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을 가장 많이 자행한 국가
1위 - 북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 = 당시 명칭 월맹. 현 베트남 정부 : 13만1천명~30만명
2위 - 남베트남 = 당시 명칭 월남. : 5만7천명~ 28만4천명.
3위 - 미군 : 4000~1만명
4위 - 한국군 : 3000명.
"이러한 현재적 상황에 대한 다층적인 접근과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 보다 먼저 베트남전쟁에 관한 지배적 시각과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으로 부터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베트남전쟁사를 해석하는 외부자적 관점에 치우치거나 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외세의 역할’을 전쟁사의 중심 혹은 인과론적 관점에서 절대화하는 베트남의 공식사 (official historiography) 적 관점으로부터도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정치사적 관점에서는 정치적 인과관계에만 집중해, 아시아의 냉전 경험을 냉전체제의 두 중심축인 미국과 구소련 혹은 중국의 ‘대리전 (proxy war) ’의 성격으로 파악하는 설명방식이 있다. 그러나 외인 ( 外因 ) 을 중심으로 전쟁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은 일면적일 뿐만 아니라, 냉전체제 자체를 구조적으로 일반 화하는 서구 중심적 시각에 가깝다.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에 대한 구소련과 중국, 북한 등의 지원 그리고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 호주, 한국 등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국제전의 성격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기간 동안, “누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가?”라는 상대적 가해와 피해의 윤리에 기초한 질문을 던졌을 때, 내전의 구체적 양상을 무시하는 것이 매우 협소한 관점이라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전투는 점차 포위공격전으로 변했고, 월맹군은 오래된 성채들과 도시 서쪽의 끝으로 몰렸다. 미군과 베트남군은 세 방향에서 월맹군을 압박했다. 포격과 공중폭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월맹군이 숨은 성채들은 견고한 건축물들이었고 월맹 지휘부는 그곳을 ‘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월맹군들은 가옥과 가옥을, 블록과 블록을 이어가면서 후퇴하고 있었다. 전투는 점차 느려지고 값비싸졌다.
성채는 지하에 공간이 잘 구축되어 있었고, 미군 해병대와 베트남군은 1미터씩, 1미터씩 전진하는 판이었다. 1968년 2월 24일 아침, 남베트남 1사단 병사들이 외벽에 24일간 걸려 있던 월맹깃발을 뽑아버렸다. 월맹군은 전투에서 졌다. 도시에서는 산발적인 소규모 전투만이 이어졌고 점차 도시 외곽으로 후퇴했다. 2,500명의 월맹군이 전사했고, 또한 다른 2,500 명 정도가 나중에 후에를 떠나 미군에게 추적당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 미군은 총 357명이 전사했다.
이 혼돈의 전투 속에서, 남베트남 정부의 민간인에 대한 첫 번째 조치는 ‘긴급 구원’이라는 것이었다. 음식, 유행병의 예방, 긴급 의무 지원 등등. 그렇게 민간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후에에서 민간인 희생자의 통계를 조사했다.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민간인은 1,900명으로 조사되었으나, 비공개적으로는 5,800 명 정도를 추산했다.
공산주의자에 의한 첫 번째 학살 희생자들은 지아 호이 고등학교 마당에서 2월 26일 170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다음 몇 달 동은 18개의 단체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탕 쾅 투 파고다 근처에서 67구가 발견되었고, 바이 다우 77구, 초 통 지역에서 약 100구, 황실묘지에서 201구, 티엔 함에서 약 200구, 동 지에서 약 100구, 총 해서 약 1,200 명의 사체가 바삐 암매장된 채로 발견되었다.
이들 사체 중 반수는 매우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손이 등 쪽으로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사체들은 상처 없이 비틀려 있었다. 생매장된 것이다. 생매장 되면서 분대 규모의 군인들이 사격을 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체에 총 600개의 총구멍이 발견되었다.
두 번째 피해그룹들이 1969년 첫 7개월 동안 여러 군데서 다시 발견되었다. 남지나해 부근의 모래 둔덕에서는 매장도 되지 않은 800구 정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둔덕에 땅을 사망자들이 파게 한 뒤에 10-20명 씩 한 줄로 세운 뒤에 기관단총으로 살해되었다. (나중에 이곳에서 나온 러시아제 기관총의 탄피가 인기 있는 기념품으로 팔렸다) 3-4명 씩 죽여서 불태워 신분을 알 수 없는 사체도 많았다.
남 호아(Nam Hoa) 지역에서 세 번째 학살 증거가 나타났다. 다 마이 강안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푸 캄 죽음의 행진’이라는 명칭으로 불렸고 1969년 9월에 발견되었다. 3명의 공산주의자 망명자들은 미 101공수사단 여단 정보장교에게 다 마이 강가에서 수 백 명의 민간인을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다 마이 강변은 후에에서 남쪽으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그들은 그 학살이 1968년 2월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지역은 매우 거칠고 사람이 살지 않는 사실상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곳이다. 이 증언에 따라서 101사단의 여단이 그곳을 수색했고, 많은 사람들의 뼈가 발견되었다.
이 파편 같은 정보의 조각들은 다 마이 강가의 학살의 의미를 조합하게 해 주었다. 1968년 테트 공세의 15일째, 후에의 일부인 푸 캄 소도시에는 로마 카톨릭교를 믿는 4만 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를 피하고자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는 카톨릭 신자들이 오히려 아니었다. 공산당 정치위원이 이 성당에 도착했고, 400 명 정도의 민간인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 정치위원은 ‘해방지구’로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3일간의 재교육을 시킨 뒤에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약 15킬로미터 정도를 걸어서 공산주의자들의 본부가 있는 후에의 파고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때 20 명 정도의 사람이 이름이 불려서 그룹에서 이탈했다. 그들은 파고다가 있는 안뜰에 집합되었고 모두 월맹군에게 살해되고 불태워진 뒤에 암매장되었다.
이들이 처형되고 나서 나머지 민간인들은 강을 따라서 계속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역 베트콩부대에 인계되었다. 그 당시 그들을 인계한 정치위원은 아마도 재교육을 시킨 뒤에 민간인들을 돌려보낼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계가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들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많은 인원으로 인해서 며칠간 일대는 많은 도망친 민간인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이때 지역 베트콩들은 증거를 없애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결국 민간인들은 강변의 6킬로미터에 걸쳐 총에 맞거나 도륙된 뒤에 흐르는 물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들은 일대에 끌려온 사람들을 찾는 대로 모두 학살했다.
101사단의 여단은 그곳으로 향하면서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었고 강변에 도착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강변의 수풀은 엄청나게 두터웠다. 나무와 풀들이 두개의 층으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나무들의 가지는 높이 뻗어 있었다. 그 아래쪽은 거의 대낮에서 어둠에 가까웠다.
여단 공병은 길을 내기 위하여 그 두터운 수풀에 다이너마이트로 뚫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그리고 헬기의 랜딩존도 만들어야 했다. 사체들이 발견되면 헬기로 운구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매장 없이도 사체를 감추기에 매우 쉬운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수백 미터의 협곡이 있었고, 그 안에 수많은 해골들과 인간의 뼈들이 나왔다. 그들은 그냥 지상에 버려져 있었다. (동양인들은 사람이 매장되지 않고 지상에 방치될 경우 영원히 지상에 외롭게 남는다고 생각한다) 이후 20개월이 지나자 시체들은 점차 햐얗게 뼈로 변해갔다.
다 마이 강가에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총 428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혁명의 반역자’라고 규정했다. 이들 428 명 중에 군인은 25% 정도였고 두 명의 장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하사관과 사병이었다. 다른 25%는 학생들이었고, 나머지 50%는 마을사람, 마을 서기, 고용인,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관청 공무원 등이었다.
네 번째 학살의 증거들이 다시 나타났다. 푸 투 지역의 소금밭에서 1969년 12월 발견된 것이다. 이는 루옹 비엔이라는 어촌 지역으로, 후에에서 동쪽 1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이 또한 매우 황폐한 지역이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1968년 연초부터 이 지역의 베트콩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강한 노력을 들였던 지역이다.
이 루옹 비엔의 인구는 약 700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 지역은 지역 베트콩의 보복이 20개월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이 거의 다 청소되자 주민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학살당한 사람은 적어도 300명, 그리고 최대 1천명으로 추산되었다. 사람들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았다. 후에의 공무원들이 조사를 벌였으나 정확하지가 않았다. 그들은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실종중인 상태로 조사를 끝냈다.
후에 전투 후에, 남베트남 정부는 민간이 부상자만 7,600 명을 추산했고, 이들 중 1,900명은 전투행위 중간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전투행위 중간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5,700명으로 추산했고, 첫 번째 밝혀진 민간인 학살 사체의 수는 4,756구였다. 두 번째 발견된 학살에서 모래 둔덕 학살을 합하여 3,583구, 세 번째 밝혀진 학살에서는 다 마이 강변을 포함 2,774구, 네 번째 밝혀진 학살에서는 총 2,356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룹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민간인 사망자가 2천 구 정도 더 발견되었다."
이처럼. 한국측이 지속적으로 진상 규명에 협조하고, 책임질건 책임지고 사과하겠다고 해도, 베트남측이 응하지 않는 이유가 이거임.
죽은 사람이 진짜 양민인지. 양민이 맞다고 하더라도 죽인 사람이 한국 군인인지 아무도 알수 없고. 현 베트남 측 군인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음.
진보측이 약팔던거랑 다르게, 당시 북베트남이나 남측의 베트콩(현 베트남 정부의 전신)이 전쟁하는 수준은 탈레반이나 IS 나 할 짓 좀 많이 했음.
미성년자들에게 수류탄 쥐어주고 테러하라고 하고. 자기들에게 협조적이지 않다고 민간인들 대량 학살해서 겁줬음. 이건 전쟁범죄 아님?
피해자 있는데? 민간인 대량학살은 모두 한국인 책임인데? 외인정앟해? 라고 수백플을 달리는게 몇년째 반복되고 있음.
한겨레가 이런 맥락 제외하고 사기치려다가, 씨알도 안먹힌 적이 있음.
베트남전에서 한국군 전투원에게 죽은 무고한 양민이 있을 지는 모르겠는데. 그걸 밝히는건 법적으로 불가능함.
애초에 사실관계 자체를 밝히는게 현 상황에서 불가능함.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공정한 재판의 전제 조건이 보장되지 않는데. 그걸 왜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해?
베트남 정부측이 `한국군이 저질렀다는 학살에 대한 모든 자료 제공과 조사를 보장`하고, 국제 조사단의 참관 하에 가능하게 해준다면
재판 당연히 하고. 밝힐거 밝히고, 사과할 거 해야지. 한국은 당연히 해야함.
... 근데 위에 읽어보면 그게 되겠냐고.
이런 상황모르면서 `우리나라가 사과안하면 위안부 부정하는 일본이랑 같애 웅애웅~`하는 애들은 진짜 순진해보임."
선동에 놀아나지좀 말자. 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하고 있고.
합리적인 조건이 갖춰지면 할거임. 그 조건을 요구하는데 관심이 없으면 그냥 국까나 머릿속이 꽃밭인 자기 만족주의자지..
추가 : 다른 덬들의 의견
"베트남 정부랑 우리나라 정부랑 애초에 입장도 다르고 상황도 다름 일본의 '국가'정책 하에 이뤄진 전쟁범죄에 우리나라 '정부'가 항의하는 상황에 대해서, 파병된 한국'군'도 베트남전에서 학살하고 강간했으니 일본한테 사과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애들이 많으니까 이런 글도 올라오는 거지 한국군이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하는 게 아님"
"한국 정부에게 사과 바라는 베트남 << 이거 일본 넷우익이 퍼뜨리는 거임 한국도 베트남전쟁 때 민간인 학살하고 피해 보상 안 하는 나라니까 선량한 피해 국가는 아니다 라는 식으로 몰아서 한국 이미지 저하랑 위안부 문제 거론 못 하게 막으려고 하는 거...나중에 위안부 문제나 쪽발이 군대의 민간인 학살 이야기 하면 이 이야기 하면서 한국도 월남전에서 웅앵웅 했잖아 하고 도찐개찐이라고 물고 늘어지려고 밑작업 하는 거임...우리는 대통령이 사과 의사 표시한 적 있는데 베트남이 승전국은 자기들이었다면서 안 받았음 사실 제일 많이 민간인 학살한 게 베트남 공산군이어서 민간인 피해 자체를 언급 안 하고 싶어해서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뭔가 할 수 없는 상태라서 사정이 달라"
":베트남전은 내전에 공산주의 민주주의 진영까지 참전한 한국전쟁하고 비슷한 거야 우리는 반으로 갈라졌지만 베트남은 공산주의 진영이 승리해서 통일된 거 전쟁 끝나고 잘잘못 일일이 따지면 당연히 내분이 있을 수 밖에 없잖아 특히 베트남전은 베트콩하고 민간인이 뒤섞여서 구별하기도 힘들 정도로 게릴라전이 심했던 게 팩트라 베트콩으로 오인당해 죽은 민간인이 엄청 많았어 근데 진상규명해보니 현정부 세력이 무고한 내 가족 내 마을 사람들 학살한 거 밝혀지면 누가 좋아하겠냐고 무엇보다 한국은 미국 우방으로 참가한 국가일 뿐인데 미국이 뭘 안하는 이상 우리가 더 나서는 것도 한계가 있지 그러니 묻어둘 수 밖에"
추가) 일본 만화 <대사 각하의 요리사>중 주 베트남 일본 대사관의 요리사가 겪는 에피소드중.
`한국의 베트남 양민학살`을 밝히려는 일본의 기자 관련 에피소드.
첫번째 짤이 일본인 기자.
두,세번쨰 짤에서 일본인 기자와 이야기하는 일본인 외교관.
네번쨰짤은 일본인 기자가 `정의롭게 질책`하는 한국인 외교관.
90년대 일본 만화에서 이럴정도면, 왜 일본애들이 사진 날조까지 해가면서 집요하게 저러는지 대충 이해가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