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강이 휘돌고, 뒷산에 단풍 절경이니… 시 한 수 절로~
안동 병산서원은 전국의 서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입교당 마루에 앉으면 만대루 너머로 낙동강과 병산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온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한국의 서원 9곳이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모두 16~17세기 중반 건립된 성리학 교육기관으로 주변 지형과 환경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학문하기 좋고 풍광도 빼어나다는 의미다. 한국관광공사가 가을 여행지로 추천한 이들 서원과 주변 관광지를 소개한다.
영주 소수소원 입구의 솔숲. 풍기가 고향인 안향을 기리기 위해 주세붕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흥수 기자
아홉 개 서원 중 6곳이 경상도에 있다. 우선 영주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 쇠락하자 이황이 조정에 토지ㆍ책ㆍ노비를 하사하도록 건의했고, 명종이 받아들여 편액을 내렸다. ‘소수(紹修)’는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다’라는 문장에서 따왔다. 안향을 기려 조성했다는 솔숲을 통과해 서원으로 들어서면 강학당 정면에 ‘백운동’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에서 문을 열어 들어 올리면 3면이 트여 안팎의 구분이 없어진다. 서원 앞 죽계천 건너편 바위에는 붉은 색으로 ‘경(敬)’ 자가 새겨져 있다. 주세붕이 유교 사상을 한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서원 입구 경렴정 역시 주세붕이 세운 정자다. 은행나무 고목이 정자에 드리워 가을이면 노란 물결이 장관이다. 서원 뒤편으로 가면 소수박물관과 선비촌으로 이어진다. 선비촌은 영주 지역 선비들의 삶터를 재현한 공간으로 숙박 체험이 가능하다. 많은 설명이 필요 없는 부석사도 소수서원에서 약 14km 거리에 있다.
깊은 가을 단풍으로 물든 안동 도산서원 전경. 문화재청 제공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의 유교적 이상향을 스승과 제자가 완성한 공간이다. 도산서당ㆍ농운정사ㆍ역락서재 등 앞쪽 건물은 퇴계의 작품이요, 전교당ㆍ광명실ㆍ장판각ㆍ상덕사 등은 제자들이 지었다. 퇴계는 1557년 도산서당을 열면서 ‘만년에 가장 기쁜 일’이라 자랑했다. 뒤는 야트막한 산이고, 앞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정조는 평소 흠모하던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792년 어명으로 ‘도산별과’를 실시했다. 한양이 아닌 곳에서 과거를 치른 유일한 경우다. 시험을 치른 곳은 강 건너편에 봉긋하게 솟은 시사단이다. 왕버들이 휘어진 서원 앞마당에서 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멀지 않은 곳에 퇴계종택과 그의 묘소가 있고, 이육사문학관도 인근이다. 낙동강 상류로 약 15km를 더 가면 단풍이 아름다운 봉화 청량산 입구다.
병산서원은 언제나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지만 여름철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피울 때 특히 아름답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같은 안동의 병산서원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으로 꼽힌다. 서원 앞으로 낙동강이 휘돌아 흐르고, 맞은편 병산이 푸른 절벽을 펼친다. 만대루 앞에 서면 감동이 그대로 전해진다. 군더더기 없는 7칸 기둥 사이로 강과 산이 펼쳐지고 마주 선 사람도 풍경이 된다. 누마루를 떠받친 기둥은 휜 나무를 그대로 썼고, 주춧돌은 다듬지 않은 듯 투박하다. 인공의 흔적을 최소화해 건물 자체가 자연의 일부인 양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아들 류진을 배향한 곳이다. 서원으로 가는 도로는 강과 나란히 휘돌아 가는 흙길이다. 서원에서 낙동강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하회마을이다. 그러나 바로 가는 도로가 없어 왔던 길로 되돌아나가 약 5km를 이동해야 하회마을 입구에 닿는다.
달성 도동서원의 중정당 마루에서 본 풍경. 한국관광공사 제공
달성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의 학덕을 받들기 위해 세웠다. 서원은 딱딱하고 권위적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할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입구에 어른 6명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반긴다. 가을이 깊어지면 서원 일대를 노랗게 물들인다.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가파른 돌계단 난간에 조각된 꽃봉오리가 예쁘다. 계단 끝 환주문에도 꽃봉오리 모양 정지석이 있다. 중정당 기단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로 쌓았다. 4각에서 12각까지 틈새 없이 쌓은 모양이 조각보처럼 곱다. 사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에도 태극 문양과 꽃봉오리가 새겨져 있다. 도동서원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한훤당고택이 있다. 김굉필의 11대손 김정제가 터를 잡고 300년 넘게 대를 이어온 종택으로 최근 예쁜 한옥 카페로 태어났다.
회재 이언적의 학문을 기리고 배향하는 경주 옥산서원. 한국관광공사 제공
경주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의 학문을 기리는 곳이다. 이언적은 151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승장구하다 두 차례의 정변에 밀려 낙향해 독락당을 짓고 연구에 전념했다. 옥산서원은 후손들이 독락당 인근에 세웠다. 앞으로는 사철 마르지 않는다는 자계천이 흐른다. 세심대(洗心臺) 너럭바위 사이로 들리던 물소리가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거짓말처럼 사라져 마음이 차분해진다. 학업에도 가끔 휴식이 필요한 법, ‘배움에 끝이 없다’는 뜻의 무변루 판문을 열어젖히면 자옥산과 자계천이 액자처럼 펼쳐진다. 서원 앞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독락당으로 연결된다. 토담으로 둘러싼 집 자체가 자연이다. 독락당 뒤 정자 난간에 기대면 계곡에서 청아한 바람이 불어온다. 약 10km 떨어진 곳에 회재의 고향 경주 양동마을이 있다.
정여창의 위패를 모신 함양 남계서원 전경. 함양군청 제공
함양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이다. 1552년 일두 정여창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남계’는 서원 앞을 흐르는 하천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 출입문인 풍영루가 고풍스러운 자태로 여행자를 맞는다. 유생이 토론하거나 휴식하던 공간이다. 2층 누마루에 오르면 너른 들판과 순하게 펼쳐진 백암산 자락이 한눈에 잡힌다. 정여창은 살아생전 연꽃을 좋아해 유생이 생활하던 양정재 누마루를 ‘애련헌’이라 했다. 차로 10여분 거리의 개평한옥문화체험 휴양마을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방영 후 함양의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정여창이 나고 자란 일두고택을 비롯해 100년 넘은 한옥 60여채가 있다. 서원에서 10km 거리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방재림인 함양상림이 있다.
장성 필암서원의 늦가을 풍경. 입구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다. 문화재청 제공
전라도에는 두 곳의 서원이 유네스코에 이름을 올렸다. 장성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장성에서 태어난 김인후는 성균관에서 이황과 학문을 닦았다. 서원은 1590년 그의 사후에 세웠는데 정유재란으로 불타고, 167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필암서원은 전체적으로 아담한 편이다. 출입문인 확연루 누대에 앉으면 월선봉과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확연루는 하서의 품성을 빗댄 이름이다. ‘마음이 맑고 깨끗해 확 트였고 크게 공정하다( 然大公)’는 뜻이다. 서원 곁에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건너편에 유물전시관이 있다. 서원에서 21km 거리에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장성편백치유의숲’이, 27km 떨어진 곳에 단풍 명소인 백양사가 있다.
정읍 무성서원의 강학 공간인 강당. 한국관광공사 제공
정읍 무성서원은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봉안한다. 최치원이 태산군(정읍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했다 떠난 후 그의 선정을 기려서 세운 생사당(生祠堂)이 뿌리다. 무성서원은 여느 서원과 달리 마을에 있다. 신분의 차별 없이 모두에게 열린 학문의 공간이자 소통의 장이었다. 외삼문 대신 1891년에 건립한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이름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도 학문을 계속하다’라는 뜻이다. 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상춘곡’으로 유명한 정극인의 묘와 재실이 있다. 무성서원에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22km, 전국 제일의 단풍을 자랑하는 내장산국립공원이 30km 거리에 있다.
예절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한국관광공사 제공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