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계산대를 이용하면서 혹시 이런 생각 해보셨나요. ‘왜 내가 공짜로 계산원 일을 하고 있지?’
그렇다면 본질을 꿰뚫어 본 겁니다. 마트 직원의 유급 노동을 소비자의 무급 노동으로 대체해 비용을 절감하는 것. 그게 바로 소매업체가 셀프계산대를 늘리고 있는 이유이죠.
그런데 어디 셀프계산대만 그런가요. 키오스크나 은행 ATM기도 마찬가지이죠. 소비자들은 한때 누군가 해줬던 일(예금 인출, 민원 발급, 햄버거 주문 등)을 무료로 수행하는 데 상당히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기업이 떠넘긴 일을 소비자가 기꺼이, 좋아서 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 대표적인 예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인 1916년 미국 슈퍼마켓 체인 ‘피글리 위글리(Piggly Wiggly)’가 도입한 셀프 서비스 매장입니다.
장바구니를 들고 매장을 둘러보며 선반에 있는 물건을 직접 골라 담는 슈퍼마켓. 지금은 당연한 이 셀프서비스 매장을 처음 만든 게 피글리 위글리였다. 사진은 1918년의 피글리 위글리 매장.
처음엔 다들 이 셀프서비스 매장이 실패할 거라고 봤죠. 손님들이 귀찮아할 거고, 좀도둑이 늘어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웬걸. 피글리 위글리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습니다. 물건을 직접 고르게 되자 사람들이 예정에 없던 충동소비를 하게 됐기 때문이죠. 결국 다른 슈퍼마켓들이 앞다퉈 이 방식을 따라옵니다.
1987년 뉴욕타임스 지면에 소개된 크로거의 셀프계산대. 어린이 고객이 바코드를 스캔하고 있다.
1986년 시작된 계산대의 혁명
느릿느릿한 서비스를 받느니, 차라리 소비자가 직접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 그 급한 성질머리가 슈퍼마켓 혁신의 배경이 된 셈인데요. 이와 상당히 비슷한 이유로 1986년 또 다른 혁신이 빛을 봅니다. 미국 대형 슈퍼마켓 체인 크로거(Kroger)가 ACM(Automated Checkout Machine)으로 불렸던 셀프계산대를 애틀랜타 매장에 처음 설치한 겁니다.
이 최초의 셀프계산대는 지금과 작동원리는 같지만 생긴 건 사뭇 다른데요. 고객이 직접 바코드를 스캔한 뒤 제품을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리면 센서로 스캔된 제품과 동일한지를 확인한 뒤 통과시킵니다. 만약 스캔되지 않은 제품을 올리면 컨베이어가 역방향으로 다시 돌려보내죠. 계산이 끝나면 고객은 종이 영수증을 받아 들고 계산원에게 가서 결제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혁신은 너무 시대를 앞서갔습니다. 시장은 생각만큼 열광하지 않았죠. 실제 미국 대형 마트가 본격적으로 셀프계산대를 도입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 하지만 성장은 다소 울퉁불퉁했습니다. 예컨대 알버슨스(Albertsons)는 2011년 ‘쇼핑객에 더 많은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셀프계산대를 전면 철수했다가 2019년 다시 도입했죠. 미국 코스트코 역시 2013년 셀프계산대를 다 없앴다가, 2019년 다시 돌아왔고요. 지난해 초엔 월마트가 미국 뉴멕시코주 매장 3곳에서 셀프계산대를 없애 화제가 됐습니다. 미국은 아니지만 영국의 슈퍼마켓 체인 부스(Booths)는 최근 대부분 매장에서 셀프계산대를 폐쇄한다고 발표했고요.
(참고로 한국에선 롯데마트 2017년, 이마트 2018년부터 셀프계산대 도입)
셀프계산대가 싫은 이유
일단 셀프계산대의 장점부터 나열해볼까요.
고객 입장에서 가장 큰 건 계산대 앞 긴 줄에 서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기업 입장에선 여러모로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죠. 일단 셀프계산대는 자리를 덜 차지하기 때문에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요. 당연히 계산하는 직원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대에 보통 3만 달러가 넘는 비싼 비용(소프트웨어 포함)에도 셀프계산대를 설치합니다. 미국 식품산업협회(FMI) 통계에 따르면 전체 식품 소매점의 96%가 셀프계산대를 뒀다고 하죠.
실제 사용경험은 어떤가요. 간단하게 서너가지 물건만 살 때는 셀프계산대가 간편하게 여겨지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사실 더 많죠. 술 사려면 나이 확인을 위해 직원 호출, 실수로 바코드 2번 찍으면 취소를 위해 직원 호출, 그냥 기계가 먹통돼서 직원 호출. 수시로 ‘직원 호출’ 상황이 이어집니다.
또 보통 도난 방지를 위해 스캔한 제품 중량을 인식하는 시스템을 두는데요. 이게 물건을 늦게 올려도 미리 담아도 오류가 발생하죠. 보통 예민한 게 아닙니다.
바코드가 없는 포장되지 않은 신선식품을 셀프계산대로 구입하는 건 더 도전적인 일입니다. 수십 가지 품목 중 자신이 고른 농산물을 정확히 골라내고(내가 고른 사과가 홍로인지, 부사인지 구분해야) 개수를 입력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죠. 영국 슈퍼마켓 부스는 바로 이 점이 셀프계산대를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밝힙니다. “우리는 (바코드가 없는) 농산물과 빵 제품이 많습니다. 그로 인해 셀프계산대에선 모든 일이 느려지고 정말 복잡합니다.”(영국 부스의 나이젤 머레이 이사의 BBC 인터뷰)
쇼핑객 7명 중 1명은 도둑질 경험?
미국에선 소매점 절도가 심각한 이슈라는 소식, 딥다이브에서 전해드린 적 있는데요. 셀프계산대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명백하게 절도를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셀프계산대에서 물건을 슬쩍하는 다양한 수법이 있다는데요. 바나나로 입력하고 무게가 비슷한 티본스테이크를 가져가는 식의 바코드 바꿔치기(일명 ‘바나나 트릭’)가 대표적이죠. 작은 품목을 다른 물건 안에 숨기거나, 손목에 붙여놓은 가짜 바코드를 스캔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고요. 스캔은 다 제대로 했지만 결제를 안 하고 들고 나가버리는 대담한 수법도 쓰입니다.
미국 온라인 금융플랫폼 렌딩트리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는데요. 응답자 중 15%가 셀프계산대에서 물건을 훔친 적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놀랍게도 7명 중 1명이 물건을 훔쳤다는 뜻이죠. 또 21%는 ‘실수로’ 스캔하지 않은 물건을 가져간 적 있다는데요. 그 물건을 매장으로 다시 가져가 돌려준 경우는 3분의 1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꿀꺽한 겁니다. 렌딩트리는 셀프계산대 기계가 도둑질을 부추기는 면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셀프계산대는 편리하지만 확실히 물건을 훔칠 위험이 큽니다. 소매업체는 셀프계산대의 비용절감 효과가 도난 증가위험을 감수할 정도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렌딩트리 매트 슐츠 최고신용분석가)
그럼 시간은 어떨까요?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부분 고객(85%)은 셀프계산대가 확실히 더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문가 의견은 좀 다릅니다. 사회학자 크리스토퍼 앤드류스는 셀프계산대가 실제로는 더 빠르지 않다고 지적하는데요. “고객들이 매초마다 주의를 기울이며 계산원을 대신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에 더 빠르게 느껴질 뿐”이라는 설명입니다. 실제 소매업체들은 셀프계산대의 늘어지는 대기시간을 어떻게 줄일까 고민 중이죠. 미국 마트 타겟은 일부 매장에서 셀프계산대를 이용할 수 있는 물품 수를 10개 이하로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
셀프계산대가 첫 선을 보인 지 38년. 기계는 아직 사람 계산원을 완전히 대체하기엔 한참 부족해 보입니다. 계산원 일자리를 빼앗는 적으로도 지목되는 셀프계산대.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이것저것 따져보고 차근차근 도입돼도 좋을 듯합니다. 사람이냐 기계냐를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둘이 공존하는 게 고객 입장에서는 가장 나으니까요. By.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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