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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김혜자 : "시간은요, 정말 덧없이 확 가버려요. 안타까운 건 그걸 나이 들어야 알죠. 똑똑하고 예민한 청년들은 젊어서 그걸 알아요. 일찍 철이 들더군. 그런데 또 당장 반짝이는 성취만 아름다운 건 아니에요. 오로라는 우주의 에러인데 아름답잖아요. 에러도 빛이 날 수 있어요. 하지만 늙어서까지 에러는 곤란해요. 다시 살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 눈 앞에 주어진 시간을 잘 붙들어요. 살아보니 시간만큼 공평한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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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2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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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 선생님 드라마 직후 인터뷰인데 

대상 기념 덬들도 꼭 한번 읽어봤으면 해서 가져옴



인터뷰가 한 편의 수필 같음.


전문 다 읽고 나면 너무 힐링돼. 

가장 인상깊었던 인터뷰니까 꼭 읽어봐


(드라마 결말 얘기 있음)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노년의 찬란한 환각 그린 김혜자

"나를 사랑해준 하늘의 남편에게 이 드라마 보여주고파"

"내 배우 인생의 마지막 챕터, 이 나이까지 기다려준 김석윤 감독 믿고 했다"

"드라마가 곧 나 자신, 끝나면 끈 떨어진 연처럼 허망해져"

"세상에 공짜는 없어… 젊은이들, 시간 소중히 붙잡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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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캐릭터와 현실의 자아를 경이롭게 일치시킨 배우 김혜자./사진=이태경 기자
늙어버린 몸에, 늙지 못한 마음은 어떻게 적응해갈까?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시작부터 이제까지 보아온 김혜자 드라마와는 결이 전혀 달랐다. 한지민과 김혜자가 몸을 바꿔가며 25살과 70살을 가파르게 오가는 모습에, ‘그래, 이 맛이야' 깔깔 거리면서도 ‘저분이 저렇게 트렌디해도 되나' 슬쩍 걱정도 끼어들었다.

시계를 잘못 돌린 실수로 한순간에 50년을 나이 먹은 ‘혜자'는 가족과 친구들의 포용 속에 힘차게 살아가지만, 그녀의 노쇠한 육체가 느리고 힘겹게 발을 뗄 때마다 우리 모두는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젊어서 늙어버린 ‘혜자'에겐 매 순간이 낯선 신세계다. ‘저녁에는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급할 때면 왜 또 무릎은 삐걱대는지'... 투덜대는 김혜자의 주름진 미간에는 불가항력적인 시간의 완력에 밀려 얼빠진 듯한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드라마는 ‘타임슬립'이라는 트릭으로 모두를 기분 좋게 속인 채, 10회까지 내달린다. ‘혜자’의 얼굴에 겹겹이 드리워진 다차원의 시간 속으로. 각본이 설득력 있는 맥락만 잡아주면 그녀가 감당하지 못할 감정의 시차는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이 놀라워 김혜자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몇 번을 고사하다, 12회 드라마가 끝나고 보자고 간신히 허락을 얻어냈다.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지루하지 않게 그녀의 문자가 매일 안부 편지처럼 날아들었다. ‘김석윤 감독이 자기를 믿고 하라고 했어요. 난, 그 사람을 믿어요. 그 사람 머릿속에 온갖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드라마가 끝나고야 알았다. 왜 좀 더 일찍 만나면 안 되었는지를. 전통적인 타임슬립 드라마인줄 알았던 ‘눈이 부시게'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머릿속에 펼쳐진 환각이라는 역대급 반전으로 놀라운 감동을 안겼다.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꾼 건지,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꾼 건지'라는 한마디가 이토록 구체적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대본이 정확하게 김혜자라는 육체를 통과했기 때문이리라.

드라마가 막을 내린 다음날 김혜자를 인터뷰했다. 누에고치가 명주실 뽑아내듯 꿈꾸는듯한 얇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이 드라마를 나를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준 하늘 나라의 남편에게 주고 싶어요." 그 말은 드라마속에서 젊은 날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혜자'의 그리움과 겹쳐져 묘한 울림을 자아냈다.

인터뷰 내내 완급 조절이 정확한 그녀의 목소리는 거미줄 위의 이슬처럼 촉촉하게 떨렸다. 망연자실하게 여러 시간과 추억을 헤집다가 불현듯, ‘나는요'라고 매듭을 지을 땐 세상의 온갖 소음이 정지된 듯 고요해졌다.

김혜자는 그 자신, 꿈이 없었고 오직 공상이 취미였다고 했다. "이 드라마로 치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깨지고 외연이 넓어지길 바란다"며 "김석윤 감독과 제작진이 내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다려준 것 같다"고 공을 돌렸다. ‘눈이 부시게'가 배우 인생의 마지막 챕터가 될 것 같다는 노배우의 말은 그 깊고 싱싱한 ‘젊은 연기'를 생각하면 기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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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연기가 사람들의 지친 삶에 바늘끝만큼의 빛이라도 비춰주길 바란다는 김혜자./사진=이태경 기자
-"드라마가 나예요"라며 인터뷰를 여러번 거절하셨어요.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달았어요. 자연인 김혜자가 드라마 속 김혜자를 보는 기분이 어떠셨나요?

"맘이 많이 아파서 울었어요. 그런데 울면서도 생각을 했어요. 요즘 사람들, 많이 힘든데 내 연기가 쪼끔 이라도 사람들 위로를 해주면 좋겠다. 뾰족하고 성난 마음들, 쓰다듬어 주면 좋겠다… 그런데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렇담, 잘했어요. 많이 울면 맘이 순해진다잖아요."

-슬퍼서가 아니고, 너무 좋고 아름다워서 울었어요.

"그러길 원했어요. 이 드라마에는 내 인생을 겹쳐볼 수 있겠더라고요.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저렇게 스스로를 비춰볼 테니, ‘아! 이게 정말 특별한 작품이 되겠구나' 감이 왔어요. 연출자인 김석윤 감독은 ‘청담동 살아요'도 같이 했는데, 그때 느꼈어요. 이 사람이 마음 밭이 참 깨끗하네. 좋은 밭에 싹이 떨어지니 잘 자라는 거죠."

-김석윤 PD도 이남규 작가도 대단한 것이 ‘김혜자'라는 한 사람의 일생을 참 오래 관찰하고 연구했다 싶었어요. 그걸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와 섞어서 알맞은 타이밍에 선물처럼 안겨줬어요.

"나는요, 그 사람들 믿었어요. 처음엔 주변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김혜자가 왜 저런 진부한 ‘타임슬립’ 드라마를 하나… 뻔한 환타지물에 왜 나와?’ 그때 속으로 생각했어. ‘그래, 오해할테면 해라.’ 이제야 다들 고개를 끄덕여(웃음). 이젠 슬픈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때가 된 거예요. 우는 건 첨부터 노상 울고, 심각한 건 내내 힘주고… 그건 옛날 연기잖아. 내가 배운 건 힘을 뺄 때 정말 좋은 게 나온다는 거예요."

-사실 힘을 빼는 게 더 어렵지요.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운동할 때 우리 코치가 그래. "선생님, 힘 빼세요. 엉뚱한 데 힘주지 마세요!" 연기도 똑같아요. 필요없는 데 힘쓰면 안되거든(웃음)."

-힘을 빼고 한 이야기 중에 어떤 게 기억에 남으세요?

"등가교환 이야기 할 때요. 영수(손호준 분)가 자고 있을 때 채팅방에 들어온 젊은이들하고 댓글로 얘기하잖아요. 그땐 정색하고 말하면 안돼요. ‘(한달음에)니네들 그렇게 살다가 나처럼 된다~' 그 말을 장난처럼 툭 던지는 거예요. 무방비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졸고 있다가 잠결에 들을 지도 모르잖아. 난 그 장면 대사를 한 100번쯤 연습했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군요.

"거저 얻어지는 건 없어요. 내 귀중한 걸 희생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어요. 그게 등가의 법칙이에요. 운 좋은 사람? 운 좋았다 해도 노력 안 하면 사라져요. 나는 이해력도 부족한 사람이라 열심히 안 하면 할 수가 없었어요. 오죽하면 꿈에서도 대본이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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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를 연기한 한지민과 김혜자. 김혜자는 너무 예쁜 사람이 자신의 젊은날을 연기해주어 고맙다고 했다.
드라마 후반부에 가면 그 여자가 김혜자인지, 김혜자가 그 여자인지 분별이 의미 없어진다. 한 사람의 배역과 인생이 서로 삼투압을 일으키며 진실을 추출해가는 광경은 경이롭다. 유년에서 중년으로, 노년에서 청년으로… 변칙적으로 시프트되며 긴장과 활력을 주던 시간의 리듬이 비로소 요양원에서 지내던 알츠하이머 환자의 공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 아름다운 속임수에 숨이 멎었다.

타임 슬립의 전통 서사에 코미디를 섞고, 배우 개인의 역사에 노년의 신화를 매끄럽게 이어내는 것은 김혜자가 성취한 연기적 마술이다.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소싯적 광고 카피 "그래 이 맛이야"는, 김혜자와 함께 늙어온 관객에게 거는 일종의 농담이다.

마지막에 이르면 김혜자는 자기보다 한층 더 늙은 상태를 연기한다. 햇빛에 바랜 머리카락, 비바람에 녹슨 것 같은 피부, 자아가 이탈한 눈… 스스로 드라마의 육체가 된 이 배우의 몸짓. 머루처럼 까만 눈 안에 순식간에 번개가 치고 별빛이 일렁이며 청춘과 노화의 시간이 오갈 때, 그 눈빛의 속도가 실제 빛의 속도를 추월해 우리를 설득해 버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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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게'의 이정은과 김혜자. 모녀일까 고부일까. 이 관계의 비밀이 밝혀지면 더 큰 감동이 밀려온다. 김혜자는 영화 ‘마더'때 단역으로 출연했던 이정은을 기억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세월을 정면으로 마주선 그녀의 육체 앞에서 나는 잠시 그 분리되지 않는 젊음의 두께를 더듬어보았다. 오래 우린 찻물 같은가 하면 톡 쏘는 사이다같기도 한 김혜자의 표정과 말투. 이 편안한 현란함에 취해.

-나이 들면 윤곽이 흐릿해진다지만, 연기할 땐 좋은 점이 더 많지요?

"나이 먹으면 인중도 길어지고 콧구멍도 커져요(웃음). 나이 먹으면 언제든 드러날 건 드러나게 돼 있어요. 숨기는 게 없으니 훨씬 자유스럽죠. 이번엔 촬영할 때 카메라가 얼굴을 밑에서 잡으니, 콧구멍이 무슨 터널처럼 크게 나왔어요. 처음엔 짜증나더라고(웃음). ‘너무해. 감춰둔 걸 다 폭로시키다니'. 그런데 또 그게 무슨 대순가 싶어. 시청자들도 댓글로 ‘콧구멍 크다'고 타박하더니, 이젠 또 서로 ‘너도 나이 먹으면 살이 얇아져 콧구멍 커진다' 이러면서 야단을 쳐요. 그걸 보면서 나는 또 이 사람들이 참 다정도 해라…"

숨기는 게 하나도 없어 습자지처럼 투명하게 속이 보이곤 하던 김혜자는 말끝마다 후렴구처럼 시청자들에 대한 사랑을 늘어놓았다. 그 모양이 꼭 손주 자랑하듯 했다.

-‘젊은 혜자' 한지민을 멀리서 바라보는 눈빛에 잊히지 않아요.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순간, 저도 20대 시절의 저를 불러서 지그시 쳐다보았습니다.

"애틋했어요. 슬픈 것 가여운 것을 넘어서 참, 애틋했어요."

어찌 보면 그가 모든 생물을 대하는 감정이 애틋함이 아닌가 싶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한지민도 남주혁도 손호준도 안내상과 이정은도 모두 사랑스러워 못 잊겠노라고 했다. 대본도 손에 놓고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으면 ‘끈 떨어진 연같이 갈피 없이 허둥댄다'고 쓸쓸하게 말했다.

-이제사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만 늙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 줄 알 것 같습니다.

"있잖아요, 정말로 나이 먹으면 어떤 일이 어제 일처럼 확 줌인이 돼요. 어떨 땐 지금, 이 순간도 아스라하게 줌아웃이 돼.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대사를 할 때 ‘아, 작가도 이걸 느꼈구나’ 했어요. 그게 나였어요. 간혹 ‘진짜 배역을 사는 거 같아'라는 댓글을 볼 때마다 혼자 중얼거렸어요. ‘'같아'가 아니라 그게 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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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 힘으로 선생은 드라마에서도 자기 인생에서도 주인공으로 살아온 게 아닌지요?

"그것도 얼마나 감사해요. 날개는 누가 달아 주지 않아요. 내 살을 뚫고 나오는 거죠. 등가교환과 비슷한 말이야. 깃털이 살을 뚫을 때 얼마나 아프겠어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가족들이 배려해줘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꿈꾸듯이 살아온 인생이었다. 큰 아들이 4살 때 연기를 재개했으니 오랫동안 ‘국민 엄마’로 불렸지만, 그 모든 게 허물을 덮어준 자식과 남편의 공이었노라고.

-엄마 김혜자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같이 있다가도 "엄마 공부해야 해. 대본 봐야 돼"하고는 방에 들어갔어요. 우리 아들이 그래. "엄마가 방에 들어가서 공부할 땐 곁에 가면 안 될 것 같았어. 무슨 커튼이 드리워진 것처럼." 난 그 말이 너무 가슴이 아파요. 그러니 난 연기를 잘 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젠 ‘혜자’라는 이름이 가족처럼 친근하게 느껴져요.

"나도 ‘혜자'를 좋아해요. 내 이름이니까. 은혜 혜(惠)자를 써요. 우리 언니 둘은 자(子)자 돌림이 아닌데, 내 이름만 왜 그렇게 지으셨나 몰라(웃음). 김석윤 감독이 드라마 ‘청담동 살아요' 할 때도 주인공을 ‘혜자’로 쓰더니, 이번 드라마에도 또 ‘혜자'야(웃음)."

-연출자와 작가들에겐 ‘김혜자’라는 존재 자체가 탐구 대상인듯 해요. 익숙했던 ‘혜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수록, 불가사의한 생의 풍경이 펼쳐지니까. 계속 호기심이 생기는 거죠. 봉준호 감독도 영화 ‘마더'에서 주인공 이름을 ‘혜자’로 썼잖아요. ‘국민 엄마'를 비틀었더니 짐승처럼 스산한 모성의 여자가 나왔어요. 정말 신기하더군요. 그런데 7살 때 우연히 출연한 연극에서도 ‘혜자’였다죠?

"그랬어요. 개에 물려 공수병으로 죽는 아이였는데, 앓다가 죽어가니까 관객들이 "혜자를 죽이지 말라"고 아우성을 쳤어요(웃음). 그때 우리 언니가 ‘이 아이는 배우가 될 싹'이라고 했대요."

-7살 혜자부터 70대의 혜자까지… 여러 역할로 우리 곁에 있었는데 한 번도 지루한 적이 없어요(웃음). 스스로도 자신이 쌓아 올린 이미지를 해체하고 역전시키는 재미를 느끼시나 봅니다.

"감사해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좋은 사람들이 때가 되면 불러주는 거죠. 내가 41년생, 한국 나이로 78살이에요. 옛날 같으면 굉장히 오래 산 거죠. ‘왜 이렇게 오래 사나’ 싶을 때도 많아요. 생각해보면 ‘눈이 부시게’의 ‘혜자' 역할도 이 나이니까 할 수 있었던 거잖아요. 김석윤 씨가 기다렸을 거예요. 더 나이 먹으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딱 이 나이가 될 때까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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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의 한 장면.
-저는 창작자들이 선생의 이전 작품을 레퍼런스로 삼아, 영감을 발전시킨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의 희자 역할도 알츠하이머였어요.

"나는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안 잊히는 장면이 있어요. 상대역인 주현 씨한테 "나 잠이 안 와" 그랬더니 자장가로 ‘서머타임'을 불러주잖아. (배시시 웃으며) 저, 그때 너무 좋았어요. 치매가 깊어도 사랑이 구원하는구나. 사랑만이 답인 거죠. 요양원에서 주현 씨가 옆에서 퍼즐 조각 맞춰줄 때도 그 여자는 산만하게 딴 데 보면서 다른 사람 간섭을 해요. 치매에 걸리면 그냥 아기인 거예요."

-치매 노인의 머릿속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궁금하다셨는데 이번 작품이 그 답이 됐겠습니다.

"그랬죠. 나 옛날부터 몹시 궁금했거든. 치매 걸리면 뇌가 쪼그라든다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건가. 달나라에도 갈만큼 기술이 좋아졌다는데 왜 그걸 못푸나? 예전에 파키스탄 지진현장에 가면 볼품없는 천막은 가만 있는데 튼튼하게 지은 2~3층 건물들이 뒤집어져 있어요. 그거 보면 땅 속에 커다란 손이 막 헤집고 다닌 것 같아. 치매가 그런 걸까... 하버드대 교수 하다 치매 걸린 여자도 어느날 대학 광장에서 황망해 해요. 어디로 가야할 지 생각이 안나는거에요."

-살아보니 어떠셨어요?

"나는 그냥 오롯이 그 시간을 살았어요. ‘혜자’라는 어떤 여자가 있었어요. 서민이지만 다정했던 여자지요.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 아이 하나 낳고 알콩달콩 살았는데 비극의 현대사 속에서 남편을 잃었어요. 살면서 그 여자는 "돈이 제일 무서웠어요." 열심히 살다 좀 살만하니까 치매에 걸린 거죠. 참 다행인 건 일평생 그 여자는 마음 밭이 좋았어요."

드라마에서든 일상에서든 김혜자를 보면 소설가 박완서가 생각나곤 했다. 평생 중산층 사람들의 풍속과 욕망을 싱싱한 수다체로 그려냈던 박완서와 김혜자. 두 사람 다 일찍 결혼했고 가정의 충만을 누렸고, 재능 많은 그들을 산처럼 보호하던 남편을 일찍 여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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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맛이야'를 유행시키던 젊은 시절의 김혜자.
-박완서 선생과 인생도 작품도 많이 닮으셨어요.

"나는요, 박완서 선생 글을 읽으면 행주 냄새가 났어요. 그분이 제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 추천사를 써주셨는데,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나를 보셨어요. 읽어줄게요(웃음). ‘김혜자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나라도 저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에게 내가, 아닌 모든 여편네들이 씐 것처럼 오싹해질 때가 있다. 저런 연기의 깊이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혹시 드라마 밖에서의 그녀는 힘이 다 빠져 무기력하게 지내는 건 아닐까, 궁금해하곤 했다…’

내가 놀라서 선생님께 "이런 나를 어떻게 아셨어요?" 그랬더니 "나도 그래요" 하며 웃으시더라고. 내가 힘을 쓸 때는 정말 연기할 때랑 아프리카에서 아이들 안아줄 때 밖에는 없어요. 다른 건 다 모르고 서툴러요."

불쑥 처음 박완서 선생 댁에 찾아갔던 날을 떠올렸다. 한겨울에 마당에 노란 꽃이 피었더라고. "김혜자 씨, 이게 복수초야. 눈을 뚫고 나오는 아이지" 하셔서 난, "그래도 이름이 복수는 나쁘다~" 그랬어요(웃음)."

-선생 댁 마당에도 지금 봄꽃이 한창이지요?

"제비꽃이 앉아서 퍼져 나왔어요. 담 앞엔 영춘화가 오래 전 부터 피었죠. 살구나무 벚나무엔 새순이 오동통해요. 만지면 터뜨릴 것처럼. 나는요, 서교동 연희동에서만 50년을 살았어요.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아요. 내 방이 있는 3층에서 보면 창밖으로 사계절이 다 보여요. 외출도 싫어해서 5살 3살 강아지 보리랑 수수랑 눈 맞추고 놀며 얘기해요. 여기서 나가기 싫어서 누가 강남에서 만나자면, 그 사람 막 미워질려고 해(웃음)."

자기 껍질 속에 사는 한없이 연한 사람을, 저 멀리 아프리카 아이들이 불러주니 이 얼마나 감사하냐고. 김혜자는 월드비전 홍보대사로 30년째 봉사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품에 안은 아이가 당신 몸에 새겨진 검은 문신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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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의 홍보대사로 30년째 봉사중인 김혜자. 그 기록을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에 담았다. 인터뷰 중에도 “이젠 또 가야될 땐 가봐. 아이들 만나고 싶어요"를 연발했다.
-강남 나가기도 힘겨워하시는 분이 어떻게 매번 아프리카를 가세요?

"그러니 감사하지요. 30년 전엔 비행기 직항도 없어서 이 나라 저 나라 거치다 보니, 이젠 안 가본 곳이 없어요. 남들은 경비행기 타면 심장이 툭툭 떨어져서 구토를 하는데, 나는 안그래요. 몸은 약해도 하나님이 튼튼한 오장육부를 주셨어. 비행기가 흔들릴 땐 앞에 계기판을 보고 ‘저렇게 요동을 치네' 그래요. 비행사 등 보면서 ‘아! 저 사람, 참 외롭겠구나' 해요. 그럼 어느새 다 와있더라고."

-선생은 평생 외로울 사이가 없으셨겠어요? 가정과 일터에서 ‘예쁨과 귀함'을 다 받고 사셨으니.

"다들 안 예쁘고 안 귀한 사람 있나요? 그런데 난 남편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감사하게도 너무 좋은 사람이었어. 11살 차이가 났는데, 살면서 나한테 화를 낸 적이 거의 없어요. 매번 ‘사람, 참'하고 웃고 말았죠. 저세상 떠난 지 20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그이가 생생하게 고마워요."

이번 드라마를 그를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준 남편에게 주고 싶다고, 수줍게 말했다. "미국에 있는 딸한테도 전화해서 그랬어요. ‘눈이 부시게'가 그동안 내 허물을 덮어준 우리 가족에게 내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서 기쁘다고."

-가족들도 보통 명사인 ‘국민 엄마’ 아니라 ‘내 엄마 김혜자'를 당겨보듯 보듯 어여삐 구슬피 보았겠지요.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학교도 탤런트도 다 그만두고 결혼해서 아이 키운 건 후회 안 하세요?

"그때, 나 정말 행복했어요. 아기가 너무 신기했거든. 우리 아들은 쌍꺼풀도 없고 눈이 보시시하게 부어있었어요. 예뻤지. 그치만 4살이 되니 젖 먹고 쓱 나가서 동네 애들하고 놀다 오더라고. 배신감이 들었어요(웃음). 그래서 연극을 시작했고, 다시 드라마도 했죠."

-‘전원일기’에선 얼마나 멀리 오셨어요?

"그거는 사람의 도리를 알려주는 드라마였어요. 농촌은 무대였을 뿐이죠. 김정수 작가의 인생 드라마였는데, 그이가 10년을 쓰고 도망을 갔어(웃음). 그 뒤로 김정수 씨가 쓴 ‘겨울 안개' ‘엄마의 바다'에도 출연했는데, 사람이 또 양반이라 지랄발광하는 그런 건 못써요. 그런 건 김수현 씨가 잘했죠. ‘사랑이 뭐길래'에서도 배배꼬여 남 약올리는 대사를 할 땐, 그 신랄함에 인중에 땀이 수북히 고일 정도였어요(웃음). ‘모래성'도 ‘엄마가 뿔났다'도 좋았죠. 김수현 씨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데, 그 분이 긴 드라마 말고 12부작 정도의 미니 시리즈를 써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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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에게 마닐라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던 1982년 작 ‘만추'.
-출연작이 많지는 않지만 백상예술대상도 최다수상했고 영화 ‘마더'로는 LA비평가협회에서 주는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11개나 상을 받으셨습니다. 개인적으론 83년 마닐라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받은 영화 ‘만추'를 못 본게 아쉬워요. 스틸컷만 봐도 근사하더군요.

"(미소지으며)우리 아들이 어느날 ‘만추'포스터를 찾아서 나한테 보여줬어요. "엄마 나이 마흔일 때 같아"하면서요. 신기하고 고맙죠."

-못 다 이룬 꿈이 있으세요?

"꿈? 난 그런 거 몰랐어요. 꿈이 뭔지 모르고 살았어. 누군가 내가 할 걸 보여주면 그걸 하며 살았죠.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은 했어요. 영화 ‘길'의 젤소미나 같은 역할은 해보고 싶다고. ‘내 사랑'의 몸이 아픈 화가 모드 역할도 좋았어요. 그런데 그런 작품을 보면 결국 시간이 지나면 모든 허물을 사랑이 다 덮어요."

이어 기습하듯 말했다. 어쩌면 이번 드라마가 김혜자의 마지막 챕터가 될 거라고. "100세 시대지만 임무가 끝나면 하나님이 데려간다고 해요.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마지막 챕터가 아닌가 해. 잘 여미게 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챕터에서 선생이 찾은 건 무엇인가요?

"사랑하고 사랑받은 기억이죠. 우리는 이제까지 치매라고 하면 며느리가 밥 안 줬다고 악을 쓰는 노인만 봤잖아요. 살아보니 제일 아름다웠던 순간도 가슴 아팠던 순간도 다 소중하게 모여서 기억이 돼요. 뇌가 쪼그라들어도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은 기억으로 살아요."

-25살 혜자를 살아서 행복하셨어요?

"행복했죠.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던 시간도 같이 보던 노을도… 정말 눈부시게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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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처럼 맞춰지는 우리의 눈부신 시간들.
-마지막으로 들려주세요.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시간은요, 정말 덧없이 확 가버려요. 어머나, 하고 놀라면 까무룩 한세월이야. 안타까운 건 그걸 나이 들어야 알죠. 똑똑하고 예민한 청년들은 젊어서 그걸 알아요. 일찍 철이 들더군. 그런데 또 당장 반짝이는 성취만 아름다운 건 아니에요. 오로라는 우주의 에러인데 아름답잖아요. 에러도 빛이 날 수 있어요. (미소지으며)하지만 늙어서까지 에러는 곤란해요. 다시 살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 눈 앞에 주어진 시간을 잘 붙들어요. 살아보니 시간만큼 공평한 게 없어요."

자신의 연기가 사람들의 지친 삶에 바늘끝만큼의 빛이라도 비춰주길 바란다는 말로 기나긴 인터뷰가 끝났다. 살아보니 ‘인생에서 경계할 것은 교만’이라고, 부디 이 인터뷰가 덧칠없이 순하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며칠에 걸쳐 전화로 문자로 대화로, 김혜자와 오손도손 정담을 나누다보니 그녀가 지금쯤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지 머리에 순하게 그려졌다. 강아지 남매 보리 수수에겐 오늘도 ‘잘 자라’고 인사했는지, 아침마다 골목길 비질하는 이웃은 여전한지, 마당에 벚꽃은 지금쯤 꽃망울을 터뜨렸는지, 오늘은 또 무슨 공상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드라마 속 그 여자를 떠나보내며 시들비들 앓던 몸은 좀 나아졌는지…

생각해보면 아프리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쓰다듬을 때나, ‘눈이 부시게'에서 젊은 한지민과 중년의 이정은을 바라볼 때나 김혜자의 눈빛은 동일하게 메아리쳤다. "너는 나야!". 그것은 연기라기보다는 본능이 데려다놓은 어떤 간절한 상태로 읽혔다. 그것을 몰아(沒我)라 할까, 이타(利他)라 할까. 그토록 꿈꾸었으나 우리가 이르지 못했던 아름다운 착란이라 할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가 또 그녀 안에 겹겹이 눈부신 똬리를 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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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의 기억이 인생의 허물을 덮는다고 믿는 김혜자./사진=이태경 기자
김혜자는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으나 우리는 그 덕에 시간이라는 아련한 꿈을 꿀 수 있었다. 젊은 내가 얼마나 어여뻤는지, 늙은 나는 또 얼마나 어여쁠지, 청년과 노인은 또 얼마나 다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너는 나야"라는 티켓을 쥐고 ‘늘 막차를 타는 심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김혜자, 이 눈부신 인생의 안내자에게 경배를!

[김지수 대중문화전문기자 kimjisu@chosunbiz.com]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3&aid=0003434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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