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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당장 쓸모없는 공부라도 ‘정신 척추의 기립근’ 같은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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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2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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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사람 구별 못하는 백인처럼
지식 얕으면 모든 게 다 비슷비슷

섬세한 언어, 정신 진전시킬 쇄빙선
너무 쉬운 말만 늘어놔선 안 돼

라틴어나 한문, 초서읽기·암벽등반
성심껏 임할 땐 파계승 같은 ‘간지’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나는 왜 배울까

언제부터인가 연구 계획서 쓰는 일을 싫어하게 되었다. 한국의 연구 계획서에는 대개 기대 효과를 쓰는 난이 있다. 거기에 쓸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 연구가 완성되면 이러이러한 효과가 있으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렵거니와, 종사하는 공부 자체가 그러한 효용을 전제하고 있지도 않다. 즉각적인 쓸모를 위해서라면 아마 다른 일을 했으리라. 생계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업으로 삼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고충에 공감할 것이다. 끝내 제출하지 못한 연구 계획서에 썼던 문장이 뭐였더라? 예술가 패티 스미스가 한 말의 변주였던 것 같다.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돈을 더 벌기 위한 공부, 더 유식해 보이기 위한 공부,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공부, 즉각적인 쓸모에 연연하는 공부가 아니라고 해서, 공부의 결과에 대해 어떤 기대도 없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호기심에서 출발한 지식탐구를 통해 어제의 나보다 나아진 나를 체험할 것을 기대한다. 공부를 통해 무지했던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는 재미를 기대한다. 남보다 나아지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어차피 남이 아닌가. 자기 갱신의 체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보고 있다는 감각을 주고, 그 감각을 익힌 사람은 예속된 삶을 거부한다.



와인 맛도 오랜 경험 통해 구별 가능




그래픽=이정권 gaga@joongang.co.kr


지식탐구를 통해 자신의 어떤 부분이 달라지는가? 지식이 깊어지면, 좀 더 섬세한 인식을 하게 된다. 아시아 사람들을 얼마 만나보지 않은 서양인의 눈에는 중국인·한국인·일본인·몽골인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 다 비슷하게들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좀 더 많은 아시아 사람들을 만나본 끝에 인식의 깊이가 깊어지고 나면, 처음보다 더 섬세하게 대상을 구별하게 된다. 음, 한·중·일 사람들이 다 다르게 생겼군. 마찬가지로, 소위 백인을 별로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 백인들이 다 똑같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많은 백인을 만나보고 나면, 명칭만 백인일 뿐, 그들의 피부가 모두 흰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와인도 그렇다고 하지 않은가. 오랜 경험을 통해 와인의 맛을 섬세하게 구별하는 이가 있기에 와인이 세분화될 수 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와인 맛이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와인에 대한 무지를 선언하는 것과도 같다. 잘 모르니까 다 비슷해 보일 뿐, 잘 모르니까 구별이 안 될 뿐.

대상을 섬세하게 판별하게 되는 일이 꼭 축복만은 아니다. 그에 수반하는 저주도 만만치 않다. 안목이 밝고 섬세해져 대상을 보다 선명하게 보게 되면, 그간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도 감각할 수 있게 되지만, 그간 몰랐던 더러움도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시집을 가까이 해보라. 이제 곧 지하철역에 걸린 시들 상당수가 거슬리기 시작할 것이다. 술자리에서 읊어대는 삼행시들 대부분이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시들 자체는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쓸데없이 까다로운 인간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급기야는, 어느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일부러 나쁜 시력을 고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섬세한 구별 없이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 대충 그쪽으로 날아가 봐, 그러다 보면 달에 도착하게 될 거야. 이런 식으로 해서 우주선을 달에 보낼 수는 없다. 방향과 거리를 섬세하게 나누고 계산하여 우주선을 쏘아 올려야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할 수 있다. 과학에만 정교하고 섬세한 구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도, 경험에 합당한 언어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 경험은 사라지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독특한 경험에 맞는 섬세한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포착하지 않는 한, 그 경험은 사라지고, 그만큼 자신의 삶도 망실된다.

섬세함은 사회적 삶에서도 중요하다. 섬세한 언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고 또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훈련을 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이루고 살 수 있다. 거칠게 일반화해도 좋을 만큼 인간의 삶이 단순하지는 않다. 거친 안목과 언어로 상대를 대하다 보면, 상대를 부수거나 난도질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런 식의 거친 공부라면, 편견을 강화해줄 뿐, 편견을 교정해 주지는 않는다.



유용성의 신화 지배하는 21세기지만 …

섬세한 언어야말로 자신의 정신을 진전시킬 정교한 쇄빙선이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싶다면,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 만남에는 섬세한 언어가 필수적이다. 언어라는 쇄빙선을 잘 운용할 수 있다면, 물리적인 의미의 세계는 불변하더라도 자신이 체험하는 우주는 확장할 수 있다. 그 과정 전체에 대해 메타적인 이해마저 더한다면, 그 우주는 입체적으로 변할 것이다. 언어는 이 사회의 혐오 시설이 아니다. 섬세한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공부를 고무하지 않는 사회에서 명철함과 공동체 의식을 갖춘 시민을 기대하는 것은 사막에서 수재민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럴진대, 누군가 어떤 대상을 향해 너무 과도한 일반화를 일삼는다면, 혹은 너무 흐릿한 언어를 동원하고 있다면, 혹은 지식을 떠먹여 준다는 명분하에 너무 쉬운 말만 늘어놓고 있다면, 듣자마자 쉽게 이해가 가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면, 잠깐의 공부를 통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약을 팔고 있다면, 이는 거의 반(反)사회적 행동에 가깝다. 이 공부를 하기만 하면, 혹은 이 책을 읽기만 하면, 당신의 허약한 기력을 보충될 것이며, 정신적 기갈은 멎게 될 것이며, 거친 피부가 윤택하게 될 것이며, 미세먼지로 시달린 심폐는 활력을 찾을 것이며, 무분별한 젊음의 열독을 풀어줄 것입니다…운운. 이 음식을 먹으면 온갖 잡병이 다 낫는다는 식으로 광고하는 식당에 들어가면 얼른 뒤돌아 나와야 하듯이, 이러한 지식의 광고를 보면 빨리 도망쳐야 한다.

세상은 날로 각박해져, 쓸모가 쉽게 증명되지 않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날로 위태로워지는 이즈음에, 공부의 기대효과가 기껏 까다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라니, 정녕 기대할 건 그것뿐이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의도하지 않은 선물이 하나 더 있나니, 공부가 즉각적인 쓸모와 거리가 멀면 멀수록, 묘한 ‘간지’가 난다는 것이다. 당장 쓸모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 것들. 이를테면, 라틴어나 한문 공부, 혹은 초서 읽기나 암벽등반은 어떤가. 현실적으로 무슨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언뜻 불분명한 일들에 성심껏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자기 통제력을 놓지 않은 파계승 같은 ‘간지’가 감돈다.

어떤 신문기자가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에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이 낭가파르밧 설산을 오르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메스너는 대답했다. “그렇게 묻는 당신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의 대답에는 보통 사람이 쉽게 가지기 어려운 어떤 정신의 척추 기립근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 정신의 척추 기립근이야말로 유용성의 신화가 지배하는 21세기에 무용한 공부에 매진하는 이에게 허여된 마지막 기대효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무용해 보이는 대상에 대하여 에로스를 느끼고 열정을 불태우는 일이 갖는 의미를 누구나 다 공감해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청년이 학문 혹은 예술의 한 우물만 파겠다고 포부를 밝힐라치면, 사람들은 뭐, ‘학문 혹은 예술의 한 무덤만 파겠다고’라고 대꾸하기 일쑤다.

이처럼 무용해 보이는 공부가 가진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아마도 그런 공부가 죽기보다 하기 싫은 사람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그토록 하기 싫어한다는 것도 나름 인정해줄 만한 결기이다. 공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일을 그는 해낼 수 있게 된다. 숨 막히는 조직 생활도 해낼 수 있다. 심지어 매일 출근도 해낼 수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영문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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