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의 기묘한 이야기-11 : 약속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켁켁...이봐...거기..이것 좀 풀어줘...켁켁..."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거의 죽어가는 모습으로 그는 다급하게 한번 더 나를 불렀다.
"켁켁...어제 밥 먹고 있을 때..켁켁 나 봤잖아...."
그의 눈알은 거의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나는 그 무당 여자의 말과 지금 쓰러져가는 저 귀신병사에 대한 두려움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목에 감긴 올가미를 풀어냈다.
"콜록! 콜록....아~~ 죽을뻔 했네. 어떤 자식이 여기다가 올가미를 쳐논거야?"
"......."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내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죽은 놈이 뭘 또 죽나?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목주변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내 밥...내 밥 어딨지?"
주변을 더듬거리던 그 병사는 이내 자신의 반합통을 찾아내고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허겁지겁 밥인지 죽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입에 우겨넣었다.
"오랜만에 사람 보네."
"네?"
그는 허기가 가시지 않는지 바쁜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이봐요..."
나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서는 정체모를 음식물의 국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그러슈?"
"...나..난 사람이예요."
"뭐요? 누가 사람 아니랬소?"
그러더니 그는 다시 반합통 속의 음식물을 퍼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 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그 자신의 정체를 말해주고 싶었다.
"다..당신은.."
내가 입을 열려고 하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부대원 들이오."
그가 고개를 한 번 까딱이며 내 뒤에 시선을 맞추었다.
나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십수명의 병사들이 실루엣을 그리며 서 있었다.
"헉!!"
나는 순간 다리 근육에 힘이 풀려 이내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우린 길을 잃었어."
숟가락질을 멈춘 병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답답한지 철모를 벗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드러난 그의 머리 측면에 구멍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린 것의 정체가 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구멍 속에서 쿨럭대듯이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얼마 동안 헤매고 있었는지 몰라.
뭔가를 먹고 있었는데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그 뒤론 기억이 안나......그냥 어둠만 있는거야.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우릴 깨워줬는데, 깨어나서 주변을 살펴보니 뭐가 이상했어."
그는 간지러운지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들이 없어졌어. 우리들만 빼 놓고 말야. 아무리 돌아다녀도...우리 밖에 없는거야.
우리가 상대하던 적들은 물론 주변에 민간인들도 없고, 들어오는 신병도 없고, 제대하는 사람도 없고, 휴가가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짐승들도 없었어. 새소리도 곤충소리도 고양이 소리도 개 짖는 소리도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두서너번의 숟가락질을 하였다.
"그리고...해가 뜨지 않아."
"예...예?"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지 않으면 그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해도 뜨지 않고 달도 뜨지 않아. 그냥 어둠만 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볼 수도 있고, 주변을 살필 수도 있었지.
단지 시간의 흐름만 느껴지지가 않았어. 시간이 흘러가는 건지 멈춰있는 건지 도대체 알수가 없더라니까.
그제가 어제같고, 어제가 그제같고, 오늘 한 일이 어제 했던 일 같고, 어제 했던 일들이 그제 했던 일 같고....
뒤죽박죽이야. 정리가 안돼."
그는 멍하니 어딘가를 주시하더니 기억 속의 뭔가를 계속 되뇌는 것 같았다.
"더 큰 문제는 이 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거야. 어디론가 계속 전진하면 계속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와 있는거야.
앞으로 가도 제자리, 뒤로 가도 제자리, 몇날 며칠을 걸어가도 제자리....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되고 있는 느낌...알아?
마치 우린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아. 이 곳을 벗어날 수가 없어."
나는 십수명의 병사들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누군가가 눈에 보여서 그에게 다가가면 그는 우리를 몰라보는 것 같았어.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사람을 좇아 다녀봤는데도 여전히 못알아 보더라구.
그런데 약간의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우리를 알아보면서도 모르는 척 피해다니는 것 같았어.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는데 이제서야 나를 알아보는 자네를 만난거라구.
어제도 알아보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갔지?"
"....예"
"자넨..어디서 온 거지?"
"예?"
"낯선 얼굴인데...."
나는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정작 내가 반드시 만나야 될 그들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많은 수의 병사들을 본 나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묘안 하나를 떠올렸다.
이 방법이 통할지 안통할지는 몰랐지만 이미 내 입은 말을 꺼내고 있었다.
"다...당..당신들이 이 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가르쳐드릴게요."
"뭐? 뭐라구?"
나의 뜻하지 않은 제안에 그 병사와 함께 맞은 편에 있던 병사들이 놀란 듯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순간 내 주책맞은 입이 무슨 짓을 한건가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떻게?"
"대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병사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무슨 부탁?"
"정한수와 김선호라는 사람을 찾아줘요."
"뭐?"
"그 사람들을 찾아주면 당신들이 이 곳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가르쳐드릴게요."
"좋아...찾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일 이 시간쯤 제가 저기 있는 초소에 있을 겁니다. 거기로 데리고 오면 됩니다."
"뭐..그 정도야..오늘부터 다른 훈련거리가 생겼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이 곳에 있는게 확실한가?"
"확실해요. 당신들이 돌아다니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들 얼굴을 모르는데..."
"당신들처럼 군인이예요. 명찰을 보면 알 수 있을거예요."
"좋아 한번 찾아보지. 그럼 약속대로 우릴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는거지?"
"그...그렇다니까요."
대책도 없는 나의 약속을 알아차리기라도 한걸까?
갑자기 나의 대답에 어둠속에 묻혀있던 병사들이 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그들의 모습이 선명해지자 나는 곧 삭신이 저려오는 공포에 휩싸여야만 했다.
그 어둠 속의 실루엣이 나에게 미처 알려주지 못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눈에 비친 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떤 병사는 한쪽 팔이 떨어져나가 없었고, 어떤 병사는 두 다리를 볼 수가 없었으며, 어떤 병사는 얼굴의 절반이 으깨져
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또 어떤 병사는 찢어진 뱃가죽 밖으로 쏟아진 내장을 매달고 있었으며, 어떤 병사는 아예 하반신이 보이지 않은 채, 전선줄 같은
무언가를 길게 늘이고 있는 상반신만 공중에 띄워놓고 있었다.
누구 하나 몸이 성한 병사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극도로 혐오스럽고 구역질 나는 장면을 연출하며 내게 다가왔다.
그들 중 얼굴의 반이 으깨져 사라져 버린 병사가 내 코 앞까지 다가오더니, 뭔가에 젖은 손을 내 왼쪽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그 흉측한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낮고 느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일 거짓말이면....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자신의 한쪽면 치아들이 모두 밖에 드러나 있음에도 그의 발음은 굵고 명확했다.
그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입속의 치아들은 공포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계속 자잘한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네..네...아..알겠습니다."
나는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위속의 내용물을 간신히 틀어막으며,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겼다.
그는 나머지 얼굴 한쪽면에 힘겹게 붙어있는 반쪽의 입술을 늘이며 음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당의 경고도 무시한 채, 귀신과 대책없는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야!! 이창훈!!!"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고함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아~~ 이 새끼 진짜 못말리겠네."
선임하사였다.
"서..선임하사님이 여긴 어떻게..."
"여긴 어떻게? 야~~~ 이 미친놈아.. 근무는 안나가고 왜 짬밥통 옆에서 쳐자고 지랄이야!!"
선임하사의 말에 나는 잽싸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많던 병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내 품에는 올가미에 걸려 목에 상처를 입은 고양이 한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너 여기서 뒤집어져 자려고 근무 혼자 보내달라고 한거냐? 어쭈? 애완동물까지 만들어 두셨네."
"며..몇 시입니까 선임하시님."
"몇시? 근무시간이 5분이나 지났어 자식아!!"
"5분이요? 5분 밖에 안지났단 말입니까?"
"5분 밖에? 너 군대에서 5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몰라서 그래? 내가 순찰 안 돌았으면 해뜰 때까지 잘 놈이었네."
나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이 으깨진 듯 정리가 되지 않았다.
"뭐해? 자식아!! 니가 보고 싶어하던 귀신들 기다릴거 아냐? 빨리 근무지로 안 뛰어?"
"예. 선임하사님!!"
나는 품에 안은 고양이를 내려놓고 허겁지겁 근무지를 향해서 뛰었다.
나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그 고양이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참들의 질책을 먹은 나는 선임하사와 약속한 시나리오 대로 내 사수는 현재 선임하사와 같이 있다고 둘러댄 후
또 다른 어떤 공포가 몰려올 지 모르는 혼자만의 근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귀신들을 만나기라도 한 걸까? 그냥 꿈꾼게 아닐까?
나는 알 수없는 싸늘한 한기에 잠시 팔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왼쪽 어깨 위에 뭔가가 느껴졌다.
흙이었다.
아니...흙으로 그려진 사람 손자국...그리고 나의 뇌는 몇 분전 들었던 낮고 굵은 그 음성을 재생하고 있었다.
"만일 거짓말이면....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 나왔다.
"니미..시발..x됐다."
-계속-
그 곳의 기묘한 이야기-12 : 만남
그 날 야간 근무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 어둠의 병사들은 그들이 약속한대로 김선호와 정한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못찾아도 문제, 찾아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갈수록 김창식 병장의 표정이 수상해져 갔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하루종일 아무 말도 없이 취사일만을 하고 있었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묘한 긴장감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김병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애초부터 우린....같이 이 곳에 오질 말아야 했어...."
"김..김병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없이 식재료를 칼질하고 있는 김병장이 알 수없는 말을 내뱉았다.
"아니면...이 곳을 우리만의 부대로 만드는거야. 우린 영원히 함께 하는거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김병장은 계속해서 혼자 읊조렸다.
"김병장님...괜찮으십니까?"
그러나 김병장의 독백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니가 나를 멀리하려 해도 절대로 넌 벗어날 수가 없어...."
나는 천천히 칼질을 하고 있는 김병장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손을 가져다 대었다.
"김..김병장님.."
그러자 김병장님 갑자기 나를 노려보더니 호통을 쳤다.
"배식 준비 안하고 뭐해 임마!!"
"네..네...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김병장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전상병이 사고를 친 이후로 김병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 어둠의 병사들과 약속한 시간이 돌아왔다.
5초소 주변에는 싸늘한 한기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충만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고, 내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아....씨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애초부터 그 무당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죽는건 마찬가지인 상황이 돼버렸다.
싸늘한 한줌의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서야 문득 정신이 든 나는 산 중에 처박힌 공포의 5초소에 홀로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깨닫게 되자 주변의 사물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초소 옆 창에 비친 손모양의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을씨년스런 바람소리가 하이톤의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모든게 공포로 돌변했다.
바람소리, 새소리, 나를 향애 손을 흔드는 나뭇잎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물줄기 소리....
어느 것 하나 공포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내 앞에 비친 무언가는 조금 전의 그것들이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십수미터 앞 아카시 나무.....그 어둠속에서 판초우의를 쓰고 나를 지켜보던 병사가 있던 자리....
그 아카시 나무에 누군가 팔다리를 늘인 채 매달려 있는 것이다.
간간히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이 그를 조금씩 흔들리게 만들었다.
"헉..."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평소 찾지도 않던 그들을 불렀다.
"예수님..부처님..신령님...제발..."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자, 힘주어 닫혀있는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나는 발을 동동구르며 제발 내 눈앞의 그것이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귀신을 본 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던가...어젯밤의 꿈같은 경험이 모두 현실이었음을 나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긴 이 세상에 몸 성히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더욱 요절한 귀신들은 온전히 죽지는 않았을 터.....
나는 빨갛게 충혈됐을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내 눈앞에 누군가가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죽은 정한수임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 나무에 매달린 형상이 그러한 힌트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게 오라는 듯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무언가에 이끌리 듯 말없이 초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근무 중 초소를 이탈하지 말아야 함에도 지금 나에겐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인도하는데로 천천히 그를 따라 나섰다.
어느 정도 발걸음이 계속되자 나는 그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취사장임을 알게 되었다.
"쿵....쿵....쿵"
어둠에 묻힌 취사장 안에서 누군가가 쪼그려앉아 바닥에 있는 뭔가를 계속해서 내려치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만 보였지만 그 실루엣은 김병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말을 걸지 않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섰다.
서서히 내 눈앞에 비쳐진 것은 산산조각난 고양이 사체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느리지만 반복해서 커다란 식칼로 그 사체를 조각내고 있었다.
"김..김 병장님...."
나의 부름에 김병장이 갑자기 칼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도..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니가 뭔데 여길 들어와!!!!!!!!"
갑자기 김병장의 미친 듯한 일갈과 함께 무언가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빡!!!!"
식칼이었다.
번개처럼 식칼이 날아와 내 목의 오른편을 지나 식기보관함에 꽂혀버렸다.
나는 순간 얼음처럼 온 몸이 굳어버렸다.
김병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멈추지 않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다른 식칼을 찾는게 분명했다.
정신이 든 나는 그제서야 내 오른쪽 목 부위의 작은 통증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손으로 그 곳을 만지자 손바닥이 흥건히 젖어옴을 느꼈다.
내 왼손을 확인한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어....시발...피..."
내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을 즘, 식기함에서 시퍼런 날이 선 식칼을 꺼내 든 김병장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부반이 분명했다.
"다 죽여버려.."
모두 죽일 생각이다. 그의 광기를 멈춰야 했다.
"철커덕!!"
나는 실탄을 장전했다.
아니...선임하사와 약속대로 나는 실탄을 빼고 근무를 서기로 했기 때문에 실탄을 장전하는 시늉만 냈다.
하필 이 순간에 빈 총이라니...
"김..김병장님...멈추지 않으면 쏠겁니다."
나의 말에 김병장은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소름끼치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친 새끼..."
죽을 것을 각오라도 한건지, 아니면 내 소총에는 실탄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건지....
아니면 내가 방아쇠를 당길 용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건지...
김병장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김병장의 부릅 뜬 눈보다 그가 들고 있는 시퍼런 식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진짜로 쏠 겁니다..."
그러나 나의 위협은 김병장에게 아무런 두려움이 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의 걸음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총을 힘껏 휘둘러 그의 손으로부터 식칼을 떨어뜨렸다.
칼을 들고 있던 손에 굉장한 고통이 있었을게 분명함에도 김병장은 개의치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김병장은 한 손으로 내 소총의 총구를 움켜쥐더니 다른 한손으로는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켁켁...기..김병장님.."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는 듯 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김병장의 철근같은 근육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심장과 머리를 잇는 혈액의 이동 통로가 모두 차단된 것 같았다.
김병장의 체중과 힘이 벽에 눌려있는 내 목에 모두 전해지자 극심한 현기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난 밤 올가미에 걸린 그 병사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은 한번도 나를 좌절시킨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러 김병장의 복부를 가격했다.
복부의 충격에 김병장은 잠시 뒤로 물러서며 상체를 숙였다.
나는 수십년간 묵혀왔던 기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 했다.
연신 천식 환자처럼 폐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몸을 추스른 김병장은 갑자기 나를 향해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쿵!!"
내 몸이 벽에 충격을 가하자 나는 의식이 혼미해지면서 이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썩 꺼져버려!!!"
누군가가 호통을 치고 있다.
시야가 흐려져 김병장의 얼굴은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그가 크게 놀랐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나는 쓰러져 있는데 내가 아직 거기에 서 있다.
김병장은 여전히 벽을 등지고 서 있는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는 내가 김병장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여기는 우리 부대야!! 당장 꺼지지 못해!!!"
시야가 흐려진다. 힘겨운 탄식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힘들다....이젠 쉬고 싶다.
"이봐 친구, 괜찮은가"
누군가의 부름에 나는 눈을 떴다.
잔밥통에서 밥을 먹던 그 어둠의 병사였다.
그는 큰 대자로 누워있는 나의 옆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반합통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숟가락을 튕기며 나를 불렀다.
어둠은 가시지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걸까?
"이봐, 친구...우리가 한 참을 찾아봤는데, 정한수라는 그 친구만 찾았어.
자네가 보고 싶다고 해서 자네한테 가보라고 했는데....봤나?"
맞았다. 내가 본 것은 정한수였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오른쪽 목 부위의 통증이 느껴졌다.
"흐흐흐...다행이군. 약속을 다 지키진 못했지만, 자네도 이젠 우리에게 뭔가를 보답해 줘야지?"
그러나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자..이제 우리에게 길을 알려달라고.."
나는 아무말 없이 그 병사의 말만 듣고 있었다.
그는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 연신 입 주위의 분비물을 흘리며 게속해서 히죽거리며 나를 내려다 봤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었다.
지난 밤 나를 위협했던 얼굴의 반쪽면이 으깨진 병사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굵고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말 해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가 들고 있는 소총의 끝에 달린 시퍼런 대검이 눈에 들어왔다.
공포감보다 절망감이 앞서왔다. 이젠 도망칠 힘도 없고, 저항할 힘도 없었다.
가위 눌린 사람처럼 신체 어느 부위하나 움직이지도 못 한 채, 나는 오로지 눈동자만 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거짓말이면...무사하지 못할거라고 했을텐데...이제 말해..."
"죄송합니다. 큭큭...."
절망감과 서러움이 밀려오면서 나는 급기야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여전히 몸은 마비가 일어난 것처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굴이 으깨진 병사는 내 말을 듣자 내 몸을 가운데 두고 서서 소총의 대검을 내 목에 겨누었다.
"무슨 말이야?"
이 공포의 끝이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솔직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큭큭...거..거짓말을 했어요..."
그의 얼굴 한 쪽면에 드러나 있는 이빨들이 분에 겨운 듯 맞물려 갈리고 있었다.
-계속-
그 곳의 기묘한 이야기-마지막이야기
"거짓말...?"
그의 손떨림으로 인해 소총의 끝에 단단히 고정된 시퍼런 대검이 내 목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어느 새 내 주위로 수많은 어둠의 그림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새끼...우리에게 거짓말을 해? 죽여버리겠어."
그 순간 숟가락질을 하고 있던 병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잠깐..."
나는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봐, 친구..자네..뭔가 알고 있지?"
"......"
숟가락 병사는 쪼그려 앉아 나에게 묻고 있었지만, 얼굴이 으깨진 병사의 대검은 여전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하지 못한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그렇지?"
질문을 던지는 와중에도 그는 요란스런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양 입가에서는 여전히 진득한 국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유언처럼 처절하고 비장한 각오로 입을 열었다.
"네..."
잠시 그 둘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그게 뭐지?"
"다...당신들은...."
나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죽었어요."
요란스럽던 그의 숟가락질이 멈추었다. 갑자기 지옥같은 적막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죽었어요. 죽은 귀신들이예요."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잠시 적막을 깨뜨렸다.
"뭐...뭐...이.씨발 뭔 소리 하는거야?"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 붙였다.
"당신들은 죽은 줄도 모르고 이 곳을 떠돌고 있는겁니다. 전쟁은 끝났어요.....아주 오래 전에"
"우...우리가 주..죽었다구?
숟가락을 떨어뜨린 병사가 잠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피...피!!!"
내게 대검을 겨누던 병사도 자신의 허전한 한 쪽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여기 저기서 자신의 형체, 그리고 다른 이의 형체를 확인한 병사들의 절규가 지옥의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비규환의 세상처럼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어떤 병사는 분수처럼 피를 쏟는 팔이 사라진 자리를 틀어잡으며, 어떤 병사는 쏟아져 내린 자신의 내장을 쓸어담으며,
어떤 병사는 밑동이가 사라진 상체만 바닥에 대고는 두 손으로 연신 바닥을 긁어대고 있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들의 몸부림은 불타오르는 지옥의 세상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낼 기세였다.
참혹한 비명소리와 절규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차마 그들의 처절하고 고통스런 몸부림을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의 절규를 멈추게 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 소리였다. 그리고 총소리, 대포소리......그리고 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칠흑같은 어둠이 주변을 덮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 어느 조명보다 뚜렸한 영상으로 보였다.
전투 중이었다. 여기저기 포탄이 터지고, 수류탄 폭음이 귀청을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장검의 소리처럼 공간을 뚫고 지나가는 총탄의 소리가 들려왔다.
함성소리, 울부짖음....비명소리. 이것만이 포화가 쏟아지는 그 전장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지옥같던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그 영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들 잠든 듯한 새벽 같았다.
인적이 보이지 않는 여기 저기 작은 천막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간간히 초병만이 주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 초병은 잠시 배가 고픈지 자리에 앉아 반합통 속의 원가를 열심히 퍼올려 입에 우겨넣었다.
그 때였다.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 싶더니....
"콰콰쾅!!!"
천둥같은 폭음이 그 천막 위로 쏟아졌다. 여기저기에서 수 십여개의 불기둥들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 불기둥 속에 정체를 알 수없는 덩어리들이 파편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라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넋을 놓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소름끼치는 적막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듯한 병사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작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연못에 던져진 돌맹이가 일으킨 파문처럼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목이 메이도록 울음을 터뜨리는 병사도 있었다.
"우리를 가지고 놀았어...."
얼굴이 으깨진 병사가 잠시 울먹이는 듯 싶더니 고개를 돌려 내게 입을 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으깨진 얼굴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많은 병사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우리하고 약속을 한거지..."
나는 그에게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죽어버려"
그는 천천히 소총을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향해 그 대검을 날렸다.
"잠깐!!"
누군가가 그의 날아오는 소총을 제지하며 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이미 심장마비로 죽을 것 만 같았다.
"망자가 살아있는 이를 건드리면 안됩니다."
정한수였다.
"당신들이 아무 죄없는 이 사람을 죽인다면 영원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누가 더 많은 힘을 주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소총 끝의 대검이 힘에 겨운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대로 우리를 내버려두지 그랬어..."
대검을 겨눈 그 병사의 반쪽 남은 눈빛은 여전히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들이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잖아요. 그렇다면 죽어서도 지켜주는 것이 도리 아닌가요?
집에 돌아갈 수는 없지만, 고통스러웠지만 이제 모두 알았잖아요."
정한수의 말에 그의 남은 반쪽 얼굴에서 작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떨리는 소총의 대검은 여전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어느 병사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뜬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의 말처럼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니...그들이 빛을 느끼고 있었다.
"해가 뜨고 있어. 이럴 수가!!"
여기저기서 환호성들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눈부심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빛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보였다. 너무나도 밝고 너무나고 맑은 빛이 너무나도 빠르게 떠올라 주변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러자 지옥 속의 악마같던 그들의 형상이 서서히 온전했던 이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자신과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울먹였다.
엄청난 눈부심이 있음에도 그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빛을 즐기며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 빛을 바라보던 정한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저 빛을 오래 전에 봤답니다. 단지 자신이 죽을 줄 몰랐거나 떠나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이죠."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답했다.
"고..고맙습니다."
그는 잠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한수씨. 전할 말이 있어요."
"네?"
"어머니가....당신 어머니가 이승에서나마 부모 자식으로 만나줘서 고마웠다고 말씀 전해달래요...."
나의 말에 그는 미소 지은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살아달랍니다...."
정한수는 이내 눈물을 떨구더니 얼굴로 시체처럼 힘없이 길게 늘어진 내 손을 꼭 쥐었다.
쏟아져 나올 피가 다 나온건지 이젠 오른쪽 목부위의 통증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나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정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이봐요. 정한수씨. 물어볼 게 있어요."
"뭔가요?"
"조금 전 당신이 쫓아냈던 그 사람...김병장한테서 쫓아냈던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구예요?"
"몰라요. 모르는 사람이예요. 명찰에 김선호라고 적혀 있었어요. 수시로 그 사람이 김병장의 몸에 들락거린 것 같아요."
"그...그랬었군요..."
"처음엔 이 부대를 저기 있는 군인들로부터 지키려고 했어요.
변변한 비석하나 없이 쓰레기 매몰하듯이 묻힌 자리에서 그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처음엔 가까이 가서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저는 피해만 다녔어요. 그런데 저 사람들은 단지 길을 잃은 것 뿐이었어요. 자신들이 죽은 줄 몰랐던거죠.
정작 김병장의 몸에 붙었던 사람은 다른 이었는데 저는 몰랐던거죠.
저 병사들이 나를 찾아서 말을 걸게끔 해주고, 그들의 정체를 일깨워준 사람은 당신이예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나처럼 쓰러져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누워있는 김병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김병장님은 괜찮은 건가요?"
"몰라요. 그런데 일단 그 혼령은 사라졌어요. 우리들과 함게 하려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의 말을 듣자 끝나지 않을 듯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김병장님....."
나는 시체처럼 누워있는 김병장을 힘겹게 불렀다. 그리고 정말로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고..고양이를 왜 죽이는 겁니까?"
그가 듣고 있는 지의 여부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냥 지금이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절대로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무표정한 얼굴의 김병장이 눈을 감은 채 죽어가는 작은 숨소리로 내게 입을 열었다.
"고양이가...."
"네?"
"고...고양이가 나..나타나면 기..기침소리가 들려...그..그리고 죽여..."
김병장은 알 수없는 말을 뱉은 후 힘이 빠지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아...씨발..이젠 허기가 가시네."
숟가락질에 목숨걸던 그 병사가 뭐라고 투덜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 핏줄기가 얼굴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그의 본얼굴이 드러났다.
"아..아저씨..좀 웃기게 생기셨네요. 큭큭"
"뭐야? 하하하"
그리고 내게 대검을 겨누던 그 병사도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굵고 낮은 음성을 다시 한번 내게 들려 주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가 죽은 줄 알게 해주었으니..."
그의 온전한 외모는 그 목소리만큼이나 출중하고 번듯했다.
숟가락질 병사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부탁의 말을 건넸다.
"이봐 친구..자네가 지키지 못한 약속....다른 걸로 대체하면 안될까?"
"깨어났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광경이 이 곳이 의무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잠시 얘기를 나누던 군의관이 나에게 다가왔다.
"또 만나는구만. 이창훈 일병."
전상병과의 사건 때 나를 담당했던 군의관이었다.
"내가 이런데 다신 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어지간히 부대에서 말썽장이인가 보군."
나는 연신 주변을 살피며 지난 밤 그들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만 하루가 지나서 깨어난거야. 자넨 정말로 운도 좋구만.
전에는 총을 맞고 살아나고, 지금은 칼을 맞고 살아나고..이건 뭐 터미네이터도 아니고..하여튼 자넨 불사신이야."
그제서야 나는 오른쪽 목부위의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출혈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바로 저승으로 가는거였어... 통합병원으로 이송할까 했는데, 워낙 급해서 내가 바로 조치한거야."
"고...고맙습니다. 군의관님."
"조금 있다가 헌병대에서 수사관이 올거야. 니가 움직이기에는 불편한 것 같아서 내가 이리로 오라고 말해뒀어."
나는 그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참 뒤에 나타난 수사관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작은 서류를 꺼내들었다.
"이번 사건 정리되면 전출 명령 떨어질 것 같다. 전대웅하고 김창식이는 형기 채워도 니네 부대로 다신 못돌아가."
난 그제서야 김병장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김..김창식 병장...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가해자 신분으로 헌병대에 수감되어 있어."
"몸은 괜찮습니까?"
"쨔식...니 걱정이나 해. 김창식은 괜찮아. 너희 두 놈 다 취사장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어.
그런데 너도 참 대단하다. 고참들을 두 명이나 헌병대에 처넣어버렸으니.."
수사관은 잠시 사진이 박힌 서류를 몇 장 넘기더니 놀라는 듯 말을 이었다.
"어휴...김창식 이 미친 놈은 무슨 고양이를 그렇게 아작내 버린거냐? 이거 정신병 있는 것 맞지?"
"......"
"말해봐. 사건 당일 밤 취사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마냥 수사관의 진지한 눈빛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죽은 자들의 이야기만 빼 놓은 채 나는 모든 것을 수사관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니가 김병장한테 고양이를 왜 죽이냐고 하니까 김병장이 너한테 칼을 던지며 덤볐단 말이지?
그리고 몸싸움하는 과정에서 의식을 잃어버렸고....."
"네..그렇습니다."
수사관은 볼펜을 이마에 몇 번 튕기더니 입을 열었다.
"니네 부대는 무슨 귀신 씌었냐? 아님 니가 귀신이냐? 애들이 왜 갑자기 니 앞에서만 미친 짓을 하는거냐?"
머릿속에서는 '네'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전대웅, 김창식....그리고 최병희...얘들 공수여단에서 사병생활하다가 전입한 병사들인데, 둘은 헌병대에 가 있고...."
곰곰히 생각에 빠져 있던 수사관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더 조사해 볼건데, 너도 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나중에 얘기해줘. 어차피 넌 헌병대에서 조사 끝날때까지 아무데도 못나가.
이번에 포상휴가 계획돼 있던데, 그것도 미뤄지는거다. 알겠냐?"
나는 묵언의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을 말없이 병실의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마치 긴 잠에 들어 꾸는 꿈처럼 느껴졌다.
"아오!!!!!!!! 이 쉽새!!"
병실에 울려퍼지는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다시 한번 깨웠다. 선임하사였다.
선임하사는 무슨 일을 내러 온 사람처럼 모자를 손에 움켜쥐고는 연신 씩씩대며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죽을 것같다. 지금 부대 난리났다. 시방새야."
선임하사의 속사포같은 투덜거림에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웃어? 시방새..니 때문에 지금 헌병대, 기무대 총 출동해서 총기검열, 보안검열, 근무지검열, 구타검열..아주 생쑈를 하고 있다니까. 니 단초 세운거 걸리는 날에는 나도 불려가서 존나 욕처먹는거야. 징계받을지도 몰라 쨔샤!!
저번엔 총맞고, 지금은 칼맞고, 다음엔 수류탄이라도 까서 똥구녕에 처넣을래? 하여튼 그 때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큭큭..웃기지 마세요 선임하사님....목아파요..."
"아...니미럴. 니 뒤졌으면 나 영창가는거야."
"그래서 살아있잖아요."
"저 놈의 주둥아리는 살아가지고는....쯧쯧
그런데 김창식이 이 새끼는 고양이고 사람이고 왜 칼질을 해가지고는...그나저나 몸은 괜찮냐?"
"예. 근데 병문안 오신 겁니까?"
"내가 뭘 볼게 있다고 병문안을 오냐? 총들고 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어!!"
"그런데 무슨 일로?"
"웬 아줌마가 니한테 말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
"예? 무슨 말... 말입니까?"
"아들을 봤으면 이제 부적을 태워버리란다. 그리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거란다.
그러고보니까 니...그 아줌마 얘기 듣고 나한테 단초 세워달라고 한거였지?"
"반은 맞는 얘기입니다."
"뭐? 도대체 그 아줌마가 누군데?"
"주..죽은 정한수라는 사람의 어머니입니다. 무당입니다."
선임하사는 놀라는 듯 마지막 말을 간신히 내뱉았다.
"아....씨발...그래서 니가 그 부적들고 귀신놀이 하러 간다고 한거구나. 소름끼친다. 더 이상 안 물어볼게."
하루가 더 지나서야 나는 의무대를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복장을 갖추고 있는 와중에 의무병이 몇가지 나의 소지품을 챙겨주고 있었다.
나는 그가 챙겨 준 작은 주머니 안에서 부적을 찾았다.
그리고 의무대가 조금 멀어졌음을 확인한 나는 준비한 라이터를 이용해서 그 부적에 불을 붙였다.
회색빛의 벗꽃잎이 날리 듯 작은 흔적들이 바람을 타고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로부터 멀어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먼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등뒤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창훈 일병!! 빼놓은게 있네요."
소지품을 챙겨주던 의무병이었다. 그는 손에 든 무언가를 나에게 내밀었다.
"너무 낡고 헤진거라서 버리려고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그가 건네 준 작은 수첩을 쥐어들었다.
그 안에는 알 수없는 이름과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어린 아이가 쓴 어지럽고 불규칙한 글씨 같았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힘겹게 써 넣은 나의 필체였다.
그 필체와 함께 잠시 잊혀졌던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은 김우식, 경상북도 의성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소. 우리 부모님하고 공부 잘하던 우리 동생 우철이한테 안부
전해주소. 나 돌아갈 때까지 이사 안간다고 약속했수다."
"내 이름은 최국봉이오. 전라남도 장성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고요. 살아 계실랑가 모른디 우리 엄니한테 죄송하다고
전해주시오. 거시기..그 때 우리 집 소 도망간 게 아니라 제가 팔아 먹었다고 말이오. 그 때 우리 엄니가 음청 찾았었는디.."
"이름은 우기철, 충청북도 괴산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수. 우리 아들 진석이 잘 키워줬으리라 믿는다고 아내에게 전해주소.
참말로 많이 보고 싶소. 전쟁 끝나면 꼭 살아 돌아간다고 약속 했는디...그 고운 얼굴이 할매가 되어 있겠네. 흑..눈물 나는구먼"
"내 이름은 박정국입네다. 평안북도 연변군 xx면 xx리 xx번지. 통일되면 꼭 찾아서 안부 전해주드라요. 우리 가족들 안내려왔으면 다들 북에 있음매..."
".............."
그들의 말을 받아 적을 때처럼, 나는 가슴 한구석이 또다시 저미어오기 시작했다 .
십수명의 부탁이 빼곡히 적인 글을 천천히 읽어보며, 나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는데 상당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느꼈다.
"끼이익!!"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자동차의 거친 제동소리가 내 앞에 멈춰섰다.
"부대 복귀하는가 보군"
헌병대 수사관이 지프차 조수석에 앉아 내게 말을 걸었다.
"네. 그렇습니다."
"차에 타. 안 그래도 니네 부대 가는 길인데."
내가 차에 올라타자 수사관은 내게 어떤 사실을 더 캐내고자 하는지 그간 조사한 몇 가지 사실들을 내게 털어놓았다.
"김창식, 이 자식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당최 수사의 진전이 없다. 너 내일이라도 헌병대에 들러야겠다.
전대웅, 김창식, 최병희 모두 같은 부대에 있었더구만. 게다가 살인사건에 연루돼 있었구.
피살자가 김선호 아마 범인이 한동철이라고 했지?"
수 분동안 그의 말이 이어졌지만 대부분은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얘기가 깊어지자 수사관은 점점 내가 알 지 못했던 사실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동철이가 감옥에서 자살을 했더라는군."
"네? 자..자살 말입니까?"
"김선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교도소 안에서도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하더라는거야.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간수들 판초우의를 뺏아 그 속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자기 어깨를 칼로 찌르는 시늉도 하더란 말이다.
게다가 벽이고 바닥이고 김선호라는 이름으로 도배를하고, 심지어 자기 옷과 명찰에도 김선호로 도배를 했다더군.
자해를 할까봐 교도소에서도 특별관리까지 했었는데 결국 교도소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외부활동 시간에 간수들 몰래 자살을 한거야.
그런데 그냥 목매달아 죽을 것이지 김선호처럼 똑같이 어깨에 칼을 꽂아 죽었다는군. 벌 받은건지도 몰라. 죄짓고는 못살지."
수사관의 말이 이어지는 와중에 저 멀리 나의 부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알 수 없는 공포감이 함께 몰려왔다.
"수..수사관님..자..잠깐 차 좀 세워주십시오."
"왜?"
"가..가슴이 답답해서 말입니다. 멀미가 몰려옵니다."
"이런...저 번에 생긴 총상 때문인가? 알았어. 야. 운전병 차 세워"
나는 잠시 차에서 내려 숨을 고르며 수사관에게 물었다.
"호..혹시...한동철이란 사람...고양이 알러지 있지 않았습니까?"
나의 물음에 수사관은 놀라는 듯이 답했다.
"헐..그걸 니가 어떻게 알았냐? 그 알러지 때문에 교도소를 지나다니던 고양이를 죽인 적도 있다더군."
힘없이 바닥에 누워서 내게 털어놓던 김병장의 말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고...고양이가 나..나타나면 기..기침소리가 들려...그..그리고 죽여...]
그리고 초소에서 처음으로 전상병과 몸싸움을 할 때........어깨에 피를 흘리며 김선호라는 명찰을 달고 있던 그 병사....
"이럴 수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본 것은 김선호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김선호는 우리 부대에 없었다. 갑자기 토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에엑!!"
"이봐..이창훈 너 괜찮아?"
토를 하는 와중에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읊조리던 김병장의 말이 떠올랐다.
[애초부터 우린....같이 이 곳에 오질 말아야 했어....아니면...이 곳을 우리만의 부대로 만드는거야. 우린 영원히 함께 하는거지...
아무리 니가 나를 멀리하려 해도 절대로 넌 벗어날 수가 없어....]
토악질 때문인지 공포심 때문이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부대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나와서 나를 반겼다.
최병희 병장이었다.
나는 그에게 예를 갖출 틈도 없이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만 보았다.
평소 미친개라 불리던 최병장이 알 수 없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
웃대 공포 게시판에서 자작 괴담들 연재하시던 하드론님 글인데 글 전개 몰입도도 쩔고 떡밥 회수도 기가 막히게 하셔서 같이 보자고 가져왔어ㅎㅎ 영화로 만들어져도 될 것 같은 퀄임ㅠㅠ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켁켁...이봐...거기..이것 좀 풀어줘...켁켁..."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거의 죽어가는 모습으로 그는 다급하게 한번 더 나를 불렀다.
"켁켁...어제 밥 먹고 있을 때..켁켁 나 봤잖아...."
그의 눈알은 거의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나는 그 무당 여자의 말과 지금 쓰러져가는 저 귀신병사에 대한 두려움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목에 감긴 올가미를 풀어냈다.
"콜록! 콜록....아~~ 죽을뻔 했네. 어떤 자식이 여기다가 올가미를 쳐논거야?"
"......."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내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죽은 놈이 뭘 또 죽나?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목주변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내 밥...내 밥 어딨지?"
주변을 더듬거리던 그 병사는 이내 자신의 반합통을 찾아내고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허겁지겁 밥인지 죽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입에 우겨넣었다.
"오랜만에 사람 보네."
"네?"
그는 허기가 가시지 않는지 바쁜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이봐요..."
나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서는 정체모를 음식물의 국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그러슈?"
"...나..난 사람이예요."
"뭐요? 누가 사람 아니랬소?"
그러더니 그는 다시 반합통 속의 음식물을 퍼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를 알 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그 자신의 정체를 말해주고 싶었다.
"다..당신은.."
내가 입을 열려고 하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부대원 들이오."
그가 고개를 한 번 까딱이며 내 뒤에 시선을 맞추었다.
나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십수명의 병사들이 실루엣을 그리며 서 있었다.
"헉!!"
나는 순간 다리 근육에 힘이 풀려 이내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우린 길을 잃었어."
숟가락질을 멈춘 병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답답한지 철모를 벗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드러난 그의 머리 측면에 구멍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린 것의 정체가 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구멍 속에서 쿨럭대듯이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얼마 동안 헤매고 있었는지 몰라.
뭔가를 먹고 있었는데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그 뒤론 기억이 안나......그냥 어둠만 있는거야.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우릴 깨워줬는데, 깨어나서 주변을 살펴보니 뭐가 이상했어."
그는 간지러운지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들이 없어졌어. 우리들만 빼 놓고 말야. 아무리 돌아다녀도...우리 밖에 없는거야.
우리가 상대하던 적들은 물론 주변에 민간인들도 없고, 들어오는 신병도 없고, 제대하는 사람도 없고, 휴가가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짐승들도 없었어. 새소리도 곤충소리도 고양이 소리도 개 짖는 소리도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두서너번의 숟가락질을 하였다.
"그리고...해가 뜨지 않아."
"예...예?"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지 않으면 그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해도 뜨지 않고 달도 뜨지 않아. 그냥 어둠만 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볼 수도 있고, 주변을 살필 수도 있었지.
단지 시간의 흐름만 느껴지지가 않았어. 시간이 흘러가는 건지 멈춰있는 건지 도대체 알수가 없더라니까.
그제가 어제같고, 어제가 그제같고, 오늘 한 일이 어제 했던 일 같고, 어제 했던 일들이 그제 했던 일 같고....
뒤죽박죽이야. 정리가 안돼."
그는 멍하니 어딘가를 주시하더니 기억 속의 뭔가를 계속 되뇌는 것 같았다.
"더 큰 문제는 이 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거야. 어디론가 계속 전진하면 계속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와 있는거야.
앞으로 가도 제자리, 뒤로 가도 제자리, 몇날 며칠을 걸어가도 제자리....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되고 있는 느낌...알아?
마치 우린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아. 이 곳을 벗어날 수가 없어."
나는 십수명의 병사들이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누군가가 눈에 보여서 그에게 다가가면 그는 우리를 몰라보는 것 같았어.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사람을 좇아 다녀봤는데도 여전히 못알아 보더라구.
그런데 약간의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우리를 알아보면서도 모르는 척 피해다니는 것 같았어.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는데 이제서야 나를 알아보는 자네를 만난거라구.
어제도 알아보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갔지?"
"....예"
"자넨..어디서 온 거지?"
"예?"
"낯선 얼굴인데...."
나는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정작 내가 반드시 만나야 될 그들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많은 수의 병사들을 본 나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묘안 하나를 떠올렸다.
이 방법이 통할지 안통할지는 몰랐지만 이미 내 입은 말을 꺼내고 있었다.
"다...당..당신들이 이 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가르쳐드릴게요."
"뭐? 뭐라구?"
나의 뜻하지 않은 제안에 그 병사와 함께 맞은 편에 있던 병사들이 놀란 듯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순간 내 주책맞은 입이 무슨 짓을 한건가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떻게?"
"대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병사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무슨 부탁?"
"정한수와 김선호라는 사람을 찾아줘요."
"뭐?"
"그 사람들을 찾아주면 당신들이 이 곳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가르쳐드릴게요."
"좋아...찾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일 이 시간쯤 제가 저기 있는 초소에 있을 겁니다. 거기로 데리고 오면 됩니다."
"뭐..그 정도야..오늘부터 다른 훈련거리가 생겼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이 곳에 있는게 확실한가?"
"확실해요. 당신들이 돌아다니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들 얼굴을 모르는데..."
"당신들처럼 군인이예요. 명찰을 보면 알 수 있을거예요."
"좋아 한번 찾아보지. 그럼 약속대로 우릴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는거지?"
"그...그렇다니까요."
대책도 없는 나의 약속을 알아차리기라도 한걸까?
갑자기 나의 대답에 어둠속에 묻혀있던 병사들이 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그들의 모습이 선명해지자 나는 곧 삭신이 저려오는 공포에 휩싸여야만 했다.
그 어둠 속의 실루엣이 나에게 미처 알려주지 못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눈에 비친 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떤 병사는 한쪽 팔이 떨어져나가 없었고, 어떤 병사는 두 다리를 볼 수가 없었으며, 어떤 병사는 얼굴의 절반이 으깨져
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또 어떤 병사는 찢어진 뱃가죽 밖으로 쏟아진 내장을 매달고 있었으며, 어떤 병사는 아예 하반신이 보이지 않은 채, 전선줄 같은
무언가를 길게 늘이고 있는 상반신만 공중에 띄워놓고 있었다.
누구 하나 몸이 성한 병사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극도로 혐오스럽고 구역질 나는 장면을 연출하며 내게 다가왔다.
그들 중 얼굴의 반이 으깨져 사라져 버린 병사가 내 코 앞까지 다가오더니, 뭔가에 젖은 손을 내 왼쪽 어깨에 올렸다.
그리고 그 흉측한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낮고 느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일 거짓말이면....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자신의 한쪽면 치아들이 모두 밖에 드러나 있음에도 그의 발음은 굵고 명확했다.
그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입속의 치아들은 공포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계속 자잘한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네..네...아..알겠습니다."
나는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위속의 내용물을 간신히 틀어막으며,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겼다.
그는 나머지 얼굴 한쪽면에 힘겹게 붙어있는 반쪽의 입술을 늘이며 음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당의 경고도 무시한 채, 귀신과 대책없는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야!! 이창훈!!!"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고함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아~~ 이 새끼 진짜 못말리겠네."
선임하사였다.
"서..선임하사님이 여긴 어떻게..."
"여긴 어떻게? 야~~~ 이 미친놈아.. 근무는 안나가고 왜 짬밥통 옆에서 쳐자고 지랄이야!!"
선임하사의 말에 나는 잽싸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많던 병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내 품에는 올가미에 걸려 목에 상처를 입은 고양이 한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너 여기서 뒤집어져 자려고 근무 혼자 보내달라고 한거냐? 어쭈? 애완동물까지 만들어 두셨네."
"며..몇 시입니까 선임하시님."
"몇시? 근무시간이 5분이나 지났어 자식아!!"
"5분이요? 5분 밖에 안지났단 말입니까?"
"5분 밖에? 너 군대에서 5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몰라서 그래? 내가 순찰 안 돌았으면 해뜰 때까지 잘 놈이었네."
나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이 으깨진 듯 정리가 되지 않았다.
"뭐해? 자식아!! 니가 보고 싶어하던 귀신들 기다릴거 아냐? 빨리 근무지로 안 뛰어?"
"예. 선임하사님!!"
나는 품에 안은 고양이를 내려놓고 허겁지겁 근무지를 향해서 뛰었다.
나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그 고양이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고참들의 질책을 먹은 나는 선임하사와 약속한 시나리오 대로 내 사수는 현재 선임하사와 같이 있다고 둘러댄 후
또 다른 어떤 공포가 몰려올 지 모르는 혼자만의 근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귀신들을 만나기라도 한 걸까? 그냥 꿈꾼게 아닐까?
나는 알 수없는 싸늘한 한기에 잠시 팔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왼쪽 어깨 위에 뭔가가 느껴졌다.
흙이었다.
아니...흙으로 그려진 사람 손자국...그리고 나의 뇌는 몇 분전 들었던 낮고 굵은 그 음성을 재생하고 있었다.
"만일 거짓말이면....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 나왔다.
"니미..시발..x됐다."
-계속-
그 곳의 기묘한 이야기-12 : 만남
그 날 야간 근무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 어둠의 병사들은 그들이 약속한대로 김선호와 정한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못찾아도 문제, 찾아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갈수록 김창식 병장의 표정이 수상해져 갔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하루종일 아무 말도 없이 취사일만을 하고 있었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묘한 긴장감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김병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애초부터 우린....같이 이 곳에 오질 말아야 했어...."
"김..김병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없이 식재료를 칼질하고 있는 김병장이 알 수없는 말을 내뱉았다.
"아니면...이 곳을 우리만의 부대로 만드는거야. 우린 영원히 함께 하는거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김병장은 계속해서 혼자 읊조렸다.
"김병장님...괜찮으십니까?"
그러나 김병장의 독백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니가 나를 멀리하려 해도 절대로 넌 벗어날 수가 없어...."
나는 천천히 칼질을 하고 있는 김병장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손을 가져다 대었다.
"김..김병장님.."
그러자 김병장님 갑자기 나를 노려보더니 호통을 쳤다.
"배식 준비 안하고 뭐해 임마!!"
"네..네...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김병장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전상병이 사고를 친 이후로 김병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듯 보였다.
그 어둠의 병사들과 약속한 시간이 돌아왔다.
5초소 주변에는 싸늘한 한기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충만하던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고, 내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다.
"아....씨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애초부터 그 무당여자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죽는건 마찬가지인 상황이 돼버렸다.
싸늘한 한줌의 바람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서야 문득 정신이 든 나는 산 중에 처박힌 공포의 5초소에 홀로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깨닫게 되자 주변의 사물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초소 옆 창에 비친 손모양의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을씨년스런 바람소리가 하이톤의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모든게 공포로 돌변했다.
바람소리, 새소리, 나를 향애 손을 흔드는 나뭇잎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물줄기 소리....
어느 것 하나 공포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내 앞에 비친 무언가는 조금 전의 그것들이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십수미터 앞 아카시 나무.....그 어둠속에서 판초우의를 쓰고 나를 지켜보던 병사가 있던 자리....
그 아카시 나무에 누군가 팔다리를 늘인 채 매달려 있는 것이다.
간간히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이 그를 조금씩 흔들리게 만들었다.
"헉..."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평소 찾지도 않던 그들을 불렀다.
"예수님..부처님..신령님...제발..."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자, 힘주어 닫혀있는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나는 발을 동동구르며 제발 내 눈앞의 그것이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귀신을 본 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던가...어젯밤의 꿈같은 경험이 모두 현실이었음을 나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긴 이 세상에 몸 성히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더욱 요절한 귀신들은 온전히 죽지는 않았을 터.....
나는 빨갛게 충혈됐을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내 눈앞에 누군가가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죽은 정한수임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 나무에 매달린 형상이 그러한 힌트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게 오라는 듯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무언가에 이끌리 듯 말없이 초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근무 중 초소를 이탈하지 말아야 함에도 지금 나에겐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인도하는데로 천천히 그를 따라 나섰다.
어느 정도 발걸음이 계속되자 나는 그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취사장임을 알게 되었다.
"쿵....쿵....쿵"
어둠에 묻힌 취사장 안에서 누군가가 쪼그려앉아 바닥에 있는 뭔가를 계속해서 내려치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만 보였지만 그 실루엣은 김병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말을 걸지 않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섰다.
서서히 내 눈앞에 비쳐진 것은 산산조각난 고양이 사체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느리지만 반복해서 커다란 식칼로 그 사체를 조각내고 있었다.
"김..김 병장님...."
나의 부름에 김병장이 갑자기 칼질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도..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니가 뭔데 여길 들어와!!!!!!!!"
갑자기 김병장의 미친 듯한 일갈과 함께 무언가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빡!!!!"
식칼이었다.
번개처럼 식칼이 날아와 내 목의 오른편을 지나 식기보관함에 꽂혀버렸다.
나는 순간 얼음처럼 온 몸이 굳어버렸다.
김병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멈추지 않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다른 식칼을 찾는게 분명했다.
정신이 든 나는 그제서야 내 오른쪽 목 부위의 작은 통증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손으로 그 곳을 만지자 손바닥이 흥건히 젖어옴을 느꼈다.
내 왼손을 확인한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어....시발...피..."
내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을 즘, 식기함에서 시퍼런 날이 선 식칼을 꺼내 든 김병장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부반이 분명했다.
"다 죽여버려.."
모두 죽일 생각이다. 그의 광기를 멈춰야 했다.
"철커덕!!"
나는 실탄을 장전했다.
아니...선임하사와 약속대로 나는 실탄을 빼고 근무를 서기로 했기 때문에 실탄을 장전하는 시늉만 냈다.
하필 이 순간에 빈 총이라니...
"김..김병장님...멈추지 않으면 쏠겁니다."
나의 말에 김병장은 잠시 행동을 멈추더니, 소름끼치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친 새끼..."
죽을 것을 각오라도 한건지, 아니면 내 소총에는 실탄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건지....
아니면 내가 방아쇠를 당길 용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건지...
김병장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김병장의 부릅 뜬 눈보다 그가 들고 있는 시퍼런 식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진짜로 쏠 겁니다..."
그러나 나의 위협은 김병장에게 아무런 두려움이 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의 걸음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총을 힘껏 휘둘러 그의 손으로부터 식칼을 떨어뜨렸다.
칼을 들고 있던 손에 굉장한 고통이 있었을게 분명함에도 김병장은 개의치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김병장은 한 손으로 내 소총의 총구를 움켜쥐더니 다른 한손으로는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켁켁...기..김병장님.."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는 듯 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김병장의 철근같은 근육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심장과 머리를 잇는 혈액의 이동 통로가 모두 차단된 것 같았다.
김병장의 체중과 힘이 벽에 눌려있는 내 목에 모두 전해지자 극심한 현기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난 밤 올가미에 걸린 그 병사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은 한번도 나를 좌절시킨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러 김병장의 복부를 가격했다.
복부의 충격에 김병장은 잠시 뒤로 물러서며 상체를 숙였다.
나는 수십년간 묵혀왔던 기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 했다.
연신 천식 환자처럼 폐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몸을 추스른 김병장은 갑자기 나를 향해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쿵!!"
내 몸이 벽에 충격을 가하자 나는 의식이 혼미해지면서 이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썩 꺼져버려!!!"
누군가가 호통을 치고 있다.
시야가 흐려져 김병장의 얼굴은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그가 크게 놀랐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나는 쓰러져 있는데 내가 아직 거기에 서 있다.
김병장은 여전히 벽을 등지고 서 있는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는 내가 김병장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여기는 우리 부대야!! 당장 꺼지지 못해!!!"
시야가 흐려진다. 힘겨운 탄식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힘들다....이젠 쉬고 싶다.
"이봐 친구, 괜찮은가"
누군가의 부름에 나는 눈을 떴다.
잔밥통에서 밥을 먹던 그 어둠의 병사였다.
그는 큰 대자로 누워있는 나의 옆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반합통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숟가락을 튕기며 나를 불렀다.
어둠은 가시지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걸까?
"이봐, 친구...우리가 한 참을 찾아봤는데, 정한수라는 그 친구만 찾았어.
자네가 보고 싶다고 해서 자네한테 가보라고 했는데....봤나?"
맞았다. 내가 본 것은 정한수였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오른쪽 목 부위의 통증이 느껴졌다.
"흐흐흐...다행이군. 약속을 다 지키진 못했지만, 자네도 이젠 우리에게 뭔가를 보답해 줘야지?"
그러나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자..이제 우리에게 길을 알려달라고.."
나는 아무말 없이 그 병사의 말만 듣고 있었다.
그는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 연신 입 주위의 분비물을 흘리며 게속해서 히죽거리며 나를 내려다 봤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었다.
지난 밤 나를 위협했던 얼굴의 반쪽면이 으깨진 병사가 그의 등 뒤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굵고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말 해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가 들고 있는 소총의 끝에 달린 시퍼런 대검이 눈에 들어왔다.
공포감보다 절망감이 앞서왔다. 이젠 도망칠 힘도 없고, 저항할 힘도 없었다.
가위 눌린 사람처럼 신체 어느 부위하나 움직이지도 못 한 채, 나는 오로지 눈동자만 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거짓말이면...무사하지 못할거라고 했을텐데...이제 말해..."
"죄송합니다. 큭큭...."
절망감과 서러움이 밀려오면서 나는 급기야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여전히 몸은 마비가 일어난 것처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굴이 으깨진 병사는 내 말을 듣자 내 몸을 가운데 두고 서서 소총의 대검을 내 목에 겨누었다.
"무슨 말이야?"
이 공포의 끝이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솔직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큭큭...거..거짓말을 했어요..."
그의 얼굴 한 쪽면에 드러나 있는 이빨들이 분에 겨운 듯 맞물려 갈리고 있었다.
-계속-
그 곳의 기묘한 이야기-마지막이야기
"거짓말...?"
그의 손떨림으로 인해 소총의 끝에 단단히 고정된 시퍼런 대검이 내 목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어느 새 내 주위로 수많은 어둠의 그림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새끼...우리에게 거짓말을 해? 죽여버리겠어."
그 순간 숟가락질을 하고 있던 병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잠깐..."
나는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봐, 친구..자네..뭔가 알고 있지?"
"......"
숟가락 병사는 쪼그려 앉아 나에게 묻고 있었지만, 얼굴이 으깨진 병사의 대검은 여전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하지 못한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그렇지?"
질문을 던지는 와중에도 그는 요란스런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양 입가에서는 여전히 진득한 국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유언처럼 처절하고 비장한 각오로 입을 열었다.
"네..."
잠시 그 둘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그게 뭐지?"
"다...당신들은...."
나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죽었어요."
요란스럽던 그의 숟가락질이 멈추었다. 갑자기 지옥같은 적막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죽었어요. 죽은 귀신들이예요."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잠시 적막을 깨뜨렸다.
"뭐...뭐...이.씨발 뭔 소리 하는거야?"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 붙였다.
"당신들은 죽은 줄도 모르고 이 곳을 떠돌고 있는겁니다. 전쟁은 끝났어요.....아주 오래 전에"
"우...우리가 주..죽었다구?
숟가락을 떨어뜨린 병사가 잠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피...피!!!"
내게 대검을 겨누던 병사도 자신의 허전한 한 쪽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여기 저기서 자신의 형체, 그리고 다른 이의 형체를 확인한 병사들의 절규가 지옥의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비규환의 세상처럼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어떤 병사는 분수처럼 피를 쏟는 팔이 사라진 자리를 틀어잡으며, 어떤 병사는 쏟아져 내린 자신의 내장을 쓸어담으며,
어떤 병사는 밑동이가 사라진 상체만 바닥에 대고는 두 손으로 연신 바닥을 긁어대고 있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들의 몸부림은 불타오르는 지옥의 세상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낼 기세였다.
참혹한 비명소리와 절규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차마 그들의 처절하고 고통스런 몸부림을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의 절규를 멈추게 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 소리였다. 그리고 총소리, 대포소리......그리고 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칠흑같은 어둠이 주변을 덮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 어느 조명보다 뚜렸한 영상으로 보였다.
전투 중이었다. 여기저기 포탄이 터지고, 수류탄 폭음이 귀청을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장검의 소리처럼 공간을 뚫고 지나가는 총탄의 소리가 들려왔다.
함성소리, 울부짖음....비명소리. 이것만이 포화가 쏟아지는 그 전장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지옥같던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그 영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들 잠든 듯한 새벽 같았다.
인적이 보이지 않는 여기 저기 작은 천막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간간히 초병만이 주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 초병은 잠시 배가 고픈지 자리에 앉아 반합통 속의 원가를 열심히 퍼올려 입에 우겨넣었다.
그 때였다.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 싶더니....
"콰콰쾅!!!"
천둥같은 폭음이 그 천막 위로 쏟아졌다. 여기저기에서 수 십여개의 불기둥들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 불기둥 속에 정체를 알 수없는 덩어리들이 파편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라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넋을 놓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소름끼치는 적막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듯한 병사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작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연못에 던져진 돌맹이가 일으킨 파문처럼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목이 메이도록 울음을 터뜨리는 병사도 있었다.
"우리를 가지고 놀았어...."
얼굴이 으깨진 병사가 잠시 울먹이는 듯 싶더니 고개를 돌려 내게 입을 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으깨진 얼굴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많은 병사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우리하고 약속을 한거지..."
나는 그에게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죽어버려"
그는 천천히 소총을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향해 그 대검을 날렸다.
"잠깐!!"
누군가가 그의 날아오는 소총을 제지하며 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이미 심장마비로 죽을 것 만 같았다.
"망자가 살아있는 이를 건드리면 안됩니다."
정한수였다.
"당신들이 아무 죄없는 이 사람을 죽인다면 영원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누가 더 많은 힘을 주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소총 끝의 대검이 힘에 겨운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대로 우리를 내버려두지 그랬어..."
대검을 겨눈 그 병사의 반쪽 남은 눈빛은 여전히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들이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잖아요. 그렇다면 죽어서도 지켜주는 것이 도리 아닌가요?
집에 돌아갈 수는 없지만, 고통스러웠지만 이제 모두 알았잖아요."
정한수의 말에 그의 남은 반쪽 얼굴에서 작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떨리는 소총의 대검은 여전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어느 병사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뜬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의 말처럼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니...그들이 빛을 느끼고 있었다.
"해가 뜨고 있어. 이럴 수가!!"
여기저기서 환호성들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눈부심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빛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보였다. 너무나도 밝고 너무나고 맑은 빛이 너무나도 빠르게 떠올라 주변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러자 지옥 속의 악마같던 그들의 형상이 서서히 온전했던 이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자신과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울먹였다.
엄청난 눈부심이 있음에도 그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빛을 즐기며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 빛을 바라보던 정한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저 빛을 오래 전에 봤답니다. 단지 자신이 죽을 줄 몰랐거나 떠나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이죠."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답했다.
"고..고맙습니다."
그는 잠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한수씨. 전할 말이 있어요."
"네?"
"어머니가....당신 어머니가 이승에서나마 부모 자식으로 만나줘서 고마웠다고 말씀 전해달래요...."
나의 말에 그는 미소 지은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살아달랍니다...."
정한수는 이내 눈물을 떨구더니 얼굴로 시체처럼 힘없이 길게 늘어진 내 손을 꼭 쥐었다.
쏟아져 나올 피가 다 나온건지 이젠 오른쪽 목부위의 통증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나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정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이봐요. 정한수씨. 물어볼 게 있어요."
"뭔가요?"
"조금 전 당신이 쫓아냈던 그 사람...김병장한테서 쫓아냈던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구예요?"
"몰라요. 모르는 사람이예요. 명찰에 김선호라고 적혀 있었어요. 수시로 그 사람이 김병장의 몸에 들락거린 것 같아요."
"그...그랬었군요..."
"처음엔 이 부대를 저기 있는 군인들로부터 지키려고 했어요.
변변한 비석하나 없이 쓰레기 매몰하듯이 묻힌 자리에서 그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처음엔 가까이 가서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저는 피해만 다녔어요. 그런데 저 사람들은 단지 길을 잃은 것 뿐이었어요. 자신들이 죽은 줄 몰랐던거죠.
정작 김병장의 몸에 붙었던 사람은 다른 이었는데 저는 몰랐던거죠.
저 병사들이 나를 찾아서 말을 걸게끔 해주고, 그들의 정체를 일깨워준 사람은 당신이예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나처럼 쓰러져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누워있는 김병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김병장님은 괜찮은 건가요?"
"몰라요. 그런데 일단 그 혼령은 사라졌어요. 우리들과 함게 하려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의 말을 듣자 끝나지 않을 듯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김병장님....."
나는 시체처럼 누워있는 김병장을 힘겹게 불렀다. 그리고 정말로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고..고양이를 왜 죽이는 겁니까?"
그가 듣고 있는 지의 여부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냥 지금이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절대로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무표정한 얼굴의 김병장이 눈을 감은 채 죽어가는 작은 숨소리로 내게 입을 열었다.
"고양이가...."
"네?"
"고...고양이가 나..나타나면 기..기침소리가 들려...그..그리고 죽여..."
김병장은 알 수없는 말을 뱉은 후 힘이 빠지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아...씨발..이젠 허기가 가시네."
숟가락질에 목숨걸던 그 병사가 뭐라고 투덜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 핏줄기가 얼굴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그의 본얼굴이 드러났다.
"아..아저씨..좀 웃기게 생기셨네요. 큭큭"
"뭐야? 하하하"
그리고 내게 대검을 겨누던 그 병사도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굵고 낮은 음성을 다시 한번 내게 들려 주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가 죽은 줄 알게 해주었으니..."
그의 온전한 외모는 그 목소리만큼이나 출중하고 번듯했다.
숟가락질 병사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부탁의 말을 건넸다.
"이봐 친구..자네가 지키지 못한 약속....다른 걸로 대체하면 안될까?"
"깨어났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광경이 이 곳이 의무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잠시 얘기를 나누던 군의관이 나에게 다가왔다.
"또 만나는구만. 이창훈 일병."
전상병과의 사건 때 나를 담당했던 군의관이었다.
"내가 이런데 다신 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어지간히 부대에서 말썽장이인가 보군."
나는 연신 주변을 살피며 지난 밤 그들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만 하루가 지나서 깨어난거야. 자넨 정말로 운도 좋구만.
전에는 총을 맞고 살아나고, 지금은 칼을 맞고 살아나고..이건 뭐 터미네이터도 아니고..하여튼 자넨 불사신이야."
그제서야 나는 오른쪽 목부위의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출혈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바로 저승으로 가는거였어... 통합병원으로 이송할까 했는데, 워낙 급해서 내가 바로 조치한거야."
"고...고맙습니다. 군의관님."
"조금 있다가 헌병대에서 수사관이 올거야. 니가 움직이기에는 불편한 것 같아서 내가 이리로 오라고 말해뒀어."
나는 그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참 뒤에 나타난 수사관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작은 서류를 꺼내들었다.
"이번 사건 정리되면 전출 명령 떨어질 것 같다. 전대웅하고 김창식이는 형기 채워도 니네 부대로 다신 못돌아가."
난 그제서야 김병장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김..김창식 병장...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가해자 신분으로 헌병대에 수감되어 있어."
"몸은 괜찮습니까?"
"쨔식...니 걱정이나 해. 김창식은 괜찮아. 너희 두 놈 다 취사장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어.
그런데 너도 참 대단하다. 고참들을 두 명이나 헌병대에 처넣어버렸으니.."
수사관은 잠시 사진이 박힌 서류를 몇 장 넘기더니 놀라는 듯 말을 이었다.
"어휴...김창식 이 미친 놈은 무슨 고양이를 그렇게 아작내 버린거냐? 이거 정신병 있는 것 맞지?"
"......"
"말해봐. 사건 당일 밤 취사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마냥 수사관의 진지한 눈빛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죽은 자들의 이야기만 빼 놓은 채 나는 모든 것을 수사관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니가 김병장한테 고양이를 왜 죽이냐고 하니까 김병장이 너한테 칼을 던지며 덤볐단 말이지?
그리고 몸싸움하는 과정에서 의식을 잃어버렸고....."
"네..그렇습니다."
수사관은 볼펜을 이마에 몇 번 튕기더니 입을 열었다.
"니네 부대는 무슨 귀신 씌었냐? 아님 니가 귀신이냐? 애들이 왜 갑자기 니 앞에서만 미친 짓을 하는거냐?"
머릿속에서는 '네'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전대웅, 김창식....그리고 최병희...얘들 공수여단에서 사병생활하다가 전입한 병사들인데, 둘은 헌병대에 가 있고...."
곰곰히 생각에 빠져 있던 수사관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더 조사해 볼건데, 너도 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나중에 얘기해줘. 어차피 넌 헌병대에서 조사 끝날때까지 아무데도 못나가.
이번에 포상휴가 계획돼 있던데, 그것도 미뤄지는거다. 알겠냐?"
나는 묵언의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을 말없이 병실의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마치 긴 잠에 들어 꾸는 꿈처럼 느껴졌다.
"아오!!!!!!!! 이 쉽새!!"
병실에 울려퍼지는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다시 한번 깨웠다. 선임하사였다.
선임하사는 무슨 일을 내러 온 사람처럼 모자를 손에 움켜쥐고는 연신 씩씩대며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죽을 것같다. 지금 부대 난리났다. 시방새야."
선임하사의 속사포같은 투덜거림에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웃어? 시방새..니 때문에 지금 헌병대, 기무대 총 출동해서 총기검열, 보안검열, 근무지검열, 구타검열..아주 생쑈를 하고 있다니까. 니 단초 세운거 걸리는 날에는 나도 불려가서 존나 욕처먹는거야. 징계받을지도 몰라 쨔샤!!
저번엔 총맞고, 지금은 칼맞고, 다음엔 수류탄이라도 까서 똥구녕에 처넣을래? 하여튼 그 때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큭큭..웃기지 마세요 선임하사님....목아파요..."
"아...니미럴. 니 뒤졌으면 나 영창가는거야."
"그래서 살아있잖아요."
"저 놈의 주둥아리는 살아가지고는....쯧쯧
그런데 김창식이 이 새끼는 고양이고 사람이고 왜 칼질을 해가지고는...그나저나 몸은 괜찮냐?"
"예. 근데 병문안 오신 겁니까?"
"내가 뭘 볼게 있다고 병문안을 오냐? 총들고 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어!!"
"그런데 무슨 일로?"
"웬 아줌마가 니한테 말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
"예? 무슨 말... 말입니까?"
"아들을 봤으면 이제 부적을 태워버리란다. 그리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거란다.
그러고보니까 니...그 아줌마 얘기 듣고 나한테 단초 세워달라고 한거였지?"
"반은 맞는 얘기입니다."
"뭐? 도대체 그 아줌마가 누군데?"
"주..죽은 정한수라는 사람의 어머니입니다. 무당입니다."
선임하사는 놀라는 듯 마지막 말을 간신히 내뱉았다.
"아....씨발...그래서 니가 그 부적들고 귀신놀이 하러 간다고 한거구나. 소름끼친다. 더 이상 안 물어볼게."
하루가 더 지나서야 나는 의무대를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복장을 갖추고 있는 와중에 의무병이 몇가지 나의 소지품을 챙겨주고 있었다.
나는 그가 챙겨 준 작은 주머니 안에서 부적을 찾았다.
그리고 의무대가 조금 멀어졌음을 확인한 나는 준비한 라이터를 이용해서 그 부적에 불을 붙였다.
회색빛의 벗꽃잎이 날리 듯 작은 흔적들이 바람을 타고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로부터 멀어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먼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등뒤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창훈 일병!! 빼놓은게 있네요."
소지품을 챙겨주던 의무병이었다. 그는 손에 든 무언가를 나에게 내밀었다.
"너무 낡고 헤진거라서 버리려고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그가 건네 준 작은 수첩을 쥐어들었다.
그 안에는 알 수없는 이름과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어린 아이가 쓴 어지럽고 불규칙한 글씨 같았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힘겹게 써 넣은 나의 필체였다.
그 필체와 함께 잠시 잊혀졌던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은 김우식, 경상북도 의성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소. 우리 부모님하고 공부 잘하던 우리 동생 우철이한테 안부
전해주소. 나 돌아갈 때까지 이사 안간다고 약속했수다."
"내 이름은 최국봉이오. 전라남도 장성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고요. 살아 계실랑가 모른디 우리 엄니한테 죄송하다고
전해주시오. 거시기..그 때 우리 집 소 도망간 게 아니라 제가 팔아 먹었다고 말이오. 그 때 우리 엄니가 음청 찾았었는디.."
"이름은 우기철, 충청북도 괴산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수. 우리 아들 진석이 잘 키워줬으리라 믿는다고 아내에게 전해주소.
참말로 많이 보고 싶소. 전쟁 끝나면 꼭 살아 돌아간다고 약속 했는디...그 고운 얼굴이 할매가 되어 있겠네. 흑..눈물 나는구먼"
"내 이름은 박정국입네다. 평안북도 연변군 xx면 xx리 xx번지. 통일되면 꼭 찾아서 안부 전해주드라요. 우리 가족들 안내려왔으면 다들 북에 있음매..."
".............."
그들의 말을 받아 적을 때처럼, 나는 가슴 한구석이 또다시 저미어오기 시작했다 .
십수명의 부탁이 빼곡히 적인 글을 천천히 읽어보며, 나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는데 상당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느꼈다.
"끼이익!!"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자동차의 거친 제동소리가 내 앞에 멈춰섰다.
"부대 복귀하는가 보군"
헌병대 수사관이 지프차 조수석에 앉아 내게 말을 걸었다.
"네. 그렇습니다."
"차에 타. 안 그래도 니네 부대 가는 길인데."
내가 차에 올라타자 수사관은 내게 어떤 사실을 더 캐내고자 하는지 그간 조사한 몇 가지 사실들을 내게 털어놓았다.
"김창식, 이 자식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당최 수사의 진전이 없다. 너 내일이라도 헌병대에 들러야겠다.
전대웅, 김창식, 최병희 모두 같은 부대에 있었더구만. 게다가 살인사건에 연루돼 있었구.
피살자가 김선호 아마 범인이 한동철이라고 했지?"
수 분동안 그의 말이 이어졌지만 대부분은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얘기가 깊어지자 수사관은 점점 내가 알 지 못했던 사실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동철이가 감옥에서 자살을 했더라는군."
"네? 자..자살 말입니까?"
"김선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교도소 안에서도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하더라는거야.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간수들 판초우의를 뺏아 그 속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자기 어깨를 칼로 찌르는 시늉도 하더란 말이다.
게다가 벽이고 바닥이고 김선호라는 이름으로 도배를하고, 심지어 자기 옷과 명찰에도 김선호로 도배를 했다더군.
자해를 할까봐 교도소에서도 특별관리까지 했었는데 결국 교도소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외부활동 시간에 간수들 몰래 자살을 한거야.
그런데 그냥 목매달아 죽을 것이지 김선호처럼 똑같이 어깨에 칼을 꽂아 죽었다는군. 벌 받은건지도 몰라. 죄짓고는 못살지."
수사관의 말이 이어지는 와중에 저 멀리 나의 부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알 수 없는 공포감이 함께 몰려왔다.
"수..수사관님..자..잠깐 차 좀 세워주십시오."
"왜?"
"가..가슴이 답답해서 말입니다. 멀미가 몰려옵니다."
"이런...저 번에 생긴 총상 때문인가? 알았어. 야. 운전병 차 세워"
나는 잠시 차에서 내려 숨을 고르며 수사관에게 물었다.
"호..혹시...한동철이란 사람...고양이 알러지 있지 않았습니까?"
나의 물음에 수사관은 놀라는 듯이 답했다.
"헐..그걸 니가 어떻게 알았냐? 그 알러지 때문에 교도소를 지나다니던 고양이를 죽인 적도 있다더군."
힘없이 바닥에 누워서 내게 털어놓던 김병장의 말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고...고양이가 나..나타나면 기..기침소리가 들려...그..그리고 죽여...]
그리고 초소에서 처음으로 전상병과 몸싸움을 할 때........어깨에 피를 흘리며 김선호라는 명찰을 달고 있던 그 병사....
"이럴 수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본 것은 김선호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김선호는 우리 부대에 없었다. 갑자기 토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에엑!!"
"이봐..이창훈 너 괜찮아?"
토를 하는 와중에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읊조리던 김병장의 말이 떠올랐다.
[애초부터 우린....같이 이 곳에 오질 말아야 했어....아니면...이 곳을 우리만의 부대로 만드는거야. 우린 영원히 함께 하는거지...
아무리 니가 나를 멀리하려 해도 절대로 넌 벗어날 수가 없어....]
토악질 때문인지 공포심 때문이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부대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나와서 나를 반겼다.
최병희 병장이었다.
나는 그에게 예를 갖출 틈도 없이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만 보았다.
평소 미친개라 불리던 최병장이 알 수 없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
웃대 공포 게시판에서 자작 괴담들 연재하시던 하드론님 글인데 글 전개 몰입도도 쩔고 떡밥 회수도 기가 막히게 하셔서 같이 보자고 가져왔어ㅎㅎ 영화로 만들어져도 될 것 같은 퀄임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