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시간이 무르익었다.
술 한 잔을 걸친 동생이 익숙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생은 어릴 적 납치를 당한 기억이 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자리에서 대부분은 회사생활이나 연애 상담, 여행 풍경 등을 읊조리고는 하지만
동생의 레파토리는 조금 다르다.
누구라도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한 경험.
동생은 또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겐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였다.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까?"
동생은 어릴 적 납치를 당해 죽을 뻔했다.
상대는 정신착란자였다.
피해망상에 환청, 과도한 가학성까지.......
자신의 울분을 힘 없는 어린 아이에게 풀어내는 병신같은 놈이었다.
동생은 정말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평소에 몸이 약해 자주 찾아가던 약국의 수납원이 동생의 얼굴을 기억한 덕이었다.
어두침침한 골목에서 수상하게 행동하는 남자의 행태를,
그 남자가 차에 태운 동생의 축 늘어진 몸과 함께 수납원은 기억했다.
차 번호가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살해된 피해자는 총 여섯.
흙먼지가 달라붙은 동생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오열했다.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동생 역시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다.
뒤통수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마취약이라도 흡입한 건지 더듬대며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했다.
범인은 동생을 꽁꽁 묶어 어둡고 차가운 골방에 홀로 버려뒀다고 한다.
낡은 판자로 창문까지 틀어막아 희미한 빛의 번짐만이 낮과 밤의 경계를 갈랐다고.
그곳에서 정신을 차린 순간이 동생이 얘기하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동생은 막상 범인이나 범죄에 대해서는 그다지 입을 열지 않는다.
그건 신문 기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혹여라도 있을지 모를 후유증을 염려하는 내게 동생이 말했다.
동생이 언제나 되짚어내는 이야기는 그 낯선 골방에서 만난 신비한 친구들에 관한 추억담이다.
옴싹달싹 못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꺄르르 웃고 허공을 떠다녔다는 아이들.
낮에는 동생을 바라봐주고 밤에는 노래를 부르며 겁에 질린 동생을 달래줬다는 아이들.
본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모두 다 그 아이들 덕분이라고 동생은 웃으며 이야기를 끝맺고는 했다.
처음 동생이 골방의 친구들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부모님은 심각하게 오랜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게 아닌지 깊이 염려하셨다.
더군다나 동생은 살해당한 아이들의 얼굴을 봐야한다며 평소같지 않게 고집을 부렸고
처음 본 낯선 아이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봐! 내 말이 맞잖아!" 자신의 경험을 확신하는 눈치였다.
시간이 흐르고 비틀렸던 것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을 때
동생은 만남을 허락한 피해자들의 부모에 한해 찾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아이들이 준 용기와 다정함과 우정에 관해 동생은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누구든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일부는 흐느꼈고 더러는 부정했다. 어떤 이는 말 없이 동생의 손을 붙잡았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이후에도 동생은 과거를 더듬듯 이야기를 읊고는 했다.
화두는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불행한 일을 겪었는데도 동생은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자랐다.
'그 이야기'를 꺼낼 때면 창백해지던 부모님도 이제는
꿈같은 동생의 이야기를 무던하게 듣게되었다.
이제는 수백번 들어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어릴 적의 동생을 떠올려보고는 한다.
유달리 몸이 약해 햇빛을 쐬지 못한 채 책을 들고 방 안에 머물렀던 어린 나의 동생을.
어쩌면 동생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이 다른 아이의 목숨을 살리고자 영혼으로나마 그 컴컴한 골방을 떠돌았다고.
악취와 냉기 속에서
공포에 싸인 한 아이를 위해.
그래서 동생과 달리 나는, 나만 아는 이야기를 남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 미친놈이 어떤 의도에서든 베어낸 아이들의 머리를 진열하듯 골방에 매달아 놓았다고......
형사들이 쑥덕이던, 신문에도 나오지 않았던 얘기.
어두운 방 안에서 창 위에 덧대어진 판자는 과연 얼마만큼의 빛을 투과시켰을까.
동생이 이야기를 꺼낼 때면 가슴 위로 장막이 드리워지는 이 이야기가 바로 내가 아무에게도 꺼낼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