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잠을 자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나를 친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외롭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나는 친구의 질문을 곱씹는다. 외로운지 그렇지 않은지. 그러곤 대답한다. 외롭다고. 외롭지만 참 좋다고. 친구는 그게 말이 되냐는 눈빛이다. 괴짜를 바라보듯 씨익 웃으며 나를 본다. 그리고 연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사랑이 얼마나 활기를 주는지를 설파하며 못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바로 그때. 나는 즐거운 토론을 시작할 마음으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어쩌면 친구에게 외롭지 않다는 대답을 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도식에 의해서라면, 나의 면면은 외롭지 않은 쪽에 가까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한 대답을 하고 싶어서 나는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에 긍정을 할 수밖에는 없다. 외롭다. 하지만 그게 좋다. 이 사실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건, 외로운 상태는 좋지 않은 상태라고 흔히들 믿어온 탓이다. 가난하다는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라고 흔히들 믿고 있듯이. 하지만 나는 외롭고 가난하지만 그게 참 좋다. 홀홀함이 좋고, 단촐함이 좋고, 홀홀함과 단촐함이 빚어내는 씩씩함이 좋고 표표함이 좋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외로우려 하고 되도록 가난하려 한다. 그게 좋아서 그렇게 한다. 내게 외롭지 않은 상태는 오히려 번잡하다. 약속들로 점철된 나날들. 말을 뱉고 난 헛헛함을 감당해야 하는 나날들. 조율하고 양보하고 희생도 감내하는 나날들의 꽉참이 나에겐 가난함과 더 가깝기만 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알람을 굳이 맞춰놓지 않고 실컷 자고 일어나는 아침, 조금더 이불 속에서 뭉그적대며 꿈을 우물우물 음미하는 아침, 서서히 잠에서 벗어나는 육체를 감지하며 느릿느릿 침대를 벗어나는 아침이다. 찬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사과 한 알을 깎아 아삭아삭 씹어 과즙을 입안 가득 머금고, 찻물을 데우고 커피콩을 갈아 까만 커피를 내려서 책상에 앉는 그런 아침이 좋다. 오늘은 무얼 할까. 영화를 보러 나갈까. 책을 읽다가 요리를 해볼까. 내가 나와 상의를 하는 일. 뭐가 보고 싶은지, 뭐가 먹고 싶은지를 궁금해 하는 일. 그러면서, 나는 소소한 마음과 소소한 육체의 욕망을 독대하고 돌본다. 외롭다. 그러나 오랜 세월 매만진 돌멩이처럼, 그런 외로움은 윤기가 돈다.
외로움이 윤기나는 상태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외로울 때면 쉽게 손을 뻗어 아무나에 가까운 사람을 애인으로 만들었던 시절도 있었고, 외롭다는 사실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전화로든 채팅으로든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아무 말이든 나누어야 잠이 들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고, 혼자서 식당에 찾아가 밥을 먹는 일이 도무지 어색해서 차라리 끼니를 굶는 시절도 있었다. 연락처 목록을 뒤져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지만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나날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히는 게 두려워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확인을 해야 안도가 되는 나날도 분명 있었다. 누군가와 연결이 되어야만 겨우 안심이 되는 그 시절들에 나는, 사람을 소비했고 사랑을 속였고 나를 마모시켰다. 사랑을 할수록, 누더기를 걸친 채로 구걸을 하는 거지의 몰골이 되어갔다. 사랑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는, 나의 허접하고 경박한 외로움이 사랑을 그렇게 만들었다. 서로를 필요로 하며 부르고 달려오고 사랑을 속삭였던 시간들은 무언가를 잔뜩 잃고 놓치고 박탈당한 기분을 남기고 종결됐다. 그래서 지나간 사랑을 들춰보면 서럽거나 화가 났고, 서럽거나 화가 난다는 사실에 대해 수치스러워졌다. 어째서 사랑했던 시간의 뒷끝이 수치심이어야 하는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지금 나는 사랑의 숭고함보다 혼자의 숭고함을 바라보고 지낸다. 혼자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가끔 거짓말조차 꾸며댄다. 선약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 약속을 잡지 않는다. 아니,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나와 놀아주기로, 나에게 신중하게 오래 생각할 하루를 주기로 약속을 했으므로 선약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와 놀아주기로 한 날이라서 시간이 없어요’라는 말은 안타깝게도 타인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허용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하다하다 지치면 두어 달을 잡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 가족이나 친구가 함께 하는 것을 두고 나는 가끔 농담처럼 ‘회식자리에 도시락을 싸들고 가는 경우’와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관광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인간관계로부터 언플러그드하러 떠나는 것이므로. 오롯하게 혼자가 되어서, 깊은 외로움의 가장 텅빈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므로. 감정 없이 텅빈, 대화 없이 텅빈. 백지처럼 텅빈, 악기처럼 텅빈. 그래야 내가 좋은 그림이 배어나오는 종이처럼, 좋은 소리가 배어나오는 악기처럼 될 수 있으므로.
외롭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을 나는 경계한다. 잠깐의 어색함과 헛헛함을 통과한 이후에 찾아올 더없는 평화와 더없는 씩씩함을 만나볼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아서이다. 슬프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슬픔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 또한 나는 경계한다. 역시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기만 하다. 외로움에 깃든 낮은 온도와 슬픔에 깃든 약간의 습기는 그저, 생물로서의 한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조건이라는 걸 잊지 않고 싶다.
요즘은 외로울 시간이 없다. 바쁘다. 탁상달력엔 하루에 두 가지 이상씩의 해야 할 일이 적혀 있다. 어쩌다가 달력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지 않는 날짜를 만나면, 그 날짜가 무언가로 채워지게 될까봐 조금쯤 조바심도 난다. 바쁠수록 나는 얼얼해진다. 얼음 위에 한참동안 손을 대고 있었던 사람처럼 무감각해진다. 무엇을 만져도 무엇을 만나도 살갑게 감각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좀 질 나쁜 상태가 되어 있다. 쉽게 지치고 쉽게 피로하다. 느긋함을 잃고 허겁지겁거린다. 신중함을 잃고 자주 경솔해진다. 그런 내게 불만이 부풀어오르는 중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다린다. 오롯이 외로워질 수 있는 시간을. 오롯이 외로워져서 감각들이 살아나고 눈앞의 것들이 투명하게 보이고 지나가는 바람의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나의 시간을.
외로워질 때에야 이웃집의 바이올린 연습 소리와 그애를 꾸짖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모르는 사람들의 생활에 빙그레 웃기 시작한다. 외로워질 때에야 내가 누군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떤 연결은 불길하고 어떤 연결은 미더운지에 대해 신중해지기 시작한다. 안 보이는 연결에서 든든함을 발견하고 어깨를 펴기 시작한다. 골목에 버려진 가구들, 골목을 횡단하는 길고양이들, 망가진 가로등,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들에 담긴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좋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 이런 시간을 필요로 하는 걸 수도 있다. 사랑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의식을 오래토록 행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경박한 외로움이 사랑을 망치게 하지 않으려고, 사랑을 망쳐서 사람을 망가뜨리고 나또한 망가지는 일을 더이상 하지 않으려고, 무공을 연마하는 무예가처럼 무언가를 연마하는 중일 수도 있다. 집착하고 깨작대고 아둔하고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든든하고 온전하고 예민하고 독립적인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게 되는 게 지금은 나의 유일한 장래희망이다.
<월간 해피투데이 2014.1월호 - 김소연, ‘혼자’를 누리는 일>
몇달전에 올렸던 글 끌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