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찍지 마세요. 진짜 안됩니다! "
지난달 11일 오후 11시, 서울 김포국제공항 국제선 청사 입국장에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일본 오사카에서 공연을 하고 돌아온 SM엔터테인먼트의 보이밴드 엔시티(NCT)를 따라 탑승한 팬 40여명이 입국을 위해 대기 중인 멤버들을 찍겠다며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혼란이 생긴 것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막아도 이들은 플래시를 터뜨리며 촬영을 이어갔다.
심사 줄에 선 NCT 멤버들은 모자에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고개를 숙였지만, 렌즈를 계속 피할 수는 없었다. 공항 직원의 외침에도 촬영이 이어지자 일부 승객이 항의에 가세했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멤버들이 입국장 밖으로 이동해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과정에서 사람이 몰리면서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카메라를 목에 건 팬들은 익숙한 듯 웃어넘겼다. 이 중 한 명은 “일반인 XX가 찍지 말라고 난리잖아. 아, 나 너 안 찍는다고”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입국장을 이용한 중년 여행객들은 “도대체 누군데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며 혀를 차다가 ‘NCT’라는 답변을 듣고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해보기도 했다.
지난 9월 11일 오후 11시 서울 김포국제공항 입국장 수하물 인도 구역에서 일본 공연 뒤 귀국한 NCT를 둘러싼 팬들. 전문가용 카메라를 든 이들은 촬영이 금지된 입국심사장에서도 플래시를 터뜨려 제지를 받았다. 전영선 기자
사생(私生ㆍSasaengㆍStan)의 행동
사생은 시도 때도 없이 연예인 혹은 유명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극성팬을 뜻하는 용어다. 한때 ‘사생팬(Fan)’으로도 불렸지만, “팬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팬을 떼고 부르는 추세다. 집으로 찾아가는 등 스토킹에 가까운 집착을 보인다. 비행 스케줄을 알아내 따라 타는 행위는 역사가 깊은 사생의 활동 중 하나다.
사생은 오로지 연예인의 출입국 현장을 보기 위해 비행기표를 산다. 비행 시간이 짧은 일본 스케줄엔 높은 확률로 사생이 따라 붙는다. 지난달 8일 오전 JYP의 보이밴드 스트레이 키즈의 출국 현장에도 어김없이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든 사생이 나타나 북새통이었다. 이들은 출국장에 함께 줄을 서 입국 과정을 촬영했고, 탑승 직전까지 항공사 VIP 라운지 앞에서 진을 쳤다.
지난 9월 8일 오전 서울 김포국제공항 출국장 면세점에서 일본 공연을 위해 출국 심사 중인 JYP 보이밴드 스트레이 키즈가 게이트를 통과하길 기다리는 사람들. 일부 팬들은 좋아하는 아이돌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비행 정보를 캐내 함께 탑승하고 찍은 사진을 팔기도 한다. 전영선 기자
이처럼 비행 정보를 알아내 따라붙는 행위는 그나마 공공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비공개인 집 주소를 알아내 원하지 않는 선물이나 음식을 보내는 행위는 더욱 공포심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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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의 신상품, ‘아이돌 데이터 판매’
법적으로도 문제지만 사생의 여러 활동은 자기 파괴적이다. 출입국장에서 단 몇 분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거나 촬영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를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도 상당하다. 학업이나 생업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지난달 11일 NCT가 이용한 오사카-김포 국적기 항공권의 가격은 왕복 40만~60만원 사이다. 해외 일정을 함께 하려면, 1~2일 숙박을 해야 한다. 콘서트까지 본다면 이 비용은 더욱 치솟는다. 한 번 움직이는데 최소 100만원은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대다수인 이들이 부담하기엔 고액이다. 팬 활동은 기본적으로 앨범 구매와 공개방송 참여 등에 상당한 비용이 든다. 종류별로 나온 앨범을 다 모으거나 팬 사인회 응모에 확률을 높이기 위해 대량으로 사는 경우도 많다. 콘서트 티켓 값은 가장 저렴한 표가 15만원대에서 형성돼 있고 VIP석은 20만원을 웃돈다.
팬 활동에 급여의 대부분을 쏟아부었다는 고백은 팬커뮤니티에서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일부는 자신이 얻은 정보와 사진을 돈을 받고 넘겨 증가하는 활동 비용을 마련한다. 엑스(옛 트위터)엔 ‘데이터’로 통칭되는 아이돌 사진이나 정보를 팔겠다는 글이 올라온다. 9월 11일 저녁 NCT가 입국한 직후에도 데이터 판매 글이 여러 플랫폼에 동시에 올라왔다.
9월 11일 NCT 김포 입국 사진을 판매한다는 엑스(옛 트위터) 사용자의 글. 입국과 동시에 올라온 포스팅이다. 사진 엑스 캡처
특정 그룹의 특정 행사의 데이터를 구한다는 의뢰 글도 수도 없이 많다. 일부는 이런 의뢰를 받고 일명 ‘대리 찍사’로 활동을 하면서 수익을 올린다. 유명 홈마스터(홈마ㆍ유명 팬계정을 운영하거나 좋은 사진ㆍ영상을 올리는 팬을 이렇게 통칭한다. ’찍덕‘이라는 표현도 혼용된다.)가 직접 일정에 갈 수 없을 경우 대리를 고용해 데이터를 넘겨받고 보정해 자신이 찍은 것처럼 올리기도 한다. 일부는 데이터를 사다 굿즈를 만들거나 사진집을 만들기도 한다. 할리우드 등 해외에도 파파라치가 있지만, K팝의 홈마는 팬활동을 겸하는 경우가 많아 차이가 있다.
엑스에선 해시태그(#) ‘데이터’, ‘사후데이터’, ‘대리찍사’, ‘댈찍’ 등으로 검색하면 판매자 수십명이 뜬다. 이들은 주로 오픈 카카오톡 등으로 영업을 하고 카카오페이, 페이팔 등으로 입금을 받는다. 팬사인회에 참여해 1대1 대화에서 나온 이야기를 공유해주고 돈을 받는 홈마도 있다. 아이돌이 이름을 외우는 유명 홈마들이 듣는 말이 무엇인지 일반 팬이 궁금해하면서 나온 신종 ‘사업’ 중 하나다.
이들이 공유하는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특별한 비공개 정보에 목이 마른 팬들은 지갑을 연다. 이들이 파는 데이터의 가격은 그룹의 인기도, 흥망성쇠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데이터를 팔면 원본을 지우는 것이 업계 상도의지만, 여러 명에게 팔아도 잡을 방법은 없다.
고화질 사진, 시세는 1건에 8만~15만원
가요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K팝의 ‘홈마 문화’는 90년대부터 있었다. 최근엔 K팝이 글로벌 팬덤으로 확장하면서 데이터 판매 수익도 무시 못하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팬덤이 확고한 그룹 수가 증가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홈마 혹은 찍덕은 하루에 여러 건의 촬영 일정을 소화하기도 한다. 한 홈마는 1일 엑스에 ‘아이브 장원영, 템페스트 루ㆍ한빈ㆍ형섭ㆍ혁 ㆍ은한 ㆍ화랑ㆍ 태래, 에이티즈 홍중 ㆍ성화ㆍ 윤호ㆍ 여상ㆍ 민기ㆍ 우영ㆍ 종호ㆍ 산, 오마이걸 효정ㆍ 미미ㆍ 유아ㆍ 승희ㆍ 유빈ㆍ 아린 등을 찍을 예정’이라고 공지했다. 자신을 소개하는 글엔 사용 카메라와 렌즈 기종을 안내하고 홍콩과 중국, 한국 계좌로 돈을 받으며 입금 24시간 이내에 원본을 보낸다고 돼 있다.
이 촬영자에게 장원영 사진 예약 가능 여부를 묻자 즉시 ‘가능합니다. 8 (만원) 받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또 다른 촬영자에게 NCT 해찬 사진의 가격을 문의하자, ‘800장 가량에 15만원’이라고 답해왔다. 연사로 찍은 사진 파일을 통째로 넘기는 것으로 이중 몇 장이 좋은 사진인지 미리 확인할 길은 없다.
이런 사적인 데이터 판매는 엄연히 초상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팬 활동과 경계에 있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쉽지 않다. 팬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경호팀이 몸으로 카메라를 막거나 동시에 플래시를 터뜨려 촬영을 방해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대응이 일반적이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팬 활동을 막는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어 심하게 제지하거나 뭐라고 하기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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