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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우, 후우우”
늦은 밤, 남자는 악몽을 꿨는지 자다가 벌떡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미적지근한 식은땀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는 누가 들을세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역할놀이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는 잔혹한 살인극이 막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악몽이 되어
그를 괴롭혔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서로를 죽이기에 혈안이 된 그들의 모습. 그런 그들을
죽이고 살아남은 자신. 핏빛얼룩이 지워지지 않은 손바닥과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
세상이 수십 번 변해도 잊혀 지지 않을 끔찍한 기억. 남자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몸을 쓸어내렸다.
목덜미에서부터 쓸어내린 손바닥이 정확히 그의 심장에 멈추었다. 그의 손이 정지한 심장은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거칠게 요동쳤다. 펄떡거리며 뛰는 그의 심장이 그에게 말했다.
복수를 하고 싶다고.
“최재희 씨?”
“어? 소형 씨”
그건 기막힌 우연이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옛날의 동지 아니, 적. 4일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둘은 그 자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윽고 그 둘은 조용한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희의 생각보다 소형, 아니 상민은 영악했다. 본명이 상민이라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재희는 숨이
턱 막혔다. 물론 그때의 역할놀이가 끝났지만 저런 순진한 얼굴로 모든 사람을 속인 상민이
무섭게 느껴졌다.
“재희 씨도 아직 있죠? 폭탄”
상민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은 재희 역시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상민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즐거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이 상황을 달관한 듯싶었다.
“따로 협박이 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이 폭탄은 족쇄로 보여 지네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굳게 닫으려는 족쇄”
재희의 말에 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놈 잡힐 거 같아요?”
재희가 묻자 상민이 곰곰이 생각했다.
“영원히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죠. 아직도 경찰은 단순한 실종사고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누구도 어딘가에서 살인놀이가 펼쳐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걸요?”
“놈한테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복수라뇨?”
“얼마 전 실종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형사를 봤는데, 상당히 많이 접근한 형사가 있더라고요. 그라면 그놈을 잡고, 우리에게 도움을 줄지도 몰라요.”
재희의 말에 상민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놈에게 발각되면 죽는 다는 걸 알고 있으신 거죠?”
“놈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히 접근해야죠.”
“어떻게요?”
재희는 숨을 고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2
매끄러운 아스팔트를 달리던 트럭이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로 들어서기 바로 직전, 운전사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며 흔들리려는 몸뚱이를 고정시켰다. 트럭은 곧 자갈과 돌 따위가
깔린 비포장도로로 들어섰고, 차체는 운전사가 예상했던 거보다 심하게 위아래로 요동쳤다. 전신에
힘을 잔뜩 줌으로써, 충격에 대비를 한 운전사는 가까스로 몸을 고정시켰지만, 조수석에서 졸고 있던
남자는 차체의 떨림에 맞춰 몸을 덜덜 떨더니, 끝내 옆 유리창에 머리를 쿵하고 처박았다.
“아오!! 아파라!!”
남자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통을 양손으로 삭삭 비벼댔다. 그 꼴이 꼭 동물원에서 재롱을 부리는
원숭이 같이 우스꽝스러워 운전사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괜찮아? 푸훕! 푸하하!”
운전사이 큰소리로 웃자, 남자는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그리고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뭐가 웃겨요, 아파죽겠고만. 그나저나 이런 아스팔트도 제대로 안 깔린 촌구석에 우리 같은 업체를 부를만한 일이 있을까요?”
덜덜 떨리는 차체에 맞춰 남자의 푸념도 덜덜 떨렸다.
“낸들 아냐? 포장만 하는 게 아니라 운송도 해야 돼, 거기다 이번에 우리가 받는 가격을 생각해보면 잠도 못 잘 정도로 작업량이 많을 걸?”
그들의 업체가 포장하는 물건들은 주로 대형 쇠파이프나 고무호스 또는 공업용탱크 같은 공업용품
따위였는데, 주문받는 대로 그 크기에 상관없이 어떻게든 포장을 해야 했다. 대체로 나무판자나
철판으로 테두리를 감싸거나 특수제작 된 끈으로 떨어지지 않게 동여매면 끝이 났다. 말로는 쉽지만,
단 두 명이서 행동하기 때문에 큰 규모의 공업용탱크를 포장할 때는 반나절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물론 크기에 따라 보수가 꽤 짭짤해지기 때문에 그들의 업체에서는 작은 포장보다는 힘과 시간이 더
들더라도 커다란 포장하는 걸 선호했다. 그리고 오늘 사장이 그들에게 말했던 금액으로 봐서 오늘
포장해야 할 놈은 보통 놈이 아니었다.
“이야!! 대박주문이 들어왔다. 야, 네들 둘이 다녀와라”
전화통화를 마친 사장님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피운 채, 사무실에 앉아서 쉬고 있던 직원들에게 다가왔다.
평소에 콤플렉스라며 웃을 때마다 가리던 툭 튀어나온 앞니를 그대로 드러내며 웃는 걸 보니 뭔가
큰 건수를 건진듯했다.
“얼마나 대박인데요?”
남자는 모자를 반듯하게 고쳐 쓰고, 책상에 놓여있던 목장갑과 트럭열쇠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름의 출동준비였다.
“얼마나 대박이냐고? 큰 거 5장”
사장은 살이 쪄서 두터운 손가락을 쫙 펴 보이며 말했다.
“오백이요?”
오백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생각보다 높지 않은 금액에 실망해서 영 아니라는 투로 고개를 흔들었다.
오백이면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왕래하는 고무회사에서 정기적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이었고,
몇 달에 가끔 있는 팔백짜리 롤러보다 못한 금액이었다.
“오백? 장난하세요?”
“아니, 오천!!”
그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사장은 오천이라고 소리쳤다. 그가 입을 떼자마자 사무실에 있던 전원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앉아서 느긋이 있던 다른 직원들도 생각지도 못했던 큰 액수에 의자를 넘어뜨리며
일어났다.
“오, 오, 오천이요?”
“한 건에 오천?!!”
너무나 큰 액수에 말을 더듬었다. 오천이면 역대 최고로 받았던 금액보다 다섯 배나 높은 금액의
건수였다. 사장의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그래, 오천! 액수가 커서 경력 좀 있는 너희들 시키는 거니까 잘하고와!”
사장님이 으쓱거리며 말했다.
“어딘데요? 어디까지 가야돼요? 대기업이에요?”
“아니, 기업단위가 아니라 개인이야, 저기 충북 어디냐, 아무튼 멀지는 않은데 좀 후미진 곳이야”
“이야, 진짜 후미진 곳이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내비게이션 쓸모없어지는 지역이었다. 길은 길이 아니었고, 주변에 건물이나
하다못해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맞긴 맞는 거야?”
재민이 사장님이 준 종이쪽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순간 주변을 돌아보는
그들의 눈에 헐렁한 추리닝 차림의 아저씨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저긴가 보다”
그들은 추리닝 차림의 아저씨 곁에 차를 세우고,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아저씨를 보니
후줄근한 게 더욱 후져보였다. 겉으로 봐서는 오천만원이라는 큰 액수를 지불할 만큼 부유해
보이지 않았다. 그 후줄근한 아저씨는 뭐가 그리 급한지, 지금 막 도착한 그들에게 옆에 있는
나무박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겁니다. 오늘 옮겨야할 물건입니다. 오늘 안에 조심히 옮겨다 주세요.”
5천만 원이라는 큰 액수에 비해 너무나 작은 나무상자 몇 개에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다예요? 더 없어요?”
“예, 대신 안에 중요한 물건이 있으니까, 조심해서 오늘 안에 꼭 이곳으로 전해주세요.”
아저씨는 남자에게 종이쪽지를 건넸다. 그곳에는 대충 그려놓은 지도와 글자 몇 줄이 적혀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행동했다. 워낙에 적은 작업량에 순식간에 일이 끝나버렸다. 사실 일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게 이미 포장된 나무박스에다가 판자만 덧대 거뿐이라 실질적으로는 그냥 운반 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뭔가, 김빠지는 데요?”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치?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별로네, 일을 한 거 같지도 않아”
그들은 박스를 모두 옮기고 트럭에 몸을 실었다.
“그럼 조심히 옮겨주세요.”
“예,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트럭이 출발하고, 얼마 가지 않아 운전을 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무 일이 빨리 끝나서 시간이 많이 남네.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할까?”
그는 손으로 소주를 마시는 제스처를 취하며 물었는데, 그 손짓이 꽤나 가벼워 보였다.
“그래도 될까요?”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은 했지만,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기 일보직전이었다.
“뭐, 어때? 시간도 많은데 한 잔하자”
“그래요”
#3
뒤집어진 트럭이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있다. 몇 바퀴를 굴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체가 많이 손상되어
트럭,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트럭에 실려 있던 내용물들도 도로 한복판에 쏟아져 있었다.
돌아다니는 차가 많았더라면 사람 꽤나 죽었을 대형교통사고였을 테지만, 다행히 도로가 한적했던
덕분에 인명피해는 별로 없었다. 사망자는 운전자와 조수석에 탄 두 남자뿐이었다.
이만하면 싸게 끝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정작 문제는 교통사고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문제는 트럭에 실려 있던 박스의 내용물.
트럭에 실려 있던 박스들이 떨어져 산산 조각났고, 그 안에서 예상치 못했던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코를 찌르는 구린내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이겨진 살덩이들.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곧장
달려온 윤 형사는 이마에 잔뜩 주름을 내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꽤나 연륜이 묻어나는 주름을 띈
그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 뭐야? 도대체 뭐가 쏟아져 나온 거야?”
윤 형사는 코끝에 시큼한 냄새가 걸리는지 코를 연신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핏덩이의
양으로 봤을 때, 한 두 구의 시체가 아니었다.
“예, 그게 도로에 널려 있는 게 사람의 살덩이로 보여 지는 데요?”
옆에서 조사를 하던 수사관이 윤 형사를 뒤따라가며 대답했다.
“그걸 몰라서 묻나? 아니, 도대체 시체가 왜 이런 곳에 널브러져 있는 거냐고? 그것도 이런 대낮에 도로 한복판에, 도대체 누구야? 처음에 현장에서 연락할 때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지껄인 놈이!!”
“저, 저는 아닙니다.”
수사관이 대답하자 윤 형사가 정색을 했다.
“장난해?”
“죄송합니다.”
표정을 구기던 윤 형사가 답답했는지 담배를 물었다. 그는 항상 답답하거나 깊이 생각하고 싶을 때,
담배를 물곤 했는데 지금 이 딱 그랬다.
“그래, 뭐 조사한 거 있어?”
“네, 있습니다. 신원조사를 해본 결과 운전자와 조수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포장운송 전문 업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송재민과 김영민. 트럭에 적혀있는 운송업체에 연락해본 결과 그 둘은 오늘 아침에 회사에서 나와…….”
“그러니까 차에 타고 있던 놈들은 그냥 주문받고 운송만 해주는 놈들이라는 거지? 여기 처참한 꼴을 만든 장본인이 아니라는 거잖아?”
윤 형사가 말을 딱 잘랐다.
“그러니까 그게 사고의 원인은 음주운전으로 추정되는데, 그게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근처 술집에서 그들이 술을 마시고…….”
“펑!!!”
순간 시체를 수거하던 현장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윤 형사와 수사관 모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굉장한 크기의 폭발음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소음이었다.
“뭐야? 이 소리는?!!”
윤 형사가 물고 있던 담배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으아아아!!!”
폭발음이 난 곳에서 순경하나가 팔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폭발물에 손을 다친 것으로 보여 졌다.
“이봐, 괜찮아? 빨리 응급처치 해”
윤 형사의 명령에 사람들이 달려와 그를 데려가 응급처치를 했다. 다행히 손모가지는 그 자리에
붙어있지만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게 툭 건드리면 떨어져 나갈 거 같았다. 게다가 화상도 꽤나 심해서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테러야? 아니면 뭐야?”
놀란 수사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시체에 폭발물이 장착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시체를 수거하던 대원 하나가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슴부위 쯤으로 보이는 살덩이였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기계가 부착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게 폭발물인 거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윤 형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모두들 살점 수거할 때 조심해! 폭발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빨리 본부에 연락해서 폭발물전담 불러와”
“예, 알겠습니다.”
윤 형사는 그렇게 소리를 치고는 침을 찍 뱉었다. 왠지 큰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입안이 텁텁해진
윤 형사는 다시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깊게 한 모금 빨았다.
얼마 후, 트럭에 실려 있던 시신들의 신원을 검사한 결과가 나왔다.
최근 실종사건이 접수된 사람이라는 점,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흔적들 그리고 폭발물.
꽤나 여러 가지의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물론 각 시신별로 흉기에 찔린 상처부위라던가,
총알이 관통한 흔적 그리고 폭발 등, 사인은 다양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 형사는 역시 실종사건의 단서를 찾아 나선 거였군요.”
조사파일을 보던 임 형사가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의 손에 들린 신원조회 명단에는 동료였던
박상원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얼마 전 조용히 사라져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박 형사의 이름을 본 그는
단박에 그가 관련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됐어, 그만 해”
윤 형사가 흥분한 임 형사를 다그쳤다.
“그렇지만!”
“너, 내가 경고하는데 이 사건 해결하겠다고 날뛰지 마, 박상원이처럼 되기 싫으면”
붉어진 눈으로 노려보는 윤 형사의 말에 임 형사는 울분을 삭혔다. 윤 형사는 그에게서 명단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명단에 적힌 이름들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 24세 최재희 (폭사로 추정)
- 24세 우상민 (폭사로 추정)
- 22세 이원진 (두개골에 총상)
- 32세 박상원 (폭사로 추정)
- 18세 윤지은 (흉부에 총상)
- 41세 박만도 (두개골에 총상)
- 29세 문성훈 (흉기에 의한 외상)
- 38세 최승대 (흉기에 의한 외상)
- 30세 허현우 (폭사로 추정)
‘어째서’
“윤 형사님, 이거 운전자의 옷에서 나온 쪽지입니다. 혹시나 단서가 되지 않을까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윤 형사에게 현장에서 만났던 수사관이 구겨진 종이쪽지를 건넸다.
그 쪽지에는 어딘지 모를 주소가 적혀있었다.
“이게 무슨 주소야?”
“아마 사고가 난 트럭의 목적지로 보여 집니다.”
“그래? 그럼 당장 가봐야겠군, 지금 어디선가 실종당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을 테니까”
윤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럼 넌 가보고, 임 형사 너는 대기하고 있어”
“같이 가면 안 됩니까? 선배님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임 형사가 따지자, 윤 형사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따라오지 마, 이건 명령이다. 알겠어?”
###4
몸이 허공에 붕 떴다가 툭하고 떨어진 느낌이랄까? 간밤에 한 번도 뒤척이지 않고, 잠을 푹 잤음에도
뭔가 만족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숙면을 하고 난 뒤의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피부도 푸석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양손바닥으로 뺨이 한껏 붉어지도록 두들겼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순간 콧속으로 들어오는 낯선 공기.
“뭐지?”
단숨에 알 수 있는 낯선 공기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관인지, 친구의 집인지 분간은 되지 않았지만 확실히 내게 있어서 익숙한 공간은 아니었다.
낯선 곳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계산했다. 일단 내 침대가 아닌 곳에서
당장에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는 동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어쩐지 침대가 삐걱 거리더라’
나는 좀 더 자세히 주변을 살폈다. 삐걱거리는 침대며, 조그만 화장실, 조그만 냉장고. 딱 한 사람이
먹고살기에 적당한 공간이었다. 얼핏 혹시 이곳이 친구의 자취방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우야 있냐? 민준아??”
쥐죽은 듯 조용한 공간에 내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빨리 이 낯선 곳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면에 보이는 문을 향해 걸었다. 순간 눈앞에 뭔가가 적혀있는 종이가 보였다.
역할놀이 규칙
-주머니 속의 쪽지를 보면 자신의 역할이 들어있습니다.
-제한시간은 4일, 역할놀이에 필요한 인원은 총 8명
-자신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되도록이면 비밀입니다.
(비밀로 하는 게 본인의 목숨을 위해 좋을 겁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 제대로 안하면 가슴에 달린 폭탄이 펑!
-멋대로 폭탄을 뜯어내려 해도 펑!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4일 동안 역할을 멋지게 수행하시면 살려드립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역할놀이를 못하신 분은 역할놀이를 다시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시작!
“이게 뭔 소리야?”
글을 본 순간 머릿속에 지난주에 극장에서 봤던 심야영화 한편이 떠올랐다. 미치광이 살인마가
사람들을 가둬놓고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공포영화였는데, 그런 종류의 영화를 즐겨본지라
꽤나 재미있게 봤었다.
‘에이, 설마? 가슴에 달린 폭탄?’
딱히 종이에 쓰인 글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더듬었다. 불행하게도 가슴팍을 더듬는 손끝에 뭔가 딱딱한 느낌이 전해졌다. 흠칫 놀라서
얼른 윗옷을 걷어 올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가슴팍에는 뭔가가 붙어있었다. 요상하게 생긴
기계장치였는데, 아마도 글귀에 적혀있던 폭탄인 듯싶었다.
“뭐야?!”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내가 잠든 사이 내 몸뚱이에 이런 괴상한 장치를
달아놓았다는 사실에 놀라 소름이 돋았다. 나는 또 다른 뭔가가 장치되어 있나하고, 손으로 몸을
구석구석 더듬었다. 다행히 다른 신체부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핸드폰이며, 지갑이며
소지하고 있던 물건들이 전부 사라져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나는 일단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문고리를 돌렸다. 별 힘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문고리가 맥없이 돌아갔다. 예상 밖이었다.
문이 꽁꽁 잠겨 있을 것을 대비해 문을 부숴버릴 각오까지 하고 있었기에 살짝 당황해질 정도였다.
박차고 나온 문 바깥은 여느 숙박시설처럼 복도식이었고, 복도의 좌우 옆으로 방문이 쫙 늘어서 있었다.
그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인기척에 숨을 죽이고는 복도를 걸었다. 순간 복도중앙 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남녀의 목소리가 뒤섞여, 괴상하게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었다. 복도 중앙에 다다를 쯤부터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복도 벽에 기대어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리고는 모퉁이에 숨어서 살짝 엿봤다. 복도중앙에는 커다란 탁자가 있었는데
4-5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 뒤에서 숨지 말고 나오지 그래”
순간 복도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꽤나 무게 잡힌 목소리로 말했다. 말한 내용으로 봤을 때
모퉁이에 숨은 나를 지칭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가 어디죠? 당신들은 누구죠?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궁금했던 것들이 입을 통해 폭발했다.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인 나머지 나조차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우리한테 묻지 마세요, 당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니까”
정면으로 마주한 곳에 앉아있는 여자가 말했다.
“같은 처지라뇨?”
“기억나지 않죠?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
그러고 보니 그에겐 이곳에 잡혀온 기억이 없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냥 평소처럼 잠이 든 것,
그뿐이었다.
“저기요, 그러면 당신도”
“사람이름 놔두고 여기요, 저기요 할 건가요? 앞으로 4일 동안 같이 지내야하는데 이름정도는 서로 알아둬야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통성명했습니다. 저는 이호영이라고 합니다. 뭐, 딱히 반갑지는 않지만”
옆에 앉아있던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나 말투로 봐서 상당히 남자다운 성격으로 보여 졌다.
“김은혜라고 해요”
내게 같은 처지라고 말한 여자가 불쑥 말했다. 짧은 단발머리 때문에 중성적인 느낌이 풍기는 모습의
여자였는데 호영 씨 못지않게 성격이 남자다웠다.
“문혜란입니다.”
은혜 씨 옆에 앉아있던 파마머리 아줌마도 이어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냥 철이 아저씨라고 불러”
처음 나를 알아챘던 아저씨가 내 등을 치며 말했다. 왠지 철이 아저씨에게 있어서는 이 상황이 낯설지
않은 듯했다.
“예, 제 이름은”
“놀고들 있네.”
이름을 말하려는 찰나,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이를 구경하던 학생 하나가 중얼거리며 말을 잘랐다.
그는 교복차림의 학생이었는데 교복을 입은 행색이나 염색을 해서 샛노란 머리에 귀에 귀걸이까지 한
걸로 봐서는 보통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학생, 아까부터 예의 없는 짓만 골라서 하는데 눈에 거슬려?”
호영 씨가 학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학생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를 똑같이 노려봤다.
팽팽한 눈빛이 오고가는 가운데 학생이 말했다.
“아주 착각들을 단단히 하고들 있네요, 통성명은 무슨”
학생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냥 저 날라리 말은 무시하죠.”
호영 씨 역시 학생에게서 시선을 떼며 무시했다.
“지금 우리가 총 6명이죠?”
혜란 아줌마의 갑작스런 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총 여섯 명이네요.”
처음에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철이 아저씨와 그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은혜 씨 그리고 파마머리가
잘 어울리는 혜란 아줌마, 안경을 써서 똑똑해 보이지만 실제 성격은 남자다운 호영 씨,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학생 그리고 나.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이었다. 도무지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이래가지고는 내가 왜 이곳에 잡혀왔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8명까지 앞으로 2명 남았군요. 사람이 모두 모이면 역할놀인지 뭔지에 대해서 우리를 잡아 둔 사람이 설명해 준다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호영 씨가 안경을 올려 쓰며 말했다.
“우리를 잡은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내가 묻자, 호영 씨가 천장을 바라봤다. 나 역시 호영 씨의 시선을 따라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커다란 스피커가 있었다. 뭔가 더 있을 거 같다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우리를 감시라도
하려는 모양새로 복도 여기저기에 감시카메라와 스피커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나요?”
호영 씨가 즉각 대답했다.
“제가 여기 계신 분들이랑 같이 복도 끝의 철문을 두드리자 말하더군요. 사서 고생하지 말고, 8명이 모이면 설명해 줄 테니까 얌전히 있으라고요. 물론 변조된 목소리로요.”
차츰차츰 상황이 이해가 갔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보다 상황파악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머니 속의 쪽지를 보면 자신의 역할이 들어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방문에 적혀있던 글귀가 떠올랐다.
‘아, 내 역할’
근데 뭔가 이상했다. 방에서 폭탄을 보고 놀라 스스로 몸을 뒤졌을 때, 주머니도 분명히 같이 뒤졌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금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떨어뜨렸나?’
“잠깐 방에 좀 다녀올게요.”
“그러세요.”
나는 내가 나왔던 방으로 걸어가며 바닥을 살폈다. 혹시나 복도바닥에 떨어뜨리지는 않았을까하며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역할이 적혀있는 종이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에?’
구석구석 방도 살피고, 누워서 잠들었던 침대도 살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조급해진 나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다시금 문에 적혀있는 글귀를 봤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 제대로 안하면 가슴에 달린 폭탄이 펑!
‘그러니까 나는 그 역할이 뭔지 모른다고’
가슴에 장착된 폭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역할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이 살인마가 벌여놓은
놀이에 참여를 하라는 건지, 나로서는 죽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똑똑, 나와 보세요, 모두 모였어요.”
방을 뒤적이는데 은혜 씨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예, 나갈게요.”
대답할 기운이 없었지만 겨우 대답해냈다.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왜 하필 이 글귀가 눈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5
“너 이 새끼, 그 사건에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 했지? 헛소리하지 마. 너 아직 젊은 놈이 제멋대로 단독으로 행동하다가 사고라도 치면 나중에 문제 생겨. 뭐? 문제생겨도도 상관없어? 미쳤냐? 뭐? 지금 어디냐고? 주차장인데 왜?”
전화통화를 하며 길을 가던 윤 형사의 눈에 쪽지가 보였다. 자동차 앞 유리에 붙어있는 쪽지였는데,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갔다. 그것은 대리운전 광고라던가, 술집 광고가 아닌 누군가 직접 써서 보낸
쪽지였다. 윤 형사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쪽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쪽지에 적혀있는
내용을 읽었다.
“빌어먹을”
윤 형사는 주변을 살피고는 그 쪽지를 자신의 품에 넣었다.
###6
“8명이 모두 모였으니 설명을 드리죠.”
8명이 모두 모이자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아까는 없었던 사람이 소리쳤다. 긴 머리에 수염을 길러서 그런지 지저분해보인 그 남자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될 모양이었다. 좀 전의 나처럼.
“기다려 보세요.”
나는 남자를 향해 아저씨처럼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애써 차분해 보이려는 말투였지만 긴장을
한 얼굴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뭘 기다려요? 이게 뭡니까? 사람 불러다 놓고 이상한 기계를 설치해 놓고, 역할놀이라뇨? 뭐가 좋다고 우리가 이 미친놈에게 장단을 맞춰줘야 합니까? 누구 핸드폰 가진 사람 없어요? 빨리 경찰에 신고합시다.”
“신고를 했으면 벌써 했죠, 우리가 바보인줄 압니까? 일단은 진정하고 우리를 가둬놓은 이의 요구가 뭔지 들어봅시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대조적인 두 남자였다. 한 남자는 흥분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질러댔고, 그를 마주한 나는 조용히 앉아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 머리가 긴 남자는 나의 차분한
태도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당신 뭐야? 당신은 왜 이렇게 침착해? 혹시 당신도 한 패거리야?”
“여기에 계속 있으려면 침착해야만 합니다.”
호영 씨가 나를 거들었다.
“한 패거리?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철이 아저씨 역시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어, 가슴팍을 드러내며 나를 거들었다. 아저씨의 가슴에는
그와 같은 폭탄이 장착되어 있었다. 아저씨다운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본 머리긴 남자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에헴”
긴 머리의 남자와 같이 나중에 타나난 노인이 헛기침을 한 번했다.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도
많은 게 누가 봐도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노인은 헛기침을 두어 번 정도 더하고 입을 열었다.
“근데 이 폭탄이라고 달려있는 게 확실히 작동은 하는 겁니까?”
확실히 그 노인의 말이 맞았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팍에 달린 폭탄이 확실히 폭탄인
것도 모르는 일이었고, 왜 잡혀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확실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도 몰랐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거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위험하다는 것.
“폭탄의 성능은 아주 뛰어납니다. 제가 장담하죠. 하하하”
조용했던 스피커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저건 뭐죠?”
혜란 아줌마가 복도중앙의 벽면을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와우, 아줌마 대단하신걸요? 지금부터 시작될 역할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차리셨군요. 뭐, 기념으로 아줌마가 가셔서 상자를 열어보도록 하죠.”
스피커의 지시에 아줌마가 도움을 요청하는 얼굴로 주변을 봤다.
아마도 혼자서 저 상자를 열기가 겁나는 것 같았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왠지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거 같아 직접 나섰다.
“고마워요, 학생”
나는 아줌마와 함께 그 상자로 다가섰다.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상자였는데, 상자 주변에 왠지
음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내가 상자에 손을 데려하자, 탁자 주변에 있던 몇몇의 사람들도 궁금했는지,
우리의 뒤를 따랐다.
“자물쇠의 번호는 0516입니다.”
스피커가 내뱉는 말에 그다지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상자에 다가가 그가 말한 번호대로
자물쇠를 열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우와”
“세상에나”
“진, 진짠가?”
상자 안에 담겨있던 내용물이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상자 안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돈다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하하하, 모두들 놀라셨군요. 후후, 두당 1억씩 총 8억입니다. 역할놀이가 끝나면 모두에게 나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물론 역할놀이를 성공적으로 끝낸 분들만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정해준 역할만 제대로 수행하면 이 돈을 준다는 말이죠?”
호영 씨가 놀라며 물었다.
“쯧, 젊은이가 벌써부터 돈에 혹하다니”
의자에 앉아서 지켜보던 노인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듯한 노인의 말투에
기분이 상했는지, 호영 씨가 노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혹하다니요?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지나치긴, 돈을 보자마자 눈빛이 확 바뀌던 걸. 하긴 그 정도 액수면 젊은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만하지, 근데 큰돈은 절대로 쉽게 얻을 수 없어.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지, 명심해둬”
“하하하, 어르신의 말이 옳습니다. 큰돈을 얻으려면 노력이 있어야하죠. 그러니까 모두들 열심히 역할놀이를 해주세요.”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확실히 성질을 긁는 특유의 뭔가가 있었다.
“근데 말이에요, 지금 나눠가져도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요? 돈이 꽁꽁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눈앞에 있는데 지금 1억씩 나눠가지는 게 어떨까요?”
돈을 멍하니 바라보던 혜란 아줌마가 제안했다. 듣기에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아직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애초에 각자의 몫을 확실하게 챙겨두는 것도 좋아보였다.
“똑똑하신데요? 하하하, 마음대로들 하세요.”
우리를 가둬 둔 놈 역시 혜란 아줌마의 제안에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괜찮은 생각인 거 같은데요?”
나 역시 동의했다. 안 그래도 가난한 대학생인데 1억이라니, 물론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1억은 상당히 큰돈이었다.
“전 반대합니다. 혹시라도 각자 1억씩 가져갔다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돈에 욕심이라도 부리면 어떻게 합니까?”
호영 씨는 내 생각과는 반대였다.
“쯧쯧, 남의 돈에 욕심을 부리는 사람? 젊은이 사람들이 다 자네 같은 줄 아는가?”
그 노인은 처음부터 호영 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호영 씨가 무슨 말만 하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할아버지, 어른도 어른다워야 아랫사람이 예의를 갖추는 겁니다.”
노인과 호영 씨 사이에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순간 날라리 고등학생이 돈이 있는 상자에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느닷없이 돈을 집어서 꺼냈다.
“학생, 뭐하는 거야?”
철이 아저씨가 놀라며 묻자, 그 날라리 고등학생은 아주 뻔뻔스러운 얼굴로 아저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기 몫 챙기자면서요? 그래서 내 몫 챙기는 건데요?”
“아직 결정된 거 아니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그 돈 다시 넣어놔”
할아버지 때문에 열을 좀 받은 호영 씨가 분을 삭이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요? 나쁜 말로 할 수 있으면 하세요.”
“어린 노무 새끼가 돌았나!”
호영 씨가 거칠게 내뱉었다. 험악한 분위기에 모두가 눈치를 봤지만 그 날라리 고등학생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호영 씨를 노려봤다.
“아저씨, 어린놈한테 한 번 죽어 보실래요?”
사실 요즘 학생들이 겉멋을 부리며 남들을 겁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날라리 고등학생은
진짜였다. 진짜로 살기가 느껴졌다.
“험악한 분위기 만들지 말고 진정들 합시다. 우리끼리 서로 싸우는 건 우리를 가둔 놈이 바라는 것이에요.”
혜란 아줌마가 분위기를 중재했다. 아무래도 그냥 놔두면 한바탕 벌어질 분위기라 나도 말릴 참이었는데,
아줌마가 적절한 때에 나서줬다.
“죄송합니다.”
호영 씨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왠지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근데 이 돈이 가짜 돈일수도 있지 않나요?”
“흠, 그럴 수도 있지”
나의 물음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걸 의심해볼 필요가 있었다.
가둬놓고 폭탄을 설치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갑자기 1억을 준다니,
생각해보니 완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돈은 진짜로 보여 지는데요?”
은혜 씨가 말하자 모두가 은혜 씨를 바라봤다.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철이 아저씨가 약간은 따지는 투로 물었다.
“제 직업이 은행원입니다”
그녀의 말에 아무도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럼 잘 알겠네요? 얼만 큼 가져가면 1억인지? 돈 좀 세줘 봐요.”
상황을 지켜보던 날라리 고등학생이 돈뭉치를 꺼내 흔들어 보이며 은혜 씨에게 물었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에 은혜 씨를 비롯한 모두가 당황해했다.
“야, 돈 내려놓으라니까? 이 새끼가 돈독이 올랐나?”
순간 호영 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몸을 날려 호영 씨를 잡았다.
“짝!!”
‘짝’ 소리와 동시에 날라리 학생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매서운 눈빛으로 학생을
노려보며 뺨을 날린 은혜 씨의 하얀 손이 있었다.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역시나 터프한 은혜 씨였다. 뺨을 맞은 학생은 처음엔 놀라더니 곧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친년이”
학생의 손이 올라가려는 찰나, 옆에 있던 철이 아저씨가 번개 같은 속도로 학생의 올라간 팔을
낚아채더니 뒤로 한 바퀴 돌아 꺾어버렸다.
“아!!”
순간적으로 고통스러웠는지 학생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놔, 놓으라고!!”
“계속 짧게 말할래? 공손하게 말해봐, 공손하게”
“미친, 내가…….”
철이 아저씨가 팔을 비틀어 올렸다.
“으아!!!”
아까보다 학생의 비명이 길어졌다. 꽤나 제대로 팔이 꺾여, 보는 나조차 고통스러웠다.
학생이 팔이 꺾인 채 울부짖자 철이 아저씨가 학생을 밀어 내동댕이쳤다.
학생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풀썩 쓰러졌다.
“내가 너 만한 자식이 있어 새끼야, 한 번만 더 말까면 팔이고 다리고 다 분질러 버릴 테니 알아서 해”
카리스마. 딱 이 단어가 떠올랐다.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학생이 아저씨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쪽팔렸는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통쾌했다.
“이제는 놔도 괜찮은데”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내가 호영 씨의 두 팔을 잡고 있었다. 얼른 그에게서 손을 뗐다.
“아, 죄송해요”
“아뇨, 제가 죄송하죠. 이놈의 욱하는 성질을 고쳐야하는데”
호영 씨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돈은 여기에 두는 겁니까?”
머리 긴 남자가 손가락으로 돈을 가리키며 물었다. 돈에 욕심이 생긴 모양인지, 좀 전처럼 투정 섞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질문에 복도 중앙에 있던 모두가 서로를 둘러보며 암묵적으로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는 약속이라도 한 거처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두는 거라면 누군가 지켜야하지 않을까요?”
“꼭 지킬 필요가 있나요? 역할놀이가 끝나면 모두가 똑같이 1억씩 나눠가질 텐데”
내 대답을 들은 할아버지가 코웃음 쳤다.
“젊은이는 모두가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안타깝게도 모두가 살아남을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자네도 봤을 거 아냐? 문 앞에 붙어있는 쪽지와 자네의 역할. 설마 이게 안전한 역할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 역할을 모르는 나로서는 움찔했다.
##7
“위험하지 않을까요? 녀석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안전하잖아요.”
상민의 말에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정말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상민씨는 가슴에 달린 폭탄이 위험해 보이지 않으십니까? 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폭탄 때문에 미칠 지경입니다. 그 미치광이의 놀이를 겪은 우리만이 경찰에게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망설일 틈이 없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그 잔인한 역할놀이에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형사의 차에 쪽지를 끼워 넣었습니다.”
“그게 다입니까? 별다른 거 없이?”
“어쩔 수 없습니다. 혹시나 경찰에 그 미치광이와 내통하는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섣불리 행동했다가 놈에게 적발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그 형사는 믿을만합니까?”
“네,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실종사건을 뛰어넘어 그 이상에 접근한 유일한 사람이거든요. 상민 씨는 뭐 좀 알아보셨나요?”
재희의 물음에 상민이 종이쪽지와 볼펜 그리고 지도를 꺼내보였다.
“저는 간단히 추리를 해보았습니다. 재희 씨가 역할놀이가 끝나고 눈을 뜬 게 어디라고 하셨죠? 전라북도였나요?”
“정확히는 전라북도 남원이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그냥 도로 한복판에 누워있었죠.”
“제가 일어난 곳이 충청남도 공주 근처였고, 그 범인은 저를 처음 본 척하며 택시를 태워줬습니다. 그리고 저와 재희 씨가 나온 날짜는 같습니다. 그걸로 봐서 범인은 적어도 전라북도 밑의 지역에서부터 올라왔다고 볼 수 있죠.”
상민은 지도에 표시를 하며 설명했다.
“그렇다면 밑에 지역부터 차근히 찾아보면 수월하겠군요.”
“하지만 저희로서는 힘들겠죠? 가슴에 폭탄이 달려있으니, 범인을 찾더라도 발각되는 즉시 죽을 테니까요. 게다가 녀석은 변장을 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찾기 힘들 거예요.”
“그놈 얼굴 기억해요?”
“솔직히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특유의 말투를 들어본다면 기억날 겁니다.”
“그럼 형사에게서 연락이 오는 즉시 녀석을 잡기 위한 작전을 시작합시다.”
###8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상황으로 전개되는 바람에 할 말을 잃었다.
“어이 꼰대, 팔다리 부러뜨린다며”
날라리 녀석이 방에서 다시나와 지껄였다. 하지만 누구도 학생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모두 그의 손에 들린 권총 때문이었다. 학생은 총구를 사람들에게 겨누며 말했다.
“이봐요, 학생 그 총이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끼리 총을…….”
혜란 아줌마가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허튼 수작부릴 생각하지 마, 난 진짜로 쏠 테니까 보다시피 내가 당신들보다 어려도 아주 막 살아왔고, 눈에 뵈는 거 없으니까, 그리고 거기 꼰대 둘 나한테 뭐 할 말없어?”
학생은 총구로 호영 씨와 철이 아저씨를 가리켰다. 아까 전 일의 앙갚음으로 보였다.
얼굴을 보니 호영 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철이 아저씨는 뭔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순간 철이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너 인마, 총 쏠 줄이나 아냐?”
철이 아저씨는 도발과 동시에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의자를 발로 차서 학생에게 날렸다. 날아오는
의자에 당황한 학생은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탕!!”
“꺄아!!!”
요란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총알이 빗나갔는지
다친 사람은 없는 걸로 보여 졌다. 고개를 돌려 학생 쪽을 보니, 철이 아저씨가 학생을 넘어뜨리고
총을 빼앗고 있었다. 나와 호영 씨는 재빨리 달려들어 철이 아저씨를 도와 학생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으, 이거 놔!!”
이윽고 철이 아저씨가 완력으로 총을 빼앗아냈다. 그 때 뒤에서 은혜 씨의 소리가 들렸다.
“조심해요!!”
그 말에 나와 철이 아저씨가 물러났다. 뒤에는 머리 긴 남자가 의자를 높이 들고 학생을 내려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 돼!!”
할아버지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머리 긴 남자는 사정없이 학생의 머리를 의자로 내리찍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머리 긴 남자는 그 후로 몇 차례 더 학생의 얼굴을 내려찍었다. 우리가 서둘러 그를 말렸지만 이미
학생은 즉사한 걸로 보여 졌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우릴 죽이려고 했어요!!”
머리 긴 남자가 더 큰소리로 소리쳤다.
“푸하하하하!! 이거 역할을 왠지 잘못 정한 거 같네요, 캐스팅미스입니다.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너무나 빨리 죽었네요.”
스피커에서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음이 나냐? 쓰레기 같은 놈아!!”
철이 아저씨가 천장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게 성질부리지 마시고 학생의 바지나 좀 확인해주시겠어요?”
“싫다면?”
“죽고 싶으세요?”
스피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철이 아저씨도 그걸 느꼈는지 혀를 차며 스피커가 시킨 대로 학생의
바지를 뒤졌다. 그리고 학생의 바지에서 종이를 하나 꺼냈다.
당신의 역할은 형사입니다.
총으로 악당들을 무찔러 주세요.
(총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상자에 있습니다.)
“유태수 학생의 역할은 형사였습니다. 아, 모두들 학생의 이름도 모르고 계셨죠? 그나저나 안타깝네요, 불량학생이 갱생해서 멋진 형사가 될 줄 알았는데 총을 이딴 식으로 사용하다가 죽다니 정말 실망했습니다. 형사도 죽었으니 이제 악당들이 마음껏 날뛰겠네요. 하하하 그럼 이런 식으로 역할놀이를 계속해주세요. 저는 이만”
ㅡㅡㅡㅡ
출처 : 패랭이꽃님(웃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