필기를 굳이 비교할 필요가 있었을까?
설사 이에 대해 본인이 비판적인 견해를 펼친다고 하더라도, 해당 공연장에 올라간 작품명을 거론하며 "볼 이유가 하등 없다"라고 폄훼할 이유는 없다. 그 글을 마주한 제작사와 스태프, 배우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애초에 이 같은 물음표 없이 이 칼럼이 발화점이 되어 관람 문화 전반에 대한 논란으로 번진 게 아쉽기만 하다.
해외 사례, 참고할 수는 있겠지만...
여러 매체와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의 관극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해외 사례를 자주 거론한다. 뮤지컬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의 관람 문화에 비해, 한국만 유독 경직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운이 좋게도 지난해 두 번 해외에서 작품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뮤지컬의 본고장 중 하나인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더 북 오브 모르몬(The Book of Mormon)>을, 또 한 번은 비록 브로드웨이는 아니었지만, 미국 워싱턴 D.C에서 연극 <포투스(POTUS: Or, Behind EveryGreat Dumbass Are Seven Women Trying to KeepHim Alive)>를 보았다.
음료수는 물론, 자유롭게 객석에 앉아서 주류도 섭취할 수 있었다. 주변 관객의 움직임에 크게 개의치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신선하기도 했고, 꽤 유쾌하게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아무래도 발랄한 작품이다 보니 관객들의 현장 반응도 훨씬 크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외 관객들은 아무런 기준이나 제지 없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공연장 내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하거나 메모하는 관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박수나 웃음소리가 상대적으로 훨씬 크지만, 상연 시간 동안 특별하게 상대의 관람을 방해할 만한 행동 역시 나오지도 않았다.
또한 모든 게 다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고 객석을 나오면서 내 눈에 들어온 것 극장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과자 부스러기, 음료수와 술이 담긴 채 버려진 플라스틱 컵 등이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들이 좋은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해외 보다 한국의 공연 문화가 지나치게 엄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해외의 사례가 완벽한 '모범' 사례라고만 제시하는 것은, 마치 우리의 관극 문화가 일방적으로 잘못됐으니, 해외의 관극 문화를 그대로 수입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내포된 것만 같다. 정도와 선의 문제는 당연히 지적할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극에 집중할 수 있는 문화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무엇보다, 한국 공연장의 열악한 환경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 앞의 관객에게 등을 좌석에 붙이고 보라고 안내하는 걸까? 조금만 허리를 숙여도 무대의 배우가 보이지 않는 기형적 좌석 구조 때문이다. 왜 뒷사람이 앞줄에 앉은 관객을 위해 움직임을 자제해야 하는 걸까? 객석과 객석 사이가 너무 좁다 보니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앞좌석 자리를 발로 차게 되기 때문이다. 한정된 공간에 좌석을 욱여넣다 보니 발생하는 현상들이다. 대극장보다 중소극장의 관극 문화가 더 엄격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반면, 내가 경험한 영국과 미국의 극장은 정말 훌륭한 곳들이었다. 객석 간 거리도 여유가 있고, 무대와 각 객석의 단차도 잘 조율되어 있었다. 앞의 사람이 움직여도 뒤에 앉은 나의 시야가 그다지 가리지 않았다. 설사 주변의 관객이 어떤 행동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이 상대의 관람을 크게 방해하지 않을 만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하우스 어셔들이 휴대전화 사용 자제를 안내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기 전에, 다른 나라만큼 관객이 서로의 공연을 크게 방해하지 않을 수 있는 물적 환경이 조성됐는지를 비판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화는 누가, 무엇이, 어떻게 만드는가
일부 남초 커뮤니티는 마치 '시체관극' 문화가 공연을 몰래 녹음하거나 녹화하는 데 방해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제기하는 지경이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은 그 문화를 형성하게 만든 물적 토대와 조건들이 존재한다. 한국의 관극 문화가 다소 딱딱해진 것 역시 공연을 좋아하는 관객들이 특별히 '고고'해서, 혹은 우월감을 느끼고 있어서가 아니다.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률보다 빠르게 오르는 티켓값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작품의 수준이 과거 보다 그만큼 상향 평준화됐는지는 의문이다. 해외의 공연 티켓값이 더 비싸다고들 하지만, 대신 해외는 로터리 티켓이나 잔여석 할인 등 훨씬 싼 티켓도 많다. 관객에게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에, 도저히 VIP석이라고 하기 어려운 좌석까지 보라색으로 칠해서 비싼 값에 파는 우리나라와 단순 비교가 어렵다. 그만큼 한 번의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관객들이 포기해야 할 기회비용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
공연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마니아 관객들이 언제나 무조건 '시체관극'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코로나19 이전 시기에 뮤지컬 페스티벌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최근 입소문을 타고 흥행에 성공해 연장 공연까지 확정한 <난쟁이들>처럼, 작품 자체가 밝고 신나는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리액션 공연의 재미를 상승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나름대로 연차가 있는 작품이지만, 이런 작품에서는 애초에 '시체관극' 논란이 생길 수가 없다.
어디까지가 '관크(관객 크리티컬, 상대의 관극을 방해하는 행위)'이고, 어디까지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기준이 다를 것이다. 나 역시 극장 내에서 모든 종류의 소음이나 움직임을 '관크'로 규정하고 제지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마니아도 마찬가지이다. 주변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관객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걸 모든 마니아 관객의 '표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0년 넘게 공연을 관람하면서, 나 역시 황당한 장면을 마주하거나 경험할 때가 있다. 과도한 요구를 받을 때도 가끔 있었고(다리가 짧고 앉은키가 큰 게 뒷좌석 관람에 방해가 될 수는 있지만, 비난받을 만큼의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반대로 정말로 몰상식하게 관람을 방해하는 사람을 볼 때(양말까지 벗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았는가?)도 있다.
하지만 일부의 사례들을 가지고 문화 전체를 규정하기도 어렵고, 그것도 마치 매도하는 방향으로 담론이 흘러가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지점들을 언급하지 않고 '관객 탓'으로만 몰아가는 것은 다소 부당하다. 나 같은 머덕(머글+덕후, 마니아와 일반 관객 사이에 걸쳐 있는 관객)도 억하심정이 드는데, 마니아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지난 3일, 뮤지컬 <드라큘라>를 취재를 위해 관람했다. 함께 한 배우자는 재차 지난 갈라 쇼의 무대를 언급하며 "무대에 훨씬 집중해서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라며 "역시 뮤덕(뮤지컬 마니아)들과 보는 게 재밌는 것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지금의 관극 문화가 일반 관객에게 다소 높은 허들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배제하는 쪽으로 작동한다고 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한국의 관극 문화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나 역시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열악한 관람 환경 개선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달성해야 한다. 일부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이 관객 비판에만 집중하는 것은, 그리고 그런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언론이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아쉽기만 하다. 그들도 이 문화를 만든 데 일정 부분 기여한 이들이고, 이 문화를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것 역시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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