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이슈 (이동진 칼럼)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47,664 388
2022.03.30 23:08
47,664 388
https://img.theqoo.net/cHmoN

터널을 지날때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 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주어집니다. 그건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 설명에 따르면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포기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요.


구약 성서에서 롯의 아내도 그랬습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 받을 때 이를 간신히 피해 떠나가다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까요. 금기를 깨고 뒤돌아보았다가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전세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탐욕스런 어느 부자의 집이 물로 심판 받을 때 뒤돌아본 그의 며느리가 바위가 되고 마는 충남 연기의 장자못 전설을 비롯해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여러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니까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입니다.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신들의 나라에서 돼지가 된 부모를 구출해 돌아가던 소녀 치히로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동안 결코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거지요.


그런데 왜 허다한 이야기들에 이런 ‘돌아보지 말 것’에 대한 금기가 원형(原型)처럼 반복되는 걸까요. 그건 혹시 삶에서 지난했던 한 단계의 마무리는 결국 그 단계를 되짚어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르페우스처럼, 그리움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지나온 단계를 되돌아볼 때 그 단계의 찌꺼기는 도돌이표처럼 지루하게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금 기둥과 며느리 바위는 그 찌꺼기들이 퇴적해 남긴 과거의 퇴층 같은 게 아닐까요.


류시화 시인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시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나였다/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고 했지요. 정해종 시인도 ‘엑스트라’에서 “그냥 지나가야 한다/말 걸지 말고/뒤돌아보지 말고/모든 필연을/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고 했구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치히로가 그 힘든 모험을 마치고 빠져 나오는 통로가 다리가 아닌 터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엔 다리와 터널이 있겠지요. 다리는 텅 빈 공간에 ‘놓는’ 것이라면, 터널은 (이미 흙이나 암반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을 ‘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가 ‘더하기의 통로’라면 터널은 ‘빼기의 통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삶의 단계들을 지날 때 중요한 것은 얻어낸 것들을 어떻게 한껏 지고 나가느냐가 아니라, 삭제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훌훌 털어내느냐,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초입을 터널로 지나면서 치히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욕망과 집착을 조금 덜어내는 법을 배웠겠지요.


박흥식 감독의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사랑이 잘 풀리지 않을 무렵, 윤주는 봉수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고 되뇌지만 결국 뒤를 돌아 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쓸쓸히 확인한 것은 봉수의 부재(不在)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정말로 뒤돌아보고 싶다면 터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돌아서서 보세요. 치히로가 마침내 부모와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표정 없는 얼굴로 그렇게 뒤돌아본 이후가 아니었던가요.
목록 스크랩 (264)
댓글 388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영화이벤트] 올여름, 코미디의 정석이 이륙합니다! <파일럿> 최초 무대인사 시사회 초대 이벤트 439 07.05 23,134
공지 더쿠 이미지 서버 gif -> 동영상 변환 기능 적용 07.05 37,645
공지 ▀▄▀▄▀【필독】 비밀번호 변경 권장 공지 ▀▄▀▄▀ 04.09 1,171,837
공지 공지접기 기능 개선안내 [📢4월 1일 부로 공지 접힘 기능의 공지 읽음 여부 저장방식이 변경되어서 새로 읽어줘야 접힙니다.📢] 23.11.01 4,835,846
공지 비밀번호 초기화 관련 안내 23.06.25 5,862,193
공지 ◤더쿠 이용 규칙◢ 20.04.29 22,128,302
공지 [필독]성별관련 공지 [📢언금단어 사용 시 무통보 차단📢] 16.05.21 23,401,092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49 21.08.23 3,993,562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25 20.09.29 2,934,161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384 20.05.17 3,580,798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68 20.04.30 4,143,112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스퀘어 저격판 사용 무통보 차단 주의!!!!!!!!!!!!!] 1236 18.08.31 8,622,959
모든 공지 확인하기()
2448908 유머 어릴때 아빠 차타면 꼭 있음 4 15:56 330
2448907 정보 ▶▷ 한국 고전 소설이 왜 재미없어? 고전소설도 도파민 폭발하는데 시도해보실?? ◁◀ 1 15:56 120
2448906 유머 내가 교수면 이거 합격 줌.twt 15:55 403
2448905 이슈 이성민한테 볼콕 요쳥햇는데 뻐큐받....았다가 드디어 제대로 해줌.twt 1 15:54 321
2448904 기사/뉴스 “아버지 집 나간지 정말 오래됐다”…‘가정사’ 고백한 가수 이영지 3 15:54 596
2448903 유머 계단에 얹아 엄마를 기다리는... 2 15:52 633
2448902 이슈 급발진 대처 올타임 레전드 14 15:51 1,218
2448901 기사/뉴스 일 정부, 미군 성범죄 숨겼다가 지자체 반발에 '정보 공유' 15:50 140
2448900 이슈 손흥민, "내가 축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더 오래 하고 실망스럽게 하지 않겠다. 은퇴한 후에는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아직도 굳건하다." 5 15:49 1,092
2448899 유머 비발디는 대체 어떤 여름을 보낸 것일까.shorts 16 15:49 1,025
2448898 유머 만화 애니 오타쿠들 빨리 들어와봐;;;;;;;;;; 63 15:47 1,097
2448897 기사/뉴스 "피 뱉게 종이컵 좀.." "조용 조용!" 버닝썬의 시작 [뉴스.zip/MBC뉴스] 1 15:47 749
2448896 이슈 키스오브라이프 쥴리 워터밤 스티키 무대.....핫함 17 15:45 1,738
2448895 유머 나능 후이바오🐼 냠냠할수업..ㅅ...... 13 15:44 1,501
2448894 유머 의외로 실존하는 교수 7 15:42 1,339
2448893 이슈 최근 박남정 인스타에 올라온 생일파티 사진 .jpg 5 15:41 2,844
2448892 기사/뉴스 “시청앞 참사 불과 며칠 전인데”…서울역서 80대 운전자 행인 2명 치어 12 15:40 1,435
2448891 이슈 [단독] 세계 톱 발레단도 반했다...'국보급' 20세 전민철, 마린스키 입단 11 15:40 1,335
2448890 이슈 박서준 인스타그램 업뎃.jpg 4 15:39 1,022
2448889 이슈 [KBO] 역대 미스터 올스타 17 15:36 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