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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유희열 부인의 감성적인 일상에 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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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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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곧 근사한 여행이라면 좋겠다. 갓 구운 빵, 커피, 산책,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친구... 이 모두가 내 일상 여행에 활기를 불어넣는 다정한 친구들이다. 마음 따라 흘러가는 나만의 매트릭스, 나의 소우주의 소중함에 대하여.

부스스 눈을 뜬 채 침대 맡에 앉는다. 몇 번이고 다시 눕고 싶은 마음을 뒤로 한 채 주섬주섬 후드 티셔츠 하나를 걸친다. 거울에 한 번 비춰보고는 티나터너가 된 머리를 헤어밴드로 쓸어 감춘다. 아직 한밤중인 방구의 모습을 바라본다. 원숭이 인형을 나 대신 안겨준 채 까치발로 살금살금 방문을 연다. 아침 8시 30분. 하루의 시작이다.
부엌창으로 비쳐 드는 햇살에 아침을 맞는다. 잠시 동안 멍하니 바람도 맞아본다.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뜬다. 계절을 불문하고 매일같이 맞는 이 아침바람의 맛은 참으로 묘한 힘이 있다. 주전자에 2인분의 물을 붓고 끓는 동안 커피잔 2개를 꺼낸다. 한 스푼 두 스픈 늘 마시던 대로 좋아하는 네스카페에서 나온 프레지던트 커피를 넣는다. 두툼한 식빵을 꺼내 버터를 바르고 오븐에 넣어 2인분을 맞추고는 사과를 깎는다. 냉장고를 열고 오늘은 제일 좋아하는 라즈베리씨가 가득한 해로즈(Harrod's) 잼을 먹기로 한다. 역시 좋은 잼은 씨가 많이 씹혀야 하는 거라는 방구의 궤변에 넘어가 며칠 전 거금을 주고 산 잼이다. 삶은 달걀 두 알과 케첩과 마요네즈를 야금야금 섞을 때쯤 울리는 ‘땡’하는 토스터 소리. 자, 아침 준비 끝! ‘굿모닝 여보~옹~~’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모토다. ‘구체적으로 그게 뭔데?’라고 묻는다면 난 그냥 웃겠다. 삶의 냄새 같은 것이다. 떠나야만 여행인가? 머문다고 지루하기만 한 일상인가? 아침 햇살 한 줄기에 풍만한 에너지가 가득하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잿빛 하늘이면 또 그런대로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종종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안방에서 부엌으로, 냉장고에서 식탁으로 열 검음이 채 안 되는 동선. 일상의 여행이다. 오후가 되면 우울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잠들기 전 베개에 얼굴을 묻고 흐느낄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다툼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끙끙 앓을는지도 모른다. 그럴때면 나를 다시 웃게 만드는 것들을 떠올리겠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 제일 좋아하는 건 한밤중에 부엌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 잔, 어수선해도 꽤 폼 나는 내 방, 여행지에서 산 추억이 깃든 미니 정리함, 캐시미어를 가장한 빨간색 스웨터, 재래시장 안의 만물상 아주머니, 1일장에서 바지락 조개를 사고 있는 내 모습, 매일 밤 ‘루이’의 배변을 위해 걷는 산책길. 장바구니가 달린 씽씽 잘도 달려주는 자전거, 히노키향 가득한 욕실에서 잡지를 읽으며 하루를 마감하는 반신욕, 그리고 입을 때마다 깔깔대고 웃는 커플 속옷들... 집안 구석구석 동네 여기저기 제일 좋아하는 물건과 장소가 있다는 건 정말이지 신나는 일이다. 존재감만으로도 그들의 잔상에 얽힌 사연속으로 나는 여행을 하고 또 공상을 한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해주고 잠재해 있던 파워에 불을 붙인다. 뭔가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설레는 일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제일 좋아하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좋아하는 토트백을 둘러 메고는 좋아하는 가게로 좋아하는 향초를 사러 룰루랄라 달려간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서.



나는 집을 참 좋아한다. 그건 결혼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다. 다른 집들과 비교해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인기피증이라도 있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도 아니다. 직업의 특성상 정시 출퇴근을 해가며 그야말로 쉼터로써의 안락함에 굶주린 사람도 아니다. 그냥 좋다. 때론 내가 가구가 된 것처럼 느낄 때도 없지 않지만 말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부엌과 내 방이다. 방구가 좋아하는 것쯤은 뭐든 다 만들어낼 수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조리대와 공간들, 간간이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동네에서 꽤 맛있다는 배달이 가능한 음식점 전단지가 가득 붙어 있는 냉장고, 홍대 앞 DIY 가구점에서 맞춘, 투박하지만 시간의 손때로 추억을 얘기하는 식탁과 옆에 비스듬히 놓인 TV, 그 맞은편 여행서로 빼곡한 책장의 등받이가 된 벽에는 니스에서 산 밀짚 모자 두 개가 걸려 있다. 아참참, 그 아래 5개의 열쇠가 매달린, 다트머스에서 산 열쇠걸이와 엄마 친구분께 선물받은 ‘나의 노래’라는 판화 한점도 이 풍경을 이루는 꼭지점이다.
가정을 통괄하는 가장 위대한 장소가 부엌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사연도 많고 사랑도 많다. 잔치국수 한 그릇에 울다 웃고 오늘은 싱거운 콩나물국이지만 내일은 완벽한 된장찌개를 기약한다. 향초를 사이에 두고 다음 여행지를 고르고 가계부를 펼쳐 다음 달 예산을 세운다. 오락 프로를 보며 박장대소를 하고 축구 중계를 보며 맥주 한 잔에 한 팀이 되어 응원도 한다. 조각조각의 기록들이 적힌 널부러진 메모지와 세계 곳곳에서 사 모은 향과 연필, 핸드로션과 재떨이 하나가 식탁 위에서 늘 제자리를 지킨다. 둘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잠이 안 와 혼자 앉은 늦은 밤에는 생각이 한없이 머무르기도 한다. 혼자 철학자가 되기도, 네 컷 만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뜬금없이 무드를 잡고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 양 수줍어하기도 한다. 그 옛날과거로부터 저 먼 미래가 있다. 아내가 되고 여자가 되어 본다. 부엌이란 참 희한한 곳이다. 이유 없이 따뜻하다. 냄새 하나만으로 일상의 모드를 느낀다. 기쁘고 즐겁고 애절하다. 사랑이 있고 정이 있고 삶이 있고 우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부엌을 좋아한다.
내 방은 근사하다. 나에겐 그렇다. 원숭이 수건걸이가 내 방임을 말해준다. 어릴 적부터 난 원숭이를 좋아했다. 첨엔 신기해서였는데 그러다 보니 나도 하는 짓이 어딘지 모르게 원숭이를 닮은 데가 있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방구에게도 원숭이는 나를 떠올리는 뭔가가 되어 있었다. ‘원숭원숭!’ 때론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뭐 나쁘지 않다. 스스로 인정하는 바가 있으므로. 내 방은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카펫이 깔려 있다. 진한 초콜릿색. 비슷한 색으로 DIY 가구점에서 맞춘 ㄱ자 책상과 맞은편의 나지막한 책장, 그 위엔 언제든 군것질을 할 수 있는 과자 바구니와 와인랙이 있다. 와인랙에는 따면 터질지도 모르는 정체 불명의 와인이 한 병 있고 나란히 놓인 커피머신의 커피 내리는 소리와 함께 향에 취할 수 있다. 방구가 설치해준 폼 나는 오디오가 마주 보고 있다. 그 앞엔 즐겨 듣는 CD들이 뒹굴고 카메라와 렌즈들이 전문가의 애장품인 양 놓여 있다. 구석엔 나일론 기타가 하나 있다. 브라질 음악이 너무 좋아 한때 기를 쓰고 배운 적이 있어 가끔 ‘속주의 밤’을 열어주겠다며 방구에게 자랑하지만 번번이 귀를 막는다. 치사하다. ㄱ자로 된 책상 위에는 노트북 하나와 모니터가 있고 의자를 반 바퀴 돌리면 바로 갖가지 연필과 각종 노트들이 있다. 뭔가 쓰는 걸 좋아해서 무지 노트를 사서는 이름을 붙여준다. 다 써도 각자의 이름이 있으니 쓰다 버린 노트 한 권쯤으로만 남진 않을 것이다. 컴퓨터로 많은 일을 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즐겨 찾는 인터넷을 둘러보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상 중 하나다. 스탠드가 분위기를 한껏 더한다. 방구와 만난 후부터는 그의 공식 홈페이지가 나의 즐겨찾기 1위가 되었다. 일명 ‘종점 다방.’ 으레껏 들어가 이것저것을 둘러 본다. 서로를 다방민이라 부르는 그곳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과 사연들이 벌어진다. 어느 날 습관처럼 들어가 둘러보는 나를 발견한다. 요새 재미있는 영화와 올가을 패션의 전망, 건조한 피부 퇴치법, 유행하는 아이섀도 색깔까지. 아니, 나도 어느새 다방민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인터넷 쇼핑도 가끔 즐기고 자주 가는 여행사의 새로 나온 상품들도 검색한다. 내 방에 들어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사방이 빽빽하니 없는 게 없다. 음악을 들으며 책도 읽고 카펫 위에 누워 여유를 부리며 과자를 먹는다. 원숭이처럼. 턱을 괴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나만의 노트에 뭔가를 끄적거린다. 난 이런 내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 공간의 주인이 된 것만으로도 난 이미 주연이다.
왜 그렇게 집을 좋아하냐며 답답해하는 친구들도 있다. 집안에서의 나는 분주하다. 요리 조리 왔다 갔다 분위기도 잡고 역할극도 해본다.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한껏 멋을 부리고 친구들과 카페 테라스에 앉아 수다 떠는 기분도 좋지만 난 헐렁한 요가복을 걷어 입고 후드 티셔츠에 안 어울리는 헤어밴드를 하고 조금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부엌과 내 방을 어슬렁거리는 내가 더 좋다.



유학시절 처음으로 커피라는 걸 알았다. 이전부터 그 단어야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화장실, 신문 따위와 같은, 말 그대로 그냥 단어일 뿐이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면 언제나 줄이 긴 한 가게가 있다. 커피맛이 유명하다는 구멍가게 같은 곳이었다. 특히 추운 겨울날이면 코가 새빨개지면서까지 달달 떨며 기다리다 간신히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들고 ‘후~’하며 입김과 커피 김을 함께 내뿜으며 나오는 사람들을 본다. 부러웠다. 마냥 따뜻해 보인다. 그 한 잔이 그렇게 소중해 보일 수가 없다. 그 후로 나도 매일 아침 그 긴 줄의 한 점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향을 알고 빈을 알고 기계를 알아갔다. 맛을 알고 멋을 알았다.
나는 커피를 굉장히 좋아한다. 아직까지도 하루에 5잔 이상을 마신다. 꽤 괜찮은 커피숍이나 나만큼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흥분을 감출 수가 없다. 기계와 빈의 궁합을 따져가며 어떻게 뽑는 게 제 맛인지 또 그런 가게는 어디에 있는지 기분 좋은 공부를 한다. 이제는 같은 커피를 마셔도 때에 따라 기분에 따라 그 맛은 다 다르다. 정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마시는 모닝 커피 한 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무의식 중에 마시는 한 잔, 너무 너무 피곤할 때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 잔, 설렁탕 한 그릇 뚝딱 하면 무료로 제공되는 진하고 단 자판기 커피 한 잔. 그 중 최고는 깊은 밤에 마시는 뜨거운 커피 한 잔이다. 어째서인지 애틋하다. 첫사랑처럼 첫눈처럼 설렌다. 잊고 지내던 추억도 되살아나고 응어리졌던 마음속의 무언가도 다 녹아 내린다. 커피 전문점에 들어가 좋아하는 것을 주문하고 계산을 한다. 한 잔을 들고 나와 하릴없이 길거리를 배회한다. 여행을 가서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무조건 가까운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좋아하는 커피 한 잔을 마시러 몇 시간을 여행한다. 유명하다는 카페에 들러 우리도 한껏 멋쟁이가 된다. 또 다른 좋아하는 것들을 얘기하면 한 잔을 더 주문하기도 한다. 행복하다. 연애 시절 방구가 에스프레소 머신을 산 적이 있다. 굉장히 귀여운 레트로풍 모양새였다. 벼르고 별러 산 것인 줄 아는 주위의 친한 사람들이 가끔 집에 놀러 와 오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아 방구는 뿌듯해한다. 자랑을 하며 한 잔씩 뽑아주고 그 흥에 겨워 우리도 덩달아 한 잔씩. 무리한 탓에 사실 헛구역질도 몇 번 했던 것 같다. 맛있는 빈을 사러 다니고 예쁜 잔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것이 또 다른 취향을 만들고 일상의 단면에 장식을 해준다. 지금은 온도계가 고장나서 독방 신세를 지고 있는데 쓰면서 생각하니 미안하다. 내일은 당장에 병원에 보내리라.
언제부턴가 나에게 있어 커피 같은 기분이란 ‘상큼 발랄 흥분 모드’이다. 아무리 지치고 우울하고 괴로울지라도 어느 누군가가 와서 ‘커피 한잔 할래요?’ 한다면 웃으며 대답할 것 같다. ‘오늘 같은 날씨 참 좋지요?’ 라고.




트레이닝 바지에 귀여운 티셔츠를 골라 입는다. 좋아하는 진재킷을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다. 현관 거울에 비춰보며 어울리는 운동화를 찾기에 한창이다. 똑같은 신발을 꺼내 신고는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동네 여행이다. 매일 같은 길이지만 오늘은 또 오늘의 공기를 가르며 걷는다. 속닥속닥 얘기를 하며 할인 카드를 쓸 수 있는 빵 가게에 들러 팥이 든 도넛 2개와 곰보빵 하나, 달콤한 패스트리를 산다. 할인받은 금액을 확인하고는 공짜로 얻은 양 둘 다 신이 났다. 편의점에 들러 모기약을 한 통 사고는 길을 건넌다. 방구가 좋아하는 만두국집 앞을 지난다. 영락없이 멈춰 서서는 ‘지금 배 안 고파?’ 하고 묻는다. 유일하게 내 남편이 초등학교 3학년짜리 내 아들로 보이는 순간이다. 그 순간만큼은 눈빛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다. 귀엽다. ‘그래 먹고 가자!’ 떡만두국 두 그릇이오!‘ 어느 새 다 비우고 후식으로 나눠주는 요구르트를 마시며 나온다. 자주 가는 커피집을 향해 걷는다. 가는 길의 문방구도 한 번 기웃대고 매일 지나치는 옷 가게에 오늘은 또 뭐가 나왔나 살펴도 본다. 나이키 숍을 지나칠 때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밖에 매달려 한참을 뜸을 들인다. 그동안 하도 들락거리며 이것저것 신어봐서 이젠 주인 아저씨 눈치를 살핀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우린 서로 딴청을 부리며 도망간다. 살 것도 없고 사지도 않을 거면서 우리는 습관처럼 유리창에 매달린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가게라며 합리화를 시키고는 악동들처럼 깔깔댄다. 약국에 들러 안약을 하나 사고 칫솔을 산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가 칫솔을 고르는 것과 우표를 사는 것이다. 칫솔은 종류도 많고 기능도 많지만 좋아하는 회사의 좋아하는 손잡이가 있다. 그걸 사는 순간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절대 같은 색깔의 칫솔을 연달아 쓰지 않는다. 이번엔 연두 다음은 주황... 늘 가는 커피숍에 다 왔다. 때론 에스프레소를 때론 레귤러를 주문한다. 테이블이라곤 달랑 3개뿐이고 테이블 간격이 너무 좁아 밖에서 보면 손님 모두가 일행으로 보일 만한, 그렇게 작은 곳이지만 나는 그곳을 좋아한다. 집에서 하지 않던 심각한 얘기들도 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세우며 마지막엔 잊지 않고 쿠폰에 도장을 받는다.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사로 볼 잡지 한 권씩을 산다. 영화를 보는 날이면 서점을 거르고 서점을 들르는 날엔 DVD대여점을 거른다.
이 동네가 안겨주는 생활의 기쁨 중의 백미! 평소에 연락이 뜸했던 아주 친한 이웃을 우연히 마주치는 날이 있다. ‘마법의 성’의 주인공인 광진이 오빠가 우리에겐 그런 사람이다. ‘어! 형 어디 가세요?’ ‘어 희열아!’ 약속해 만나는 것보다 반가움이 두 배가 된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간다. 이런 저런 사는 얘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 안부도 묻는다. 오늘은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다. 얼마 전 차범근 축구교실에 들어가 그간의 경기 내용을 읊어가며 아들 정이의 활약상에 신이 났다. 덩달아 우리까지 행복해진다. 가끔 외계인 같은 화법에 이끌려 좀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사람이다. 난 이웃 사촌 광진이 오빠가 좋다. 이번엔 길을 건너 반대편의 반대쪽으로 집을 향해 걷는다.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있고 지나쳐 가는 음식점들 안에서는 단란한 가족들이 식사를 한다. 어제 걷던 그 가로수 밑을 지나며 우리는 또 뭐가 그리 신났는지 재잘대며 걷는다.
산책을 좋아한다. 매일매일 그 시간을 기다린다. 매번 동선도 다르고 들르는 가게도 필요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좋아하는 가게와 주인과 골목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여행 얘기를 주로 하는 여행길이 있고, 가로등 불빛이 예뻐 들어서기만 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가로등길이 있다. 기분이 내키면 자전거를 타고 고수부지에 간다. 씽씽 바람을 가르며 잘도 달린다. 시원하고 여유롭다. 세상의 아무리 좋은 여행지에서도 얻을 수 없는 ‘동네’의 마력이다. 눈인사를 거르지 않는 떡볶이집 아주머니, 혼자 가면 ‘왜 혼자 왔어요?’ 하며 안부를 묻는 일본 식료품 가게의 아가씨, ‘없으면 다음에 줘’하시며 선심을 쓰시는 담배가게 아저씨.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따뜻하다.

월요일도 화요일도 봄에도 겨울에도 해가 진 무렵에도 비둘기를 안은 아이같이 행복해!

‘좋아하는 것’이라는 녀석은 꽤 결정적인 순간에 맹활약을 펼쳐준다. 심지어 인격과는 별개로 기능해 나도 모르는 의외의 면에 순식간에 두 배로 반해버릴 때도 있다. 상대에게 다가가기 2% 부족할 땐 ‘뭘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 배려를 할 때도 마음을 터놓을 때도 두 번 다시 안 보리라 마음먹을 때도 이 ‘좋아하는 것’의 역할은 분명하다. 자기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매일이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 위로받고 싶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라는 뜬금없는 자문을 해볼 때면, 노트를 펼치고 좋아하는 색의 색연필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을 쓴다. 청바지, 운동화, 야구모자, 와플, 구릿 빛 피부,, 스쿠터, 오리털 이불, 공상, 첫눈, 새비누, 고무 장갑 등등. 순서도 두서도 없다. 이미 마음보단 손이 먼저 간다. ‘음, 오늘은 기분도 그런데 노란색 비누를 하나 사야겠어.’ 좋아하는 옷을 입고 좋아하는 가게로 향한다. 조금은 돌아가더라도 좋아하는 길을 택한다. 가다보니 슈크림 가게가 새로 생겨서 들어가 본다. 분위기도 주인 아주머니도 맛도 인상에 남는다. 색연필 명단에 새 식구 하나가 늘었다. 좋아하는 것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준다. 작고 사소한 것이었는데 어마어마한 사연이 되고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 인생이 참 쫀득쫀득하게만 느껴진다. 어둠이 거리에 내릴 무렵 방구와 자전거를 타고 한강으로 달려나간다. 내일 먹을 반차거리가 적힌 메모는 빼놓지 않는다. 귀에는 나와 이름이 같은 이상은의 노래가 들려온다.
‘... 점심을 함께 먹어야지. 새로 연 그 가게에 새 샴푸를 사러 가야지. 아침 하늘빛에 민트향이면 어떨까. 난 다시 꿈을 꾸게 되었어.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 나의 초라한 마음을 받아 준 순간부터. 월요일도 화요일도 봄에도 겨울에도 해가 진 무렵에도 비둘기를 안은 아이같이 행복해...’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다. 빼놓을 수 없는 계절 식품인 붕어빵의 계절이 온다. 작년의 그 붕어빵 아저씨가 올해도 또 오시겠지. 어김없이 매일 밤 두 마리씩 사 먹어야겠다. 혹시 또 알까? 머리와 꼬리를 나눠먹을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될지... 아 참, 난 유부녀였지!



역시 혈님의 소울메이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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