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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미스테리 쪽방촌에도 사랑이 있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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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4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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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회색 슬레이트 집들이 모여 미로를 만들었다. 좁디 좁은 골목은 휠체어 하나 들어가지 못 할 정도로 좁았다. 깨진 시멘트 바닥, 고여 썩은 물 웅덩이들.



일렬로 나열되어 있는 문 안에는 하나의 방을 자잘하게 쪼개어 방들을 만들어 놓았다.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은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 곳 쪽방촌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늘 하루 목숨을 부지 한다는 본능으로 살아간다.

다달이 20만원의 월세를 내며, 노숙인이 되지 않겠다는 그 열망. 살아야 한다는 삶의 본능.



누런 삼베 위에 덧대어진 여러 색깔의 싸구려 천들. 각설이 영진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쪽방촌 미로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다.



그는 쪽방에서 태어났고, 쪽방에서 자랐다.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다. 미로 속에 갇힌 듯, 영원히 그 곳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삶과 죽음은 미로 속에서 이루어졌다.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그는 가난했다. 평범한 가난이 아닌 불행한 가난. 다리를 절어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의 엿가위를 물려 받았다. 부모님은 그에게 쪽방만 남겨 주고 현실과 작고했다. 그는 젊고 불행한 각설이가 되었다.



쪽방촌은 복잡하다. 영진은 골목벽에 붙어 있는 나무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또 다른 골목이 나왔다. 가난과 불행에 빠지면 벗어나기 힘들 듯,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9-1, 꼭 죄수방 번호 같지만 영진의 집 주소이다. 죄수와 다를 것 없는 삶.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그의 옆방에 젊은 여자가 이사를 왔다. 목에 카메라를 걸치고 자신의 집 안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영선이라고 했다. ‘영’자가 똑같다며 새침한 웃음을 웃던 그녀, 처음으로 영진에게 웃어주던 여자였다.



영선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쪽방촌과 어울리지 않았고, 가난이라는 옷을 일부러 맞춰 입은 듯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다 필요 없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었고 취약계층의 약자가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 대해 주는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사진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가족은 뿔뿔히 흩어졌고, 자신에게 남은 건 지금 카메라뿐이라고 했다. 영진은 그런 그녀가 가여웠다. 그래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폐지와 고철을 팔기 시작했고, 각설이 일을 보통 때보다 두 배로 했다. 그래봤자 하루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돈이 만원 안팎이었지만 영선에게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불편하고 아픈 다리의 고통을 팔고 돈을 벌었다.



영선은 자신이 준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그리고 사진으로 남겼다. 그녀는 낮 동안 쪽방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의 일손을 돕기도 했다. 그리고 사진을 남겼다. 영진은 사진에 집착하는 영선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무너지는 현실을 붙잡기 위해 사진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선은 빠른 시일 내에 적응했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늙고 추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쪽방촌에서 유일하게 젊은 아가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들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다가갔다. 영진은 불안했다.



몇 주가 지나고 나서 영선은 나에게 말했다. 영상을 찍고 싶단다. 이 암울한 현실에서 쪽방 주민들과의 행복한 일상을 담고 싶다고 했다.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생업을 내팽겨치고 그녀를 찍기 시작했다. 주민들과 어울리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 좁디 좁은 방 안에서 생활하는 영선의 모습. 빠짐 없이 기록하려고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녀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구나. 이런 일을 영진에게 맡긴다는 것은 그를 이곳 누구보다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밤 영진은 영선에게 고백하기로 했다. 이때까지 모아 둔 돈을 끌어 모았다. 이번달 월세까지 끌어다 모으니 조그마한 반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줄 수 없었다. 영선이 자신을 추행하려던 중년 남자를 밀쳤고, 발을 헛디딘 그 남자는 뒤로 넘어져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사망했다. 영진은 영선을 지켜야 했다. 이 어둡고 불쾌한 미로 속 영진은 자신말고 영선을 구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영진은 영선을 대신하여 감옥으로 갔다. 그는 그래도 기뻤다. 밖에는 영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출소한 그는 감옥에 들어갔던 그 날보다 더욱 암담한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는 쪽방촌에 있지 않았다. 주인은 말했다. 영선은 한 달만 살고 이 곳을 떠났단다. 애초에 한달만 계약을 했다고.



그녀는 가난하지 않았다고. 영진의 불편한 다리가 몸뚱이를 견디지 못하고 꾸깃하게 접혀버렸다.









“그렇다니깐, 너가 일단 경험해봐야 한다니깐. 요즘은 거짓으로 하면 면접관들이 다 알아. 진짜 현실을 경험하고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같은 거를 모아야 해. 원래라면 나 있잖아, 이 회사 못 다녔거든? 근데 쪽방에서 있었던 겪었던 일들을 사진이랑 영상으로 쫘아악 보여주니깐 면접관들 표정이 장난아니더라구. 바로 나 합격 했잖아.”



카페에서 영선은 정장을 입은 채 앉아 자기자랑을 늘어 놓았다. 그녀의 앞에는 부러움의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후배들이 앉아있었다.





“가난도 경험이고 스펙이니깐 너희들도 직접 경험해봐. 좋은 경험될걸?”







영진이 영선을 처음 보았을 때, 자신도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걸 느꼈다고 했다. 쪽방촌에서도 사랑이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뙤약볕 아래 경박한 트로트가 퍼지고 가위질을 하는 각설이. 그의 인생에서도 사랑이 있을 줄 알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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