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납치 살인행각을 벌인 이른바 ‘지존파’ 사건의 범인들이 검거된 지 21년이 됐다. 범인 6명이 사형당한 지는 20년 됐다. 1994년 9월21일 오후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지존파 일당의 아지트에서 열린 현장검증에서 범인 김현양씨가 도끼로 피해자 대역인 마네킹을 내리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같은 해 9월8일 새벽 납치됐던 이정수씨는 지존파 범죄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① 1994년 9월8일
② 지하
③ 탈출
④ 재판
⑤ 그날 이후
⑥ 치유
범행이 묻힐 뻔했다. 납치당했던 여성 이정수(가명)씨가 겨우 탈출해 신고했다. 이씨의 제보가 없었으면 지존파가 저지른 살인은 미제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1994년 9월8일 새벽 납치당한 날부터 탈출하기까지 8일 동안 이씨는 참혹한 경험을 했다. 5명으로부터 성폭행당했고, 납치당한 다른 피해자들이 숨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이씨가 범인들이 사형당한 이후 20년 만에 언론과 인터뷰했다. ① 1994년 9월8일 범죄 보도에는 시의성이 있지만, 범죄 피해에는 시의성이 없다. 범죄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오래 지속된다. ‘왜 지금 보도하는가’라는 질문에 ‘언제든 가치 있다’고 <한겨레>는 답한다. 지존파 사건 피해자 이정수(가명·48)씨가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마음의 준비가 됐다. 지존파 사건은 지금 많이 잊혔지만, 이씨의 범죄 피해 경험은 2015년에도 독자에게 전할 만하다 판단했다. 그러나 ‘충격’ ‘경악’ 등의 단어가 제목에 들어갈 법한 선정적 범죄 보도를 피하려 했다. 참혹한 범죄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되도록 덜어냈다. ‘범죄-수사-재판-이후의 삶’으로 이어지는 시간 동안 이씨의 ‘마음의 재난’을 담담히 옮기려 노력했다. 심리에 주목했다. 이씨가 굳이 오래전 사건에 대해 언론에 심경을 밝힌 이유는 두 가지다. 범죄는 재난처럼 닥친다.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공동체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함을 환기하고자 했다. 둘째, ‘그래도 살아간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했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경험한 범죄 피해가 이후 이씨의 삶을 뿌리째 바꿨다. 몸도 마음도 아팠다. 그럼에도 자신이 왜 지금 사는지 고백함으로써 수많은 범죄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이 힘을 얻길 바랐다. 그 고백이 스스로에게도 치유가 되길 바랐다. 인터뷰는 지방 모처에서 진행했다. 섭외와 인터뷰 진행 과정에서 지존파 수사를 맡았던 고병천 당시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글은 문답식이 아니라 일부러 1인칭으로 정리했다. 이씨가 3인칭의 전달자를 뛰어넘어 독자와 직접 만나길 바랐다. 대신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씨와 여러차례 원고를 주고받으며 수정했다. 총 6회에 걸쳐 싣는다. “우리 공주, 우리 공주”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1967년 서울 태생입니다. 1980년대 서울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 나왔습니다. 학창시절의 저는 약간 내성적이면서도 한편 이기적이었습니다. 친구는 금세 사귀는데 친구들이 내 이기적인 성격에 금세 떨어져 나갔던 것 같습니다. 말괄량이에 조금 거칠었던 거 같아요. 초등학교 때는 남자애들이 다가오면 태권도 발차기를 하곤 했죠. 남자애들이 저를 많이 놀렸어요. 머리를 잡아당기고 치마를 걷어 올리고, 그다음에도 저를 귀찮게 하고. 그런 케이스였어요, 제가. 질투심이 꽤 많았던 것 같아요. 사춘기 때는 친구를 친구끼리 뺏는 일 많잖아요? 친구 한명을 몰래 따돌림시키는 일도 해봤어요. 아무튼 주눅드는 성격은 아니었어요. 털어놓기 부끄럽지만, 중학교 때 2 대 1로 싸워본 적도 있어요. 제가 이겼어요. 교복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싸웠죠. 제가 발 올려차기를 참 잘했어요. 그랬더니 걔네 둘이 주춤하더라구요. “어! 쟤 운동했나봐”라고 말하면서요. 덤비질 못하더라구요. 둘이서 한번에 덤비는데 제가 막 발차기로 나갔거든요. 오후 5시부터 밤 9시까지 장소를 옮겨가며 싸웠어요. 실은 싸운 이유 중 하나는 저의 견제도 있었어요. 저와 싸웠던 2명 중 한명이 꽤 예뻤거든요. 대화를 하다 말싸움이 커졌어요. 제가 그 예쁜 아이에게 “너 이따 학교 끝나고 남아! 교문 앞에서 기다려!”라고 했는데 걔는 그냥 그걸 대수롭지 않게 넘겼어요. 그런데 제가 먼저 교문 앞에서 딱 서서 둘이 나오는 걸 보고 “따라와”라고 한 거죠. 그러니까 남자중학교까지 소문이 쫙 퍼진 거예요. 누구누구랑 이정수랑 싸운다고요. 주위에 애들이 저희를 막 따라오는데 제가 “야, 다 따라올 필요 없어. 난 나만 싸울 거야”라고 말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과목은 역사였습니다. 아직도 사극을 많이 봅니다. 지금도 현대 배경 드라마는 안 봐요. 영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영어 시험을 볼 때 시험지에도 이름을 ‘이정수’라고 안 적고 장난 식으로 ‘리, 쩡, 쑤’라고 적어놨어요. 선생님들이 독특하다는 말을 가끔 하셨어요.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집
주눅들지 않는 말괄량이 기질
막내딸이라 아버지 사랑 듬뿍
대학 흥미 못 느끼고 카페 알바
1993년 8월엔 택시강도 당해
1994년 9월8일은 평범한 날
일하는 카페의 밴드마스터가
새벽에 양수리 카페 가자 졸라
운동화에 반바지, 반팔티에
지갑 하나 들고 ‘각그랜저’ 올라
그러면서도 혼자 있는 걸 좋아했어요. 만화가게를 참 많이 다녔어요. 친구들이 만화가게로 찾으러 올 정도로. 친구들이 엄마에게 “정수 찾으러 왔다”고 하면 엄마가 만화가게를 가르쳐줄 정도로요. 이현세, 허영만 만화를 좋아했어요. 조금 더 커서는 김성종이라는 작가의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죠. 또 저는 뭔가를 만들기를 좋아했어요. 가위로 무조건 옷이든 뭐든 자르고 그랬죠. 중학교에 입학하니 집 전체에 방이 세 칸이 됐어요. 그때 할아버지까지 함께 사셨어요. 할아버지랑 작은오빠가 같이 주무셨어요. 큰오빠는 당시 직장이 있어서 기숙 생활을 했고요. 큰언니는 일찍 결혼을 해서 집에 없었어요. 제가 중학생 때 큰언니가 결혼을 했어요. 일찍 한 편이죠. 그 전엔 세 자매가 한방에서 잔 거예요. 저는 그러다 못 견디면 안방으로 가서 부모님과 같이 잤어요. 막내라고 이것저것 심부름을 막 시켜 먹으니까 귀찮았던 거죠. 언니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또 결혼해서 결국 저 혼자 방을 썼죠. 2남3녀 중 막내입니다. 큰오빠랑 거의 열살 차이였어요. 집은 그냥 보통 집이에요. 지극히 가난하지도 않았고 지극히 부유하지도 않았어요. 못 먹고 못살고 입을 옷이 없는 그런 집은 아니었어요. 엄마, 아빠가 열심히 사셨죠. 아버지는 건설업 등 몇가지 업종에서 일하셨어요. 직접 사업을 하신 건 아니고요. 엄마에 대한 기억은 좀 무서우셨다는 거예요. 제가 워낙 말썽을 피우고 겉도는 행동을 많이 했으니까 그런지. 어머니는 정동시장에 야채가게를 내셨어요. 계산이 빠르셨고 돈에 대해서는 엄하셨죠. 엄청 억척이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중학생 때까지 저랑 같이 주무셨어요. 그리고 극장도 나만 꼭 데리고 가셨고. 한번도 아버지에게 맞아본 적이 없어요. 전철을 타도 저를 데리고 다니고요. 어딜 가든 그러셨어요. “우리 공주, 우리 공주” 이렇게 부르셨을 정도니까요. 고등학교 진학할 때도 조언을 주셨어요. 제가 공부는 흥미 없고 예술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했어요. 그때 배우 강수연, 김희애가 유명했어요. 가끔 친구들한테서 강수연, 김희애 닮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또 연극을 좋아했어요. 엄마 비상금 감춰놓은 데를 용케 알아서 그걸 몰래 들고 가서 광화문에서 했던 연극 <햄릿>을 봤어요. 야간자율학습이 없는 날은 친구를 만나도 8시면 집에 왔죠. 그런데 연극을 다 보고 오니까 9시 반~10시가 되더라구요. 집에 오니 아버지가 “어디 갔다 왔냐?”고 하시더군요. 혼났죠 뭐. 영화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극장의 칙칙한 냄새에 습기 찬 느낌이 안 좋았어요. 지금도 영화 보러 극장에 잘 안 가요.
예고를 가겠다고 했더니 아빠는 ‘올라가는 일만 생각하지 말고 내려가는 일도 생각해야 한다’시며 반대하셨죠. 연예계에 대해 ‘웃음을 판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보셨던 것도 반대 이유 중 하나였어요. 결국 강남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종교는 없었어요. 엄마는 불교 신자였죠. 집 옆의 조그만 암자에 다니셨어요. 그곳에서 가족들 신수를 보시곤 했어요.
버스에 치이다
대입시험인 학력고사는 봤어요. 원서는 넣기 나름이었는데 제가 대학에 흥미가 없었어요. 친구들은 4년제 대학도 가고 전문대도 갔죠.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집에서 지내며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백화점 아르바이트 등 몇가지 일을 하다가 나중에 했던 게 카페 서빙이었어요. 스물두세살(1980년대 말)쯤이었던 것 같아요. 카페는 강남에 있었는데 룸살롱 같은 거창한 유흥업소가 아니었고, 낮에는 회사원 상대로 수제비나 돈가스 같은 점심을 팔면서, 저녁 8시쯤 되면 음식도 팔고 술도 파는 그런 대중음식점이었죠.
친구들과 어울려 그냥 청바지 입고 나가고 티셔츠에 운동화 신고, 머리 질끈 묶고 나갔어요. 화장도 별로 안 할 때니까. 편하게 출근했어요. 저녁 8~9시에 나가고 그랬죠. 아니면 오후 4시에도 할 일 없으면 나가곤 했어요. 거기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쏠쏠히 돈도 벌었어요. 식당에 웨이터와 주방 아줌마가 한명씩 있었어요. 주인 언니도 있었고요. 주로 카운터에 앉아 음악과 장부 기재 관리하는 것을 도왔죠. 그러다 단체 손님이 오면 옆에 앉아서 안주 서빙도 하고 치우는 것도 도왔어요. 앉아서 서빙해주는 걸 좋아하는 손님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용돈벌이는 충분했어요.
그 사건(지존파) 전인 1992년에도 사고나 범죄 같은 걸 경험한 적이 있었어요. 1992년 12월쯤에는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밤에 카페에서 나와 집에 가려고 횡단보도에 서 있었어요. 파란불이 들어왔어요. 그때 38-2번 버스가 갑자기 꺾어져 왔어요. 저는 파란불이니까 건넜는데 버스 기사는 저를 못 본 거예요. 어쨌든 버스 기사가 신호를 안 지킨 거죠. 그때도 운이 좋았어요. ‘왜 불행하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지?’라고 생각할 게 아니었어요. 운이 좋았어요. 왜냐하면 버스가 저를 칠 때 제가 순간적으로 몸을 버스 진행 방향으로 틀어 크게 다치지 않은 거죠. 한 발짝만 더 갔으면 왼쪽을 다치고 버스 앞쪽으로 쓰러졌을 텐데, 찰나에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쓰러졌던 거예요. 그러니까 오른쪽 골반 쪽에 상처가 나고 오른손이 땅바닥에 닿으면서 순간적으로 기절을 한 거죠.
마침 뒤따라오던 승용차가 있었어요. 신호에 서 있었던가 봐요. 쓰러져서 있는데 정신이 남아 있었어요. 버스 기사가 안 내리고 있는 걸 제가 느꼈어요. 승용차 운전자가 저를 막 깨우더라구요. “아가씨! 아가씨!”라고 소리치며 깨우더니 그 버스 기사한테 “교통사고 났잖아요!”라고 외쳤어요. 강남 세브란스병원으로 갔어요.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멀쩡했어요.
1993년 전에 제게 ‘범죄’라는 단어는 피부에 와닿는 말이 아니었어요. ‘범죄’라는 말을 듣고 떠오르는 건 ‘김성종 소설’ 정도였죠. 1993년 처음으로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해 8월 택시 강도를 당했어요. 그때도 카페 일 마치고 퇴근하던 여름밤이었어요.
카페 바로 앞 건널목에서 택시를 잡았어요. 조수석에 스포츠머리의 남자가 타고 있더라고요. 운전기사는 좀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었어요. 안 타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기사 쪽 조수석 창문이 열리면서 “이분은 앞에 가다가 내릴 거예요”라고 기사가 말했습니다. 그땐 합승이 가능할 때였거든요. 타기에는 찝찝했는데 그렇다고 안 타겠다고 말하기도 이상했죠. 뭔가 싸늘한 느낌도 들었지만 일단 뒷자리에 탔어요.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그러면서 문 바짝 옆에 타서 여차하면 차문을 열고 내리면 된다고 생각했죠.
조금 뒤 신호등에서 멈추길래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에 차 앞문이 먼저 열리더군요. 제가 내리려 문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뒷문이 열리면서 앞에 앉았던 남자가 제 옆에 탔어요. 저를 안쪽으로 밀어넣더니 과도를 제 옆구리에 댔어요. 뾰족한 게 옆구리에 느껴졌어요. 그러더니 왼쪽 어깨 위에 팔을 올리고 목을 감더니 “조용히 해”라고 말했어요. 목소리에서 떨림을 느꼈어요. 핸드백이 무릎 위에 있었어요. 가방을 빼앗아 뒤지기 시작했어요. 지갑에서 돈을 빼내면서 주민증을 확인하더군요. “너 어디 사는지 다 아니까 신고하면 찾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한창 택시기사 성폭행 사건이 회자됐어요. 머릿속에서 오만 생각을 했죠. ‘끌려가면 택시에서 성폭행당하고 낯선 곳에 버려지는 건가?’라고 생각했죠. 한창 당시 그런 뉴스를 접할 때였어요. ‘사창가로 끌려가나 보다’라고도 생각했어요. 다만 이상하게 죽는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구요. 당시에 제가 엄마의 쌍가락지 두 개를 끼고 롤렉스 디자인 반지까지 반지 3개를 끼고 금목걸이 닷돈짜리를 하고 있었어요. 그날 유난히 친구들한테 반지 자랑을 많이 했어요. 남자가 목걸이에 반지에, 지갑에 있던 돈 5만원도 가져갔죠. 저더러 눈을 감으라고 하는데 너무 무서우니까 눈이 안 감기더군요. 그러다가 운전하는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는데 엉뚱하게 ‘아, 이주호, 해바라기(포크 그룹)의 이주호 참 많이 닮았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를 운행하면서 “지금부터 가만히 있어”라더군요. 영동대교 아래 도로를 달렸는데 문득 대전 방향 표지가 보였어요. ‘나 이제 팔려가는 건가’라고 생각했어요. “또 뒤져봐. 돈 될 거 있나”라고 운전사가 말했어요.
그때 지인이 군대 가기 전에 준 ‘코인반지’가 있었어요. 동전을 녹여 만든 반지였어요. 돌아가신 엄마가 줬다고 하면서 제대하면 달라고, 제게 보관해 달라고 했던 반지였어요. 그 반지까지 뺏긴 거예요. 순간 그 반지는 외국에서 온 반지니까 제가 살아나더라도 백화점에서 구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한번만이라도 껴보게 해달라고 해도 절대 안 뺐던 반지였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부탁이 있는데요, 그 반지는요, 금도 아니고 동전을 녹여 가지고 만든 반지인데, 남자친구의 돌아가신 엄마가 준 거래요. 그거는 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돈도 안 돼요.” 그랬더니 앞에 앉은 운전기사가 반지를 깨물어 보더라구요. 그러더니 “야, 돌려줘!”라고 말했습니다.
강도가 준 차비 2만원
천만다행인 건, 그 두 명의 강도가 저를 살려준 거예요. 금품만 빼앗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차를 세웠어요. 차비 2만원도 손에 쥐여주면서 택시 타고 가라더군요. “눈 감고 내려! 눈 감고!”라고 말했어요. 제가 내리자 “앞으로 다섯 발자국 걸어가”라더군요. 눈을 감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상태에서 뛰다가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았어요. 공사중인 컴컴한 아파트 같은 것들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다시 뒤돌아 나와서 찻길 쪽으로 걷다가 편의점이 하나 있더라구요. 공중전화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죠. 편의점에다 택시 하나만 불러달라고 했어요. 개인택시가 와서 집까지 무사히 갔는데 신고는 안 했죠. 경찰에 신고해봤자 잡을 수 없다는 불신과 금품만 빼앗고 택시비까지 줘서 나를 살려준 게 고맙다는,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철없는 생각을 한 거죠. 또 당시 제가 경찰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어요. 그때까지 단 한번도 경찰서에 가본 적도 없었고요.
1993년도에 택시 강도를 당하고도 별다른 트라우마가 없었어요. 그 일을 겪고도 그해에 택시를 아무렇지 않게 타고 다녔죠. 그런데 이듬해가 되자 갑자기 트라우마가 닥치더군요. 아무 택시나 타지 못했어요. 개인택시를 골라서 탔습니다. 택시를 타면 기사 인상을 봤고요. 앞에는 절대 안 탔어요. 뒷좌석 문 쪽에 바짝 붙어 앉았죠. ‘여차하면 뛰어내린다’고 생각하면서요. 택시에서 내리면 택시 운행 반대 방향으로 후들거리며 걸었죠.
그날, 1994년 9월8일도 평범한 날 중 하루였어요. 몸이 계속 이유없이 아파서 몸무게가 42㎏까지 내려갔어요. 의욕상실의 연속이었죠. 카페에서 단체주문이 있다면서 나오라고 해서 나갔죠. 저녁에 가끔 오는 밴드마스터와 친해졌어요. 스물두세살 때부터 봤던 사람이기 때문에 저를 굳이 여자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서로 챙겨주는 사이였죠. 가끔 밤에 저를 강북 집에 데려다주면서 친해졌어요. 그 사람은 차가 있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후배랑도 친했어요. 그날도 밤 12시 넘어 제가 자취방에 퇴근해 들어왔어요. 몸도 아프고 피곤해서 씻고 잠을 자려는데 밴드마스터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온 거죠. 친한 여자 후배가 남자친구랑 양수리에 위치한, 자주 가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대요. 우리도 그곳으로 오라 했다더군요. 그때가 새벽 2시쯤이었어요.
그날 저는 생리중이었고 몸도 무겁고 기분도 우울해 안 가겠다고 했어요. “후배 커플이 기다리고 있다”며 같이 가자고 조르더군요. 팔당댐 지난 곳에 위치한 레스토랑이 있었어요. 평소에 좋아하던 곳이었죠. 새벽까지 영업을 했어요. 레스토랑에 안 들어가더라도 거기 잔디밭에 앉아서 강을 보면서 커피 마시면 분위기가 좋았어요. 갈대가 있는 곳에서 물안개가 새벽이면 야트막하게 깔렸죠.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나에겐 4~5월이면 물안개가 피어 올라와서 그곳에 많이 갔어요. 올 때는 청평 쪽으로 돌아왔죠.
그날은 이제 ‘밴드마스터를 그만 만나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침묵으로 일관했던, 조금 우울한 새벽이었어요. 드라이브 시작할 때부터 신경질 부리고 언성을 높였죠. 운동화에다 반바지에다 면으로 된 반팔티에 간단하게 입고 지갑 하나 달랑 들고 나왔어요.
새벽 바람이 쌀쌀했어요. 지금 ‘각그랜저’라고 부르는 승용차 앞좌석에 탔어요. 밴드마스터가 큰마음 먹고 중고로 산 회색 그랜저였죠. 차 타고 가는 동안 말 한마디도 안 했어요. 얼굴 한번 안 쳐다봤어요. 사건이 딱 일어날 때까지도. 저는 그냥 창문 밖만 봤어요. 그 역시 말 한마디 안 하고 운전만 하더군요.
삐뽀삐뽀…그들도 당황하다
어느 순간 제 몸이 앞 유리창까지 부딪힐 정도로 급정지를 했어요. 제가 “뭐야!”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앞을 보는데 뭔가 어수선하게 사람이 탁 튀어나오고 제 옆 차문이 열리면서 오른쪽 광대뼈 쪽을 무언가에 맞았어요. 그리고 가스총이 발사되는 것까지 느꼈습니다. 어두운 길 한가운데 승용차 한 대가 길을 막은 거예요. 밴드마스터도 성격이 있는 남자라 문을 열어 가지고 욕을 하면서 창문을 내렸어요. 열린 창문으로 가스총이 발사되고 강제로 문을 여니 도난경보음이 울렸어요. 차에 그런 경보시스템이 돼 있어 ‘삐뽀삐뽀’ 소리가 나니까 그들도 당황을 한 것처럼 보였어요. 무리 중 한명이 차를 운전했어요.
순간적으로 저는 그 사람들 머리가 짧은 걸 보고 군인이거나 죄수들이 감옥을 탈출해 차량을 빼앗은 걸로 생각했어요. ‘군인들이 무슨 연습을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심지어 ‘영화 찍나?’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범죄라고는 절대 생각을 안 했어요. 물론 택시 강도를 당한 적이 있지만 그게 범죄 경험 전부였어요. 드라이브를 엄청 많이 다녔는데 늘 낯선 사람도 태워주자는 주의였죠.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한 걸 몰랐죠. 너무 황당한 상황이다 보니 ‘꿈을 꾸고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죠. 팔당댐 주변에 시골 작은 동네들이 있는데, 그곳 어디쯤에서 우린 결박당하고 단단히 묶여 1.5톤 화물차에 물건처럼 던져졌죠. 그 장소를 지금도 찾아가라면 찾을 수 있어요. 개가 짖는 소리도 들렸고 막다른 둔덕에 쌓인 음습함이 느껴졌죠. 차 두세 대가 딱 서 있을 정도의 장소였습니다. 그 남자들이 미리 답사를 했겠죠.
순간적으로 승용차가 길 막고
창문을 내리자 가스총 발사
‘죄수들이 감옥을 탈출했나?
군인들이 무슨 연습을 하나?
아니면 꿈을 꾸고 있나?’ 생각
결박당한 채 화물차에 실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한참 가
눈에 붙여진 테이프를 뜯고
처음 고개 들어 본 이가 김현양
비웃는 듯한 눈빛에 비열함 느껴
“이제 네가 하는 말과 저 남자 말
맞춰볼 거니까 틀림 있으면 죽고
맞다 싶으면 살려줄 수도 있다”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나와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 판단
저는 트럭에 먼저 실렸어요. 끈과 테이프로 발목을 묶고, 팔은 깍지 낀 상태로 뒤로 묶이고 입도 눈도 테이프로 가려졌죠. 그때에야 제가 ‘아, 이젠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실감했어요. 비로소 뉴스 등에서 듣고 본 살인에 관한 사건들이 떠올랐어요. 화물차 안에서 계속 죽음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나를 좋아해준 그 남자 생각이 나더라구요.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09522.html -> 2편 '지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0519.html -> 3편 '탈출'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1191.html -> 4편 '체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2231.html -> 5편 수사와 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