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정보 서세원 딸 서동주가 블로그에 올렸던 글
43,845 143
2023.08.23 23:43
43,845 143

나는 아빠와 닮은 점이 참 많았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린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렸을때는 셜록 홈즈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즐겨 읽었고, 조금 커서는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마츠모토 세이쵸와 같은 작가들의 소설들을 찾았다. 내가 산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빠를 주고, 아빠도 늘 다 읽은 소설들을 나에게 주었다. 아빠는 늘 새벽 두 세시가 훌쩍 지난 뒤에야 귀가를 하였는데, 그 때까지 깨어 있는 사람은 가족들 중 나 하나였다. 그래서 아빠가 집에 돌아오면 내 방문을 두드려, “자냐?” 하고 물은 뒤, 내가 안자고 있으면 거실로 나오라고 해서 같이 책을 읽는 일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었다.



우린 영화 감상을 좋아했다. 가끔 책 읽는 일이 지루해질때면 아빠와 영화 또는 미드를 밤새도록 릴레이로 보곤 했다. “24"이라던가 "프리즌 브레이크" 같은 미드를 보며 같이 긴장하고, 추리하고, 누가 범인을 맞추나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배가 고파지면 진라면이나 짜파게티를 끓여먹기도 하고, 계란을 네 다섯개씩 반숙으로 삶아 먹기도 했다. 뜨거워서 김이 나는 삶은 계란을 후후 불어가며 소금 후추에 살짝 찍어 먹으면 그것만큼 맛있는 야식이 또 없었다. 여름엔 포도를 주로 먹었는데, 매일 밤 각각 한송이씩 뚝딱 먹어버리는 바람에 아빠는 늘 근처 마트에서 그 비싼 포도를 두 박스씩 사오곤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아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나는 적어도 그 순간들만큼은 아빠를 참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아빠와 나 사이에 부녀지간을 넘은 의리 같은 것이 있다고 느꼈었다. 가족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길때면 시한 폭탄같은 아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고도 생각했다. 아빠에겐 “엄마가 원래 그렇지, 아빠가 이해해”라고 말한 뒤, 엄마에겐 “아빠가 이러는거 하루 이틀이야? 엄마가 이해해”라고 설득하며 둘 사이를 조율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양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였다. 아빠가 동생을 혼낼 때도 나는 그 사이에 끼어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희한하게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내가 나서면 그나마 진정이 되는게 아빠였다. 어쩌면 나는, 내가 없으면 우리 가족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우쭐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고, 나와 아빠의 사이가 틀어지고, 동생과 부모님과의 관계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가족이란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긍정적인 감정들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추리 소설도 더 이상 읽기 싫었다. 영화를 보는 일도 싫어졌다. 더이상 아빠와 같은 취미를 갖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취미를 통해 아빠가 생각나는 것은 더욱 싫었다.



어차피 아빠에겐 이미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새로운 자식도 생겨 나와 동생은 신경쓰지도 않을테니 나도 그러고 싶었다. 신경쓰기 싫었다. 그렇지만 같은 유전자 탓인지 뭔지, 나는 취미 이외에도 아빠와 닮은 점이 많고, 그래서 지금도 가끔은, 아니 자주, 아빠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작년부터 레코드판을 모으고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는 취미가 생겼는데, 이것 또한 (인정하기 싫지만) 아빠의 취미 생활 중 하나였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아빠는 레코드판이 수백장이나 있었고 턴테이블도 여러개 있었다. 아빠는 20대 초반에 다방에서 디제이 일을 하였는데, 그때부터 레코드판을 모았다고 했다. 깔끔하기로 유명한 엄마는 애물단지라고 싫어했지만, 나는 서재방에 앉아 아빠의 레코드판들을 하나씩 꺼내어 영어로 된 미국 가수들의 이름을 읽어보고, 오래된 레코드판의 냄새를 맡아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아빠와 같은 취미를 갖기 싫어 무던히 노력했는데, 나는 결국 턴테이블도 사고 레코트판도 꽤 많이 모아버렸다. 아메바라는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레코드점에서 산 것들도 있고, 아마존으로 오더한 것들도 있고, 하다 못해 9가와 마켓 스트리트 코너에 있는 노숙자 아저씨에게 5달러씩 주고 싸게 구입한 것들도 있다. 오래된 레코드판으로 노래를 들으면 시간은 왜인지 모르게 느려지고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아빠가 덜 미워진다.



이제 아빠도 나를 덜 미워했으면 좋겠다.

목록 스크랩 (3)
댓글 143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에뛰드] 이거 완전 멀티비키 잖아?! ‘플레이 멀티 아이즈’ 체험 이벤트 728 09.27 39,830
공지 ▀▄▀▄▀【필독】 비밀번호 변경 권장 공지 ▀▄▀▄▀ 04.09 2,827,799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6,491,008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핫게 중계 공지 주의] 20.04.29 24,415,330
공지 ◤성별 관련 공지◢ [언금단어 사용 시 📢무📢통📢보📢차📢단📢] 16.05.21 25,757,066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51 21.08.23 4,762,646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30 20.09.29 3,798,628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41 20.05.17 4,346,773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77 20.04.30 4,847,702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18번 특정 모 커뮤니티 출처 자극적인 주작(어그로)글 무통보 삭제] 1236 18.08.31 9,500,663
모든 공지 확인하기()
2512745 이슈 😈더쿠(커뮤)침략에 성공하는듯한 주드로 덬의 야망.jpg (핫게 타임라인) 07:25 103
2512744 이슈 6년 전 오늘 발매♬ Nissy(니시지마 타카히로) 'トリコ/Relax&Chill' 1 07:25 10
2512743 기사/뉴스 [단독] '더글로리' 문동은 母 박지아, 뇌출혈 투병 중 사망 23 07:24 1,325
2512742 이슈 예쁘다는 이유로 역대급으로 미화된 막장 인성 황후 07:21 584
2512741 기사/뉴스 ‘인기가요’ 김희진, 신곡 ‘주세요’ 선공개 07:21 214
2512740 기사/뉴스 [MLB] 아라에즈, 오타니 트리플 크라운 저지하며 3년 연속 타격왕 등극 2 07:18 186
2512739 이슈 [MLB] 시카고 화이트삭스 트위터에 올라온 글 07:17 225
2512738 이슈 X계정 만든 듯한 블랙핑크 제니👀 5 07:16 819
2512737 유머 끊임없이 회자되는 1학년 2학기 마지막수업 이상이 발톱 사건 2 07:12 940
2512736 정보 신한플러스/플레이 정답 3 07:02 269
2512735 이슈 야기라 유야가 존잘인데 내용도 존잼인 경찰이 남주로 나오는 스릴러 일드 간니발.gif 23 06:55 1,412
2512734 이슈 9년 전 오늘 발매♬ E-girls 'Dance Dance Dance' 06:55 136
2512733 유머 🐱어서오세요 오전에도 운영하는 고등어 식당 입니다~ 4 06:47 226
2512732 이슈 맷 보머 최근 사진들.jpg 16 06:40 2,604
2512731 유머 일본에서 "복권의 불시착"으로 개봉한 한국영화 10 06:31 3,881
2512730 이슈 조선사람들이 환장했다는 빵.jpg 6 06:29 4,457
2512729 이슈 가십걸 세레나 스타일vs블레어 스타일 중 덬의 취향은? 23 06:22 1,588
2512728 이슈 진지하게 내 집보다 좋은 노르웨이 교도소 8 06:16 1,729
2512727 정보 토스 행퀴 21 06:16 1,291
2512726 이슈 [나쁜엄마] 현실적으로 덬들이 자식이라면 라미란 캐릭터를 용서할 수 있는가? 8 06:08 1,7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