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extmovie.com/bestboard/56141167
조금만 뒤져보면 금방 나오는, 의외로 여기엔 올라와있지 않던 비하인드를 새삼 가져와 보았습니다.
팬카페 중웹 인터뷰 등에 적힌 내용을 끌어모아 영화에 관련된 부분만, 대화체로 일부 각색하였습니다.
오래되어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섞여 있을 수 있는 점 고려하여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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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화 (연지구, 패왕별희 원작자)
나는 애초 패왕별희를 쓸 때 그를 생각하면서 데이의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연지구도 그를 모델로 썼고 캐스팅 때에도 장국영이 남주를 해주길 바라서 직접 만나러 가기도 했습니다.)
패왕별희의 영화화가 결정된 후 대륙배우 캐스팅이 1순위였기 때문에 데이 역에 '마지막 황제' 존론이 유력해졌습니다. 다만 그가 결국 스케줄 문제로 참여할 수 없게 되자 영화화 작업 초창기부터 나를 포함해 제작사들이 여러차례 시나리오를 부치며 러브콜을 보냈던 장국영으로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첸카이거가 감독을 맡게 된다는 소식을 접한 그가 출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는 이전 감독의 데뷔작인 '황토지'를 인상깊게 보았다고 인터뷰로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첸카이거 (각본/감독)
그가 있던 홍콩으로 건너가 첫 대면을 하였습니다. 내가 패왕별희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그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그림처럼 앉아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경청하였습니다.
얘기를 끝마치고 나서 "청데이를 맡아준다니 참 기쁩니다" 라고 말하긴 했지만 실은 속으로 확신이 없었습니다. 대륙 출신이 아닌 광동어를 쓰는 홍콩 사람인데다 경극 경험도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솔직히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그런 내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전 청데이 역에 적격이에요. 예술계에 쭉 몸 담아오기도 했고 제 안엔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고 있거든요. 제 자신이 바로 청데이나 다름 없어요."
저는 무심코 웃어버렸습니다.
(그는 이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진정한 예술가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었습니다. 레슬리라는 영문 이름또한 중성적인 느낌이 마음에 들어서 지었다고도 했죠.)
그랬던 제가 한 대 얻어맞은 것 마냥 충격을 받은 장면이 있습니다. 이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원대인의 집을 방문한 데이가 보검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검을 찾아들고서 인력거를 타고 돌어오던 길 일본군에게 둘러싸이게 되는데요, 이 장면을 찍기 위해 잠시 인력거에 탄 그를 방치한 채로 촬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력거의 덮개를 들추었는데, 순간 가슴에 쿵- 하는 느낌이 들더랬습니다.
입가에 번진 연지자국이 꼭 핏자국 같았습니다. 그의 눈빛에 담긴 순간의 절망과 비애에 압도되어 저를 포함해 거기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오싹해진 기억입니다.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고- 데이가 우는 씬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장국영은 너무 몰입하여 촬영이 끝난 후에도 울었습니다.
나는 모두에게 조명을 끄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가 어두운 곳에서 혼자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때 비로소 첫 만남의 "저는 청데이예요" 라고 말했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인물에게 투사해 새로운 경지를 창조해내는 배우였습니다.
그의 눈빛이 바로 사랑과 시대의 반역이라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 그 자체가 되어주리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송소천 (경극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에게 저를 소개시켜준 사람이 바로 패왕별희의 원작자인 이벽화입니다.
실제로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가 너무나 유명한 스타여서 거만하거나 까다로울까봐 걱정했습니다. 이벽화는 그처럼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직접 만나보니 모든 염려가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만난 그 날 우리는 바로 친해졌습니다. 네 살이 어렸던 저는 촬영기간 내내 숙소인 호텔 스위트룸 거실에 묵으며 어시스턴트 역(전화 팩스 잡무)까지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촬영시작 두 달 전부터 북경으로 건너와 경극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학습능력은 대단했습니다. 프로 배우들도 반 년이나 걸려 겨우 습득하는 동작들을 열흘만에 완벽에 가깝게 해내어서 모두를 놀래켰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놀라워하면 그는 기뻐하며 "몰랐어? 내가 전생에 경극 배우였잖아" 하며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데이의 가발과 머리장식은 굉장히 무거워서 매일 7~8시간 동안 그걸 쓰고 있으면 프로 경극 배우들조차도 굉장히 고통스러워질 정도였습니다.
감독도 장국영에게 휴식시간에는 가발을 벗고 있으라고 권했는데, 감을 유지하고 싶은 그는 휴식시간에도 내내 무거운 그것을 쓰고 있길 고집했습니다.
숙소를 함께 쓰는 동안 몇 번쯤 트러블이 있기도 했습니다. 평소엔 상냥하고 친절하다가도 문득문득 예민해지는 그를 잘못 건드렸다가 한바탕 싸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내다보니 그가 예민해지는 날의 패턴을 자연스럽게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슬픈 장면의 촬영이 예정되어 있을 때 예민하고 우울해졌던 것입니다.
가슴 아픈 촬영을 앞둔 그는 전날부터 우울해하며 그러한 감정에 빠져 있었는데, 그럴 땐 그냥 아무 말도 걸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혼자 우울해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나서부터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더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패왕별희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던 날, 그가 제게 전화를 걸어 주었습니다.
"소천아 다 네 덕분이다, 네 메이크업이 없었다면 데이가 그토록 예쁠 수 없었을거야." 라고 해서, 나는 "아니, 꺼거(중국어로 형, 오빠/ 장국영의 애칭)의 아름다운 본판이 없었으면 나도 그런 고운 화장을 할 수 없었을거야" 라고 대답해줬습니다.
모든 일정이 끝난 후 홍콩으로 돌아간 그는 경극 사부님들과 나를 홍콩으로 초대해 극진히 대접해주기도 했습니다.
영화판 일이라는 게 보통 작품이 끝나면 함께 끝나는 관계가 대부분인 걸로 알아서 그의 행동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장국영같은 대스타가 이렇게까지 대접해주는 이유가 뭘까?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말했습니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야, 네가 나한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제대로 보답하고 싶으니까."
이후로도 그렇게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제게 전화를 걸어와 경극 사부님들과 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분장을 맡은 경극을 보러 북경까지 와주기도 했습니다.
그가 객석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공연장 안에 있던 절반 이상의 사람이 모두 그를 향해 쇄도하는 바람에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더랬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그가 제게 말했습니다. “소천아 너는 절대 이 일을 그만두지 마라. 넌 이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같아.”
그의 그 말에 저는 무척이나 감동했습니다.
그는 타인에 대한 이해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자신은 늘 사랑에 굶주려 있는 듯하다고 종종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타인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달하고자 더욱 노력하는 듯했습니다.
매번 제게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소천아 잘 지내니? 부모님은 어떠시고, 장선생님과 사선생님(장국영의 경극 사부들)은 별 일 없으셔?” 이렇게 주변 사람들의 안부까지 빼놓지 않고 물어오곤 했습니다.
언젠가 그에게 사선생님이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전하자 그는 곧장 뵈러 가봐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선생님 댁에 병문안을 간 날, 평생 장군 역할만 해온 강인한 선생님이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장만령 張曼玲 (중국 경극원의 최고 실력자이자, 장국영의 경극 스승)
남편 사연생과 나는 1993년 패왕별희 촬영 때 장국영을 처음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의 경극 지도 교사였습니다.
첫째 날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도착하여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이 너무 붉어서 남편이 “당신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갛소?” 하고 물었더니 그는 “괜찮습니다, 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래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8.9도의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에 아랑곳 않고 오로지 그는 곧장 레슨을 시작하고 싶어할 따름이더랬습니다.
그는 비록 이전에 경극을 배운 경험이 없었지만 이해력이 우리의 기대를 초월해서 유례가 드문 발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정말로, 재능이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매일 4시간씩 레슨을 했는데 호텔방으로 돌아가서도 연습을 계속 했던 걸로 압니다. 모두 함께 밥을 먹을 때조차도 계속해서 경극 동작만을 떠올리며 반복했습니다.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나 제게 쪼르르 달려와 바로 “선생님 이렇게 움직이는 게 맞나요?” 라고 속삭여 묻곤 했습니다.
연습을 하고 있을 때의 그는 꼭 순진한 어린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칭찬을 하면 뛸듯이 기뻐했거든요. 제대로 못하면 바로 지적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오늘은 잘 못하고 있지만 내일은 꼭 제대로 해보일 겁니다.” 그렇게 그는 정말로 다음 날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내 앞에서 동작을 소화해내곤 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예술 행위에 진지했습니다.
우희를 연기해내기 위해 평소에도 우희의 걸음으로 걸어다닐 정도로 오롯이 역할에 몰두하여 지냈습니다.
평생을 경극에 몸 담아온 나조차 지금까지 그처럼 예술에 헌신적인 인물을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스타였고 몹시 바빴기 때문에 저희는 자주 만날 수 없었지만 북경에 방문할 일이 생길 때마다 집으로 무조건 찾아와 주곤 했습니다.
시간이 없을 때는 짧은 인사만이라도 전하고 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맛있는 음식을 잔뜩 싸와 우리에게 대접해 주기도 했지요.
매년 명절엔 잊지 않고 안부 전화를 걸어 주었습니다.
남편과 제 앞에서 그는 아까도 말했지만 늘 천진한 어린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리 집에 오면 항상 무릎을 안고서 바닥에 편히 앉아 허물없이 수다를 떨곤 했습니다. 그가 온다고 하면 저는 항상 당근 쿠키를 구웠는데요, 그가 그걸 맛있게 먹어줬기 때문입니다.
97년, 그가 홍콩에서 콘서트를 할 때 우리 가족을 모두 자기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대접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 호텔까지 따라와주어 우리가 호텔방에 무사히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안녕히 주무세요~” 하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더랬습니다.
업무 상의 교제라고 해봐야 기껏 한 달 남짓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저 경극에 종사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에 불과했고 제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르치는 일 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허나 그는 그런 우리에게 다른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은 채로 변함없이 무한한 우정과 존경만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제가 결코 잊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98년에 남편이 암인 걸 알았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가 우리를 만나러 곧장 북경으로 날아와 주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집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그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남편을 끌어안고 "사부님" 이라고 외쳤습니다.
내 남편은 참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제 앞에서조차 눈물을 보이는 일이 없거든요, 그런데 그가 자길 끌어안자마자, 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도 따라 붉게 충혈이 되었는데 남편을 위해서 억지로 눈물을 참는 듯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엇도 먹지 못하고 지내던 남편을 자상하게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드셔야 해요. 많이 잡수셔야 좋아지죠!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제가 가서 사올게요.”
작은 의자에 앉아 남편의 손을 잡은 채로 이런 말들을 건네며 하루 종일 곁을 지켜주기도 했습니다.
지금 그 두 사람은 모두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나는 마음 속으로 종종 생각합니다.
“여보, 모쪼록 그 애가 외롭지 않도록 당신이, 잘 좀 지켜 주세요... ”
뢰한(레이한) (패왕별희에서 데이가 줏어온 고아 성인 역)
패왕별희를 찍을 당시 장국영은 출연진들 가운데서도 압도적으로 거물급 스타였습니다. 다만 제 기억 속에서 그처럼 철저한 프로 의식을 가진 배우를 본 일이 없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무대 위에서 우희를 연기하는 장면이었는데요, 몇 번의 테이크 끝에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연기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분은 더 찍길 원했고 결국 서른 몇 번의 도전을 하고 나서야 겨우 연기에 만족하여 무대에서 내려왔더랬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촬영 중 배우들이 대사를 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었는데요, 반면 그의 대본 준비는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광동어를 모국어로 쓰는 그가 모든 대사를 북경어로 해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음에도 카메라 앞에서 대사 하나 토시 하나 틀리는 걸 본 일이 없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요구가 감독들의 기준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특히 기억이 남아있는 장면은 극중에서 양자인 저 샤오쓰가 데이에게 각자의 길을 가자고 악을 쓰며 떠나는 씬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비교적 부드러운 성격으로 얘가 왜 그렇게까지 데이한테 해야만 하는지 인물의 굴절된 심리를 미처 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표현을 해내지 못했고 결국 몇 번의 NG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식은 땀이 줄줄 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 장국영이 제게로 다가와 위로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사실은 나도 꽤 부드러운 사람이야. 근데 말야, 이 장면에선 감정을 어떻게든 폭발시켜야만 해.” 그렇게 그는 제 대사를 읊으며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그의 도움을 참고하여 무사히 그 씬의 촬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 맞다 그리고 사부인 그가 저를 총채로 때리는 씬이 있었는데요,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달려와선 아프지 않냐며 걱정해주었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촬영이 끝난 후 휴식시간이 되면 그는 항상 촬영장 주변에 몰려든 팬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마침 그와 대화를 하고 있던 저와 조연 배우들은 인파에 뒤로 밀려 물러설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러면 그는 어린 여학생 팬들에게 우리를 소개하면서 말하곤 했습니다. “너희들은 이 배우들한테 더 관심을 가져야 돼. 난 홍콩에서 왔지만, 이 친구들은 너희 나라의 훌륭한 배우들이잖아.”
정말 매일같이 팬들이 찾아와서 장국영에게 사인과 기념 촬영을 하자고 조르는 통에 그는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사진이나 사인을 거부하는 걸 본 일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숫기 없는 팬들 몇 명이 찾아와선 차마 그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촬영장 주변만 배회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가 먼저 그녀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며 사인과 기념 촬영까지 해주더랬습니다.
당시 본토의 배우들은 촬영소의 숙소에 묵고 장국영은 호텔에 묵었는데, 그는 종종 밤에 야식을 사들고서 촬영장 숙소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모두를 좋은 음식점으로 데려가 밥을 쏘기도 했습니다.
매번 얻어 먹기가 그래서 우리가 돈을 모아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그분이 정색하며 계산서를 뺏더니 재빠르게 카운터로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단역을 맡았던 촬영장에서 딱 한번 밖에 마주친 적 없는 배우조차도 그는 모두 기억하고 챙겨주었습니다.
98년 홍보를 위해 청도에 방문했던 때엔 나와 몇 명의 배우들에게 전화로 식사 초대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2000년 상하이에서 그가 콘서트를 할 때도 패왕별희에 출연했던 본토의 배우들 모두를 콘서트에 불러 주었습니다.
제가 만난 장국영은 조금도 우울하거나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매사 너무나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다니, 저는 감히 이유를 함부로 추측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정말 너무나 힘들었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던 무엇인가가 있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볼 따름입니다.
영달(잉다) (패왕별희에서 극장주 역)
흔히 알려진 것처럼 장국영은 매우 섬세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신출내기여서 대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로 한창 들떠 있었는데 그런 제게 그는 많은 조언을 해줬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나 사장의 캐릭터에 맞춰 생각해낸 습관 중 하나가 오른 손으로 옆머리(구레나룻, 수염)를 만지는 것이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의논하니 그는 제 아이디어를 칭찬해주며 한 가지 조언을 덧붙였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영달 배우분이 그보다 4살 어림) 하지만 그걸 너무 자주 하면 관객들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캐릭터를 되려 망칠 수 있으니 관객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만 가끔 하는 게 좋을 듯하네.” 저는 그의 의견에 공감했고 조언을 따랐습니다.
흔히 그를 부드럽고 유약한 이미지로만 기억하시곤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로 그는 강철처럼 강한 남자였습니다.
패왕별희 때 헤어를 담당했던 여성이 있습니다. 중국 경극원의 여배우였는데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처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녀의 남편도 경극배우였고 마찬가지로 영화의 촬영 스탭으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촬영 내내 장국영은 이 사실을 꼭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게 촬영이 끝난 후 쫑파티가 열리던 날 모두 흥겹게 술을 마시고 있던 차, 문득 테이블을 두드리며 자리를 박치고 일어난 그가 그녀의 남편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너, 앞으로 한번만 더 얠 때리면 내가 가만히 안 둘거다! 홍콩에서 날아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놈을 아작 낼거야, 다신 얘 때리지마!”
흥겹던 술자리가 일순 차게 얼어 붙었습니다. 매서운 그의 눈빛과 고함소리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식겁하였습니다.
엄밀히 말해 장국영은 그날 혼자였고 경극원의 배우였던 남편의 친구들은 수두룩했습니다. 거기다 전원 평생 무술을 익혀온 배우들이었죠. 그러니 이 자리에서 싸움이라도 났다면 절대적으로 그가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랑곳 않고 일어나서,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속으로만 쭉 하고 싶었던 그 말을 남편에게 던진 겁니다.
그제야 우리도 남편에게 “야, 모처럼 형님께서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너가 잘못한 거야" 라며 설득하기 시작했고 결국 수긍할 수 밖에 없도록 상황을 몰았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부부 싸움을 하지 않게 된 걸로 압니다. 그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일도 없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이벽화 (연지구, 패왕별희 원작자)
2002년 2월 22일 홍콩 중문대에서 합동 세미나가 열렸는데, 그 중 “이벽화의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연구”라는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교수들이 장국영에게 세미나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는 고맙게도 기꺼이 승낙해 주었습니다.
이날 세미나 현장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다른 학부의 교수들까지 몰려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세계적인 스타가 참석한 순간이었지만 장국영은 이곳이 학교였기 때문에 녹음과 녹화를 하지 않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세미나가 진행되길 원해했습니다.
그렇게 이날은 확연히 매혹적인 하루였습니다. 과거에도 연예인이 대학으로 와서 강연한 일쯤 종종 있어왔지만 장국영처럼 유창하고 유머러스한 강연을 한 사람을 나는 본 일이 없습니다. 강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사진 촬영도 수다도 잊은 채 오로지 침묵 속에서 그의 말에 집중하며 받아 적느라 여념이 없었던 기억입니다.
그날 장국영은 우희와 데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사 속 우희는 강력한 욕망의 소유자로 패왕의 앞에서 죽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했습니다. 비록 <패왕별희>의 원작 소설에서는 데이가 죽지 않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며 데이가 결국 자살하리란 걸 직감했습니다. 왜냐하면 데이는,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예술을 추구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름다운 우상인 채로 자기 삶을 끝내려 했을 거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러한 깊이 있는 그의 해석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흔히 인생은 바람, 서리, 눈비에 비유되곤 합니다. 소년도 언젠가는 늙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사람의 머리에도 흰 가닥이 돋기 마련입니다.
허나 그는 결코 백발이 되지 않을 것이고 늙지 않을 것이며 언제까지나 전설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남을 겁니다.
다만 그렇게 나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12도련님과 청데이가. 떠나버렸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에게 약속한 시나리오 한 편을 전하지 못한 채입니다.
레슬리, 5월 1일 당신에게 주기로 한 시나리오는 이제 대체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그는 언제나 진지한 태도로 모든 일에 임해왔고 약속에 정확했으며 늘 한결같이 연장자와 연소자를 공경하고 존중하였습니다.
감성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예술가였습니다. 완벽을 추구해나가던 장인이었습니다.
나는 같은 시대를 성장해 온 30~40대의 사람들이 스타 장국영을 숭배하는 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가감없이 그를 알고 언제까지고 기억해 나가주기를 바랍니다.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배워나가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절실한 그리움에서 이 긴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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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더욱 자세한 내용은
구글에서 패왕별희 비하인드라고 치면 다양한 버전으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UEjkxOb5N0
当爱已成往事 (国) (电影 霸王别姬 主题曲)
사랑은 옛 일이 되어 –영화 <패왕별희>주제가
往事不要再提 人生已多风雨
과거는 다시 꺼내지 마오
이미 충분히 굴곡진 인생
纵然记忆抹不去 爱与恨都还在心里
기억을 지울 수가 없소
사랑과 미움은 여전히 맘 속에 남아있으니
真的要断了过去 让明天好好继续
정말 과거를 잘라내고 싶거들랑
내일을 충실하게 이어가오
你就不要再苦苦追问我的消息*
힘겹게 내 소식 따위 다시 찾지 마오
爱情它是个难题 让人目眩神迷
사랑은 어려운 숙제라오
아찔하고 어지럽게 만드는
忘了痛或许可以 忘了你却太不容易
아픔은 잊을 수 있으련만
그대 잊는 건 참 힘드오
你不曾真的离去 你始终在我心里
그대는 진정 떠나간 게 아니오
언제고 내 맘 속에 있으니
我对你仍有爱意 我对自己无能为力
여전히 그대를 사랑하는
난 내 자신에겐 무기력하다오
*因为我仍有梦 依然将你放在我心中
여전히 꿈꾸고 있기 때문이오
그대 여전히 날 맘에 두고 있으리란
总是容易被往事打动 总是为了你心痛
항상 옛 일에 쉽게 울컥하곤 하오
항상 그대 때문에 마음이 아프오
别流连岁月中 我无意的柔情万种
지난 세월 내 무심결에 비친
약한 모습에 연연하지 마오
不要问我是否再相逢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묻지 마오
不要管我是否言不由衷*
빈 말 하는 건 아닌지 신경 쓰지 마오
#为何你不懂 只要有爱就有痛
왜 그댄 모르는 거요
사랑엔 아픔이 따르는 것을
有一天你会知道
언젠간 그대도 알게 될 거요
人生没有我并不会不同
내가 없는 삶도 다를 게 없다는 걸
人生已经太匆匆
이미 번다한 인생이오
我好害怕总是泪眼朦胧
결국엔 이 눈물 마를 것이 두렵소
忘了我就没有痛 将往事留在风中#
날 잊으면 아픔도 없다오
옛일은 바람 결에 맡겨두시오
REP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