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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알고있지만 이번엔 지완이 시점으로 20000자 적어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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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5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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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편 링크 

https://theqoo.net/gl/2142152112



추천 BGM

Healing - Slow N Slow



그럼 진짜로 20000~






.

.

.






 

서지완 진짜 비싼척 오진다.”

왜 또.”

, 주말에 시간 되냐고 카톡했더니 읽씹 하잖아.”

미친놈. 그러게 번호를 왜 따냐. 쪽팔리게.”

 



낄낄거리는 남학생들 목소리 사이에 섞인 익숙한 이름을 듣고는 바삐 움직이던 다리가 뚝 멈춰졌다. 온몸이 굳는다는 건 이럴 때 쓰는 표현인 걸까. 진로희망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담임선생님에게 불려가서 잔소리를 듣느라 하교시간이 늦어진 덕분에 혼자서 귀가하던 길. 발걸음을 재촉하며 교문에 다다랐을 즘, 누군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이들의 웃고 떠들어대는 소리에 놀라 재빨리 교문 뒤로 몸을 숨겼다.



 

이럴거면 헤프게 번호를 왜 주냐고.”

왜 주기는. 얼결에 줬겠지.”

야 됐어. PC방이나 가자.”



 

교문의 담장 너머로 왁자하게 목소리를 내던 아이들의 발소리가 맞물리며 멀어질 때 쯤,



 

.”

 


나는 문득 그런 소리를 냈다.

날씨가 추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는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괜히 신발 끝을 땅바닥에 톡톡치다가 품 안에 들고 있던 교과서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어느덧 저 멀리 해가 저무는 건지,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은 어쩐지 나를 더 비참하게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 쯤 어딘가에서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어 눈을 돌렸다.



 

[홍서대학교 주최 제47회 전국 중고등학생 조형미술 실기대전 대상 2-1 윤솔]



 

교문 위, 가장 높은 곳에 걸린 현수막.

그것이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윤솔.

 

너는 좋겠다.”



 

나는 문득 그 이름을 곱씹으며, 얼굴도 모르는 아이에게 부러움을 느끼며,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2학년 봄.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아서 하고 싶은 일이 없는 15살의 봄.

지금의 나는 겨우 이런 모습이고, ‘10년 뒤의 나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다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길, 같은걸 어떻게 알고 저만치 앞서나가는 걸까.

 



짜증나.”

 



문득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발을 한 번 세게 구르고는, 어서 빨리 집에 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교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장통

 





 

 

소개팅?”

 


솔이는 파스타 면을 돌돌 말다가 놀랐다는 듯 질문을 던져왔다. 강의를 마친 뒤 학교 앞 파스타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자며 솔이를 끌고 온 참이었다.



 

. 할 생각 없었는데, 원래 하기로 했던 애가 안 한다고 했나봐.”


 

친구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얼결에 하게 됐다고, 그런 대화를 이어나가며 자몽에이드를 집어 들었다. 얼음이 가득한 유리컵 안에는 나란히 꽂힌 빨대가 두 개. 노란색 빨대를 집어 음료를 쭉, 빨아들였다.

 


언제 하기로 했는데?”

내일!”


 

계절은 이제 늦가을. 아니, 초겨울인가. 창밖으로는 쌀쌀한 날씨에 옷을 여미고 걸어가는 무채색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흐린 하늘이 꼭, 눈이 올 것 같은 날씨다.

 



내일 애들이랑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솔이는 손에 쥐고 있던 포크와 수저를 내려놓고 질문을 던졌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미세하게 찡그린 표정을 짓는다.



 

? . 맞아. 네가 애들한테 잘 좀 말해주라.”



 

소개팅은 정말 얼결에 하게 된 것이지만, 기왕 하기로 했으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자고 약속을 잡았다. 이제 곧 기말고사 기간이니,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 나 원래 다른 일 있었는데 네가 꼭 가야된다고 난리쳐서.”

, 알지알지. 진짜 미안해. 솔아.”



 

근데 같이 약속했다가 너라도 안가면 나 애들 볼 때마다 욕먹는단 말야. ? 이번만 부탁할게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너는 찡그렸던 표정을 풀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포기했다는 듯, 그런 미묘한 표정으로 웃는다.

 



다음에는 이러지 말자. ?”


 

내가 말 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 것 같은 너의 모습에 나는 또 왠지 모를 안심을 하게 되고,

 


진짜 고마워. 솔아. 사랑해~”

됐거든.”


 

나를 이해해주는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

 

32. 새학기가 시작되는 날에는 어김없이 잠을 이루지 못 한다. 짧은 봄방학 기간 중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도 한몫했지만, 새학기, 첫 날의 등교를 생각하면 어쩐지 잠이 오지 않는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에서도 벌써 2학년, 그러니까 도합 8년간 새학기를 맞이했음에도 매년 똑같이 첫 등교를 해야 하는 32일은 왜 이리도 떨리는 걸까.

 



3학년, 새학기, 32, 그런 생각을 하느라 한참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동이 틀 무렵쯤 간신히 잠에 들었는데, 우렁차게 울려대는 알람소리에 결국 잔 듯, 못잔 듯, 아침을 맞이했다.



 

.”



 

아침은 왜 이토록 괴로운 걸까.

해가 늦게 뜨는 초 봄. 어둑한 창밖을 바라보며 등교준비를 하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오전 710.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일어나 준비를 이르게 마쳤음을 이제야 깨닫고는, 어젯밤 알람을 잘 못 맞췄음을 상기하고 탄식했다. ,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책가방을 챙겼다.

 



나는 원래 등교시간에 맞춰 등교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니까, 820분 쯤 교문에 선 부장 선생님들이 빨리 오라며 닦달 하는 호통과 함께 등교를 하곤 했다. 가끔은 등교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봐 헐레벌떡 뛰어 교문을 통과하는 날도 많았고, 또 가끔은 연이은 지각으로 교무실에 불려가 담임선생님의 잔소리를 듣는 날도 많았다. 그럼에도 한 번 생긴 습관은 좀처럼 고치기가 쉽지 않아서 매번 820분을 오가는 사이에 등교를 하곤 했다. 그건 아마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니 오늘도 시간 맞춰 등교를 할까, 하다가 기왕 일찍 일어났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등교하자는 마음에 출근하는 아빠의 차를 타고 등교를 했다.



 

아직 어둑한 학교는 고요로 물들어 있었고, 아무도 등교하지 않은 쓸쓸한 교정을 지나 중앙현관을 통해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3-5라고 적힌 팻말을 확인하고는 교실 문을 열고, 불을 켜고, 온기가 없는 교실에 난방을 키고는 어둠이 액자처럼 걸린 창가 자리에 허리를 내렸다.

 



춥다.


 

낯선 책상에 앉아 그렇게 중얼거렸다.

 



책이라도 읽을까, 싶어서 들고 온 문고본을 꺼내들었다가, 어쩐지 집중이 되지 않아 아무도 오지 않는 교실문을 바라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떠오르는 창밖의 풍경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조용하고, 어둡고, 적막하고, 쓸쓸한 교실 풍경. 순간 그런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무서워.


 

텅 빈 교실, 텅 빈 교정에 어쩌면 이 순간 나 혼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몸이 떨려왔다. 빨리 누구 안 오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손톱 끝을 매만지는데, 순간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건넸다. 앞머리를 일자로 내린 키가 큰 여자아이는 놀랐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조용히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등장한 누군가가, 어둠과 침묵을 깨뜨려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아이에게 다가가며 재빨리 명찰을 통해 이름을 확인했다.



 

윤솔?”

?”



 

놀랐다는 듯 자신의 명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아이를 보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1분 전까지만 해도 혼자 있는게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 너 알아! 미술대회 나갈 때마다 교문에 현수막 붙었었지.”



 

눈앞에 서있는 건 그 유명한 윤솔. 온갖 중고등학생 대상 미술대회를 휩쓸고 다닌다는, 교장 선생님의 자랑. 부러워마지 않던 현수막의 주인공.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수없이 들어봤던 그 윤솔이었다.


 

대단하다. .”

……….”

 



나는 아이를 본 소감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건 꾸며낸 인사는 아니었다. 내 진심을 담은 감탄을 너도 알았던 걸까. 너는 복잡한 표정으로 뒷목을 쓸어내리며 작게 웃었다.



 

난 서지완이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 모습에 또 웃음이 나서 악수를 청하듯 인사를 건네고, 어정쩡하게 맞잡은 너의 손이 무척이나 따뜻하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윤솔! 여기!”


 

취기가 올라 어쩐지 무거워진 머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고개를 흔들어대고 있을 쯤, 솔이의 이름을 부르는 빛나의 목소리에 시선이 돌아갔다.

 



? 윤쏘올-.”



 

반가운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몸이 흔들려 그대로 빛나 위로 고꾸라졌다.


 

빨리 와. 얘 좀 치워.”

얼마나 마셨는데 이래?”

몰라. 갑자기 혼자 폭주하던데. 야작하다 왔어?”

. 밖에 눈 온다.”

누운~? 많이 와?”

아니. 거의 그쳤어.”

 


첫 눈 소식에 왁자하게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술자리 멤버들 사이에서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나를, 솔이가 의자에 바르게 앉을 수 있도록 어깨를 잡아 부축해줬다. 히히, 그 손길에는 나도 모르게 히죽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가 서지완 데려다준다고 했다며?”

.”

내가 오라고 해써~”

얘 남자친구는?”

몰라.”



 

술자리에서는 얼굴도 보기 힘든 조소과 에이스. 그런 윤솔이 나를 데리러 왔다는 사실에 친구들은 새삼스럽지 않아 하면서도 여전히 놀라고, 온 김에 한 잔 하라며 술을 권하지만, 솔이는 그럴 생각이 없다며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이렇게나 단호한 모습에 나는 또 웃음이 나오고.

 

 


야 그래. 우리도 이만 가자.”

몇 시야?”

“1240.”

, 나 내일 1교시 수업 있어.”

나도.”

나도.”

같은 수업 듣는 처지에 서로 투덜대지 말자.”

 


 

의미도 없는 대화 속에서 빠르게 술자리는 파하고, 가게를 빠져나와 각자의 길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떠나가는데, 솔이는 잠시 동안 내 어깨를 감싸 안아 부축하다가, 자신이 매고 있던 목도리를 내게 둘러주고는 가게 앞에 놓인 의자에 나를 앉힌다.

 

 


서지완. 이거 마셔.”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내드는 것은 초록색 병의 컨디션. 어느새 또 이런 걸 사온건지. 웃음이 푸흐흐, 하고 흐른다. 혹시나 숙취음료가 맛이 없을까, 걱정스레 준비해왔을 젤리 봉지에도 웃음이 나오고. 취기 때문에 어지러운 시선에도 윤솔의 손끝마다 걸린 다정함에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그런 나는 손에 쥐어진 컨디션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따줄까?, 하고 묻는 너의 목소리에 고개를 작게 젓는다.

 


솔아.”


 

내 친구 윤솔. 나의 절친한 친구.


 

그런 네가 좋아서 내 앞에 꿇어앉은 너의 목을 가볍게 감싸 안으면, 너는 잠시간 모든 행동을 멈췄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 등에 손을 올렸다가, 그리고는 빠르게 멀어져간다.

 



 

서지완. 집에 가자.”



 

너의 작은 목소리가 겨울밤의 공기 속에 파동하며 흩어진다.

나의 손을 잡아 끄는 너의 손은 따뜻하고,

 



나 업어줘.”

업혀.”



 

이리도 다정하고,



 

솔아

.”

우리 올해도 첫 눈 같이 맞는다. 그치.”

그러네.”



 

, 왜 이토록 다정한지.



 

이뿌다아.”



 

22. 겨울의 까만 밤거리 위로 소복이 쌓이는 하얀 눈. 뽀득뽀득, 눈을 밟는 너의 발소리를 들으며,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나를 단단히 업은 너의 온기가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2.

 


크리스마스? 우리?”


 

솔이는 커피잔을 손에 쥔 채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뭐야. 올해는 안 만날 거야?”

.”



 

겨우 아, 라니. 눈동자를 도로록, 굴려가며 애써 고민하는 윤솔의 모습은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 같은 건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이 상한다.



윤솔. 나 서운해.”



진심으로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입술이 삐죽 나왔다. 이런 내 모습이 한심하고 못나 보인다는 건 알지만, 솔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는 대체적으로 더욱 좋거나, 더욱 서운하거나, 더욱 기쁘거나, 더욱 슬프거나, 그런 감정들을 예민하게 느낀다.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날들은 대부분 그러했고,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로 매년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올해도 당연히 함께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윤솔은 아니었던 걸까.

 



그치만 너. 남자친구.”



 

솔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휴대폰이 울렸다. 솔이가 아니면 딱히 연락할 사람이 있는건 아니라 이름을 보지 않아도 며칠 전 새로 사귄 남자친구겠거니 하며, 액정 화면을 확인했다. 정한달오빠. 간결하게 적힌 그 이름을 보고는 어, 오빠, 하고 전화를 받아들었다.

 



잠깐만.”



 

솔이에게 작게 속삭이고는 앉아있던 자리와 떨어진 곳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



 

오늘은 종강을 했으니 그냥 집으로 가긴 아쉽고 해서 솔이에게 영화를 보자고 했다. 시험이 끝나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며 크리스마스 때 뭐 할지, 와 같은 계획을 세울 셈이었다.

 



저녁에는 남자친구와 만나기로 했으니 그 때까지는 솔이와 있을 참이었는데, 보고 싶어서 일찍 왔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계획이 틀어졌다는 생각과 동시에 조금 귀엽네, 하는 생각을 했다. 남자친구와는 영화 취향이 잘 맞아서 말이 잘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있으면 조금 더 친해지기가 쉽고, 이 정도의 사람이라면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귀기 시작했다. 이러다보면 언젠가 1주년 여행을 갈 수 있을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그게 어쩌면 지금 만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고 항상 누군가를 새롭게 만날 때마다 생각을 해왔다.



 

솔아. 오빠 지금 카페 앞에 와있대. 너도 인사할래?”



 

그런 생각을 하며 통화를 마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솔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 있나, 싶다가 순간 솔이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할까, 싶어 말을 건네 봤다. 솔이는 내 목소리에 문득 모든 행동을 멈추고는,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아니, 하고 말을 덧붙이며 손사레를 친다.



 

하는 수 없이 솔이에게 먼저 가보겠다는 인사를 건네고는 연락을 하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짐을 챙겨 카페를 빠져나왔다.

 



지완아!”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웃음을 지어보였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보고 싶어서 왔지, 저녁 뭐 먹을까, 아무거나요, 그런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다가 휴대폰을 꺼내들어 솔이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윤솔! 크리스마스 때 뭐 할지 생각해놔! pm. 17:57



 

어째서인지, 솔이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

.

.

 



 

나도 미술 공부 해볼까.”


 

솔이가 끼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뺏어 들고는, 좋아하는 노래를 적당히 흥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솔이의 작업노트에는 수많은 스케치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미술? ?”



 

솔이는 놀랐다는 듯 질문을 던져왔다. 아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나보다.



 

미술학원 다니고 싶어서.”



 

무더운 공기가 가득한 교실 안, 에너지 절약 캠페인으로 에어컨을 킬 수 없는 교실은 열 수 있는 모든 문을 다 열어둔 상태였고, 언제 설치했는지 모를 낡은 선풍기가 요란하게 머리를 돌려대고 있었다.



 

미술 좋아해?”

. 아니. 모르겠어.”

근데 왜?”

그냥. 미술학원 다니면 너랑 더 오래 있을 수 있잖아.”



 

희망 진학 고등학교를 대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또 다시 담임선생님에게 잔소리를 듣고 와서는 내 멋대로 이야기를 전해봤다. 16, 지금의 서지완은 윤솔이랑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가장 좋다. 마치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처음부터 윤솔이랑은 친구가 되어야 할 운명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상의 곁에 머무르며,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저 그런 생각했던 것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뭐든 좀 늦는 편이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내린 결정이었다. 현재에 충실하다보면, 나도 무언가는 늦지 않는 날이 오지 않을까.

 



미술을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이야기 하고, 2-3일 뒤 쯤, 솔이가 다니는 미술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리고 솔이와는 실제로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 서로 미술 이야기를 하며, 이전보다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힘든 점, 좋은 점, 힘든 시간, 좋은 시간을 모두 함께 할 수 있었다.

 



미술을 시작한 계기는 솔이가 해주는 작업 이야기들이 재미있어서,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윤솔로 인해 내 삶은,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이제 매일 아침 한 시간 일찍 등교를 한다. 일찍 일어나는게 습관이라는 솔이를 따라 아무도 없는 학교에 가장 먼저 등교해서 함께 불을 켜고, 적막한 교실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습관이 생겼다.





 

 

 

시원해서 좋다. 근데 더워.”

무슨 말이야. 그게.”



 

킥킥거리며 웃음을 흘리는 솔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가는 길.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무더운 여름밤. 여느 때와 같이 솔이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귀가하는 길 위에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해본다. 하루 종일 붙어 있었는데도 왜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담임선생님과 고등학교 진학 문제를 상담 했던 이야기나 학원 원장님과 입시 문제에 대해 상의했던 이야기 같은 것들을 이야기 하면, 솔이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솔이를 따라 시작한 미술이었지만, 꽤 재밌게 느껴져서 다행이라고 여길 즘, 고등학교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어서 최근의 나는 솔이를 따라 미대 입학을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 방향을 생각해보고 있다.



 

솔이는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고개를 들어 솔이를 바라보면, 너는 나보다 더 먼저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이 교차할 때 쯤, 언제나 그렇듯 조용하게 웃는다.

 




내 친구 윤솔.

 


윤솔! 나 키 큰거 같지.”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화제를 돌려 솔이의 키에 나의 키를 비교해봤다. 내가 너보다 커질지도 몰라, 그렇게 말 하며 웃음지어 보이면, 너는 또 조용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런가.”

? 뭐라고?”

 



나의 절친한 친구.

 



. 더 클 수도 있겠다.”

하하, 뭐야아.”

 



한 뼘 더 커야지, 어서, 빨리 커야지.

너만큼 자라서, 너와 시선을 맞추고, 너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걸어가야지.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3.

 


주현선배랑?”

. 이번에 공모전 같이 준비하자고 해서.”

?”

왜냐니?”



 

솔이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되물었다. 원래 팀플 자주 하잖아. 학원 수업을 마친 뒤 미술용품을 챙겨들며 솔이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 . 그렇긴 하지만, 윤솔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윤솔은 눈치도 없지. 그 선배가 너랑만 공모전 준비하고, 너한테만 중요한 입시 정보를 공유하고, 너한테만 자주 연락한다는 걸, 미술부 동아리 애들 중에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현선배가 어제 솔이랑, 주현선배가 지난번에 솔이한테, 라는 이야기들이 벌써 2년째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데도 너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면, 그래, 정말로 할 말이 없다.



 

그 선배는 고 3인데 공모전 준비한대? 수능이 코앞인데?”

선배, 대학 합격했잖아.”



 

대체 뭐가 문제냐는 반응에 속이 터진다. 그래, 너한테 문제는 없지. 문제는.


 


집에 가자.”

……….”

 


그 선배한테 있다.

아니, 나한테 있는 건가.

 


 

복잡한 마음으로 앞장서는 솔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주에는 수능 한파가 있을 거라고 했나.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날이 무척이나 춥게 느껴진다.

 



 

공모전. 진짜로 할 거야?”

. 아마도?”


 

길고도 짧은 귀갓길을 솔이와 함께 나란히 걷다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하면, 솔이는 잘 들어가라는 인사를 건네고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 자신의 집으로 간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은 언제부터 또 이렇게 자연스러워졌는지.

 



귀갓길 내내 괜히 심통이 났지만, 왜 심통이 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기에 이런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서 돌아서 걸어가는 솔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얼른 씻고 잠이나 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책가방을 정리하고, 씻을 준비를 하려는데,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드르륵, 하고 울렸다. 순간 솔이인가, 하고 액정을 확인했는데, 얼마 전에 소개받은 남학생에게서 온 연락이다.

 


 

줄게 있어서 집 근처에 왔는데. 잠깐 나올 수 있어? pm 10:01



 

, 이 늦은 시간에 뭐야. 순간 짜증이 났지만 근처까지 왔다는 사람을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옷을 대충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적당히 놀이터에서 만나고, 빨리 보내고 헤어지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골목길을 걷는데, 저 멀리 솔이가 걸어 가는게 보인다.

 



 

어디 가는 거지?

 


집으로 가는 방향은 아니고, 어디를 가는 걸까, 싶어서 호기심 반,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걱정되는 마음까지 반 섞어서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고객이 통화중이어서 삐소리.



 

솔이는 이미 누구와 통화를 하고 있는지 전화 연결은 되지 않고,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멘트를 듣다가 조용히 종료버튼을 눌렀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솔이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우리가 자주 가던 놀이터로 걸음을 옮긴다.

 



어차피 나도 놀이터로 가려고 했으니까 뭐. 그렇게 생각하며 솔이가 지나간 길을 따라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저 멀리 놀이터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옆에 누구지?


 

솔이가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있는걸 보고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뚝 멈춰졌다. 누구지, 싶었는데, 어둠속에도 흐릿하게 보이는 존재가 주현선배임을 알아차렸다.

 



뭐야?



 

몰래 훔쳐보려던 건 아니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그 자리에 멈춰 서있는데, 두 사람은 무언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 하더니 기어이 손을 맞잡았다.

 




뭐야?

 

서지완!”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보자 얼마 전 소개받았던 그 남자아이가 반가워, 하며 서있었다. 신경은 온통 놀이터 안쪽으로 곤두섰는데, 이곳에서 이렇게 있다가는 두 사람과 마주칠 것 같아서 남자아이의 손목을 잡아 끌어 자리를 옮겼다. 적당한 골목길 가로등 불빛아래 서서 무슨 일이냐고 퉁명스레 말을 꺼냈더니 이거, 하고, 남자아이는 작은 상자를 건네 온다.

 



뭐지, 하고 들여다보니 다름 아닌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는 빼빼로 상자다.



 

……….”

, 오늘 빼빼로 데이라 사왔는데. 단거 싫어해?”



 

조심스레 물으며 뒷목을 쓸어내리는 남자아이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마워. 그렇게 말을 하며, 나는 줄게 없는데, 하고 말을 덧붙였다.

 



어쩐지. 그래서 오늘 윤솔이 젤리가 아닌 빼빼로를 사왔던 건가. 웬 빼빼로야? 하고 물었을 때 솔이는 그냥, 하고 답을 했었다. 오늘이 빼빼로 데이라는 걸, 하루 종일 또 나만 몰랐다. 학교는 무슨무슨 데이나 기념일을 챙기는게 금지라 초콜릿이나 빼빼로 같은걸 사오지 못 하게 하니 체감이 되지 않는다. 어쩐지 학원가는 길에 초코과자를 주더라니.

 

 



, 미안. 시간 너무 많이 뺏으면 안 되겠지. 추운데 얼른 들어가봐.”



멋쩍어 하는 남자 아이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가. 그렇게 말을 하고는 품에 쥐어진 과자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놀이터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헤어진 건지 텅 빈 놀이터만 눈에 들어왔고, 허탈한 마음에 집에 가야지, 싶을 쯤 또 저 멀리 솔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홀로 걷는 솔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또 다시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뚜루루, 뚜루루, 하고 통화 연결음이 지속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뚝 끊겼다. 왜 안 받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사서함의 목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



 

.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답해줄 이는 없고,

바람만이 차게 불며, 황량하게 마른 나뭇잎사귀들이 거리를 휘저을 뿐이었다.




 

.

.

.

 




[ 지완아. 무슨 일 있어? pm. 18:21 ]

[ 서지완. 어디 아파? pm. 19:37 ]

[ 지완아. pm 20:29 ]

[ 핸드폰 꺼져있네. 카톡 확인하면 연락해 pm 21:43 ]

[ 지완아. 통화할 수 있을까? pm 23:52 ]

 



깜깜한 새벽, 꺼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마자 밀려드는 연락에 한숨이 푹 나왔다. 서지완, 지완아, 하고 시작되는 메시지는 대부분 솔이에게서 온 연락이다. 부재중 전화를 알리는 문자에,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카톡에, 윙윙거리며 울려대는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순간 우리솔이하고 액정 화면에 저장된 솔이의 이름이 떠올랐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한시 반. 잠 못 이루는 새벽 시간.

놀란 마음에 재빨리 휴대폰 전원을 꺼버리고는, 책상 끝으로 휴대폰을 밀어 넣었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학원을 빠지고, 집에 오자마자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어쩐지 진짜로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저녁도 거르고, 방 안에서 멍하니 누워있기를 수시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책상위로 어지러이 널린 책가지들과 독서등 불빛 아래로 길게 그림자 지는 나의 모습. 그 모습들을 또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휴,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근데.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할 말?

. 너 어젯밤에.



 

순간 한낮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넌지시 물었는데, 솔이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수업종이 울리는 바람에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고, 그 뒤로 점심시간에, 쉬는 시간마다, 하굣길에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싶어 기다렸지만 끝내 솔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윤솔은 내게 말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 생각 했다.


 

윤솔에게는 내가 모르는 시간이 있고, 내가 모르는 윤솔의 시간 속에서, 그 시간을 공유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윤솔이 굳이 말 하지 않는다면, 나도 굳이 파고들지 말아야 하는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뭐든지 늦던 내게, 사춘기는 어김없이 늦게 찾아와서, 수많은 날들 동안 내 마음을 무수하게도 헤집어 놨고, 내가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은 조각조각이 되어 나의 생각을 흐트려놨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이 대부분 솔이를 향한 것이란 걸 깨달았을 때는, 친구니까.

친구니까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친구니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윤솔을 좋아한다. 친구니까 이런 마음은 당연하다.

친구니까 좋아하고, 친구니까 서운하고. 그리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말자고, 친구라는 단어 사이에 경계선을 긋자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로 가 벌렁 누웠다. 어둑한 방안의 풍경이 눈에 콱 박혔다. 생각하는 걸 멈춰야 해. 더 이상 생각하는 걸 멈춰야해. 눈을 깜빡이며 또 한숨을 길게 뱉어낸다.



 

이건 소외감, 어쩌면 황망함. 그리고 배신감, 덧붙여 공허함.

다닥다닥, 먼지처럼 불어나는 감정이 툭툭, 끊어질 것처럼 이어지고, 어쩌면 윤솔은 나만큼이나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면, 역시 나는 문득 울고 싶어진다.

홍서여고 미술부 에이스, 2학년 윤솔은 대학 입시를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고, 자신의 진로를 위한 길을 굳건하게 쌓아가고 있는데, 어쩐지 또 뒤처지는 기분이라 조바심이 날 때 쯤 섭섭한 일들이 하나, 둘 생길 때면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윤솔은 절대 모를 내 마음에, 까만 밤이 뒤섞여, 정신없이 감정이 흩어졌다.

 

 






 

 

4.

 



지완이 너. 요새 만나는 남자 없어?”

? . 없는데. ?”



 

대학 합격 발표가 있던 날, 중학교 친구들과 모인 술자리에서 솔이는 담배를 피운다며 자리를 비웠다. 친구라고는 5명뿐인데, 담배를 피운다고 나간 인원이 3명이나 되니 술자리는 굉장히 휑하게 느껴졌다.



 

잘됐다. 그럼 소개 받을래?”

소개?”

. 프로필에 우리 같이 찍은 사진 올려놨더니, 학교 선배가 소개시켜달라고 하더라고.”

. 그래?”

 



생각 좀 해볼게, 하고 대답했다. 맞은편에 앉은 친구는 이제 재수생활도 끝났고, 곧 봄도 다가오는데, 좋은 사람 만나야하지 않겠냐며 부추기기 시작했고, 담배를 다 피운 건지 먼저 들어온 다른 친구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얘기해?”

, 지완이 소개팅 얘기.”

, 다시 연애하게?”

아니. 모르겠는데.”

 



재수생활은 이제 막 끝이 났고, 대학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살았으므로, 연애 같은건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런 얘기를 해온다고 한들 한 귀로 스쳐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뿐이다.



 

소주 한 병 더 시킬까?”

안주도 더 시키자.”



 

메뉴판을 챙겨드는 친구들의 대화를 bgm 삼아 문밖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솔이는 친구와 나란히 서서 웃으며 연초를 태우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저렇게나 맑게 웃는지.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만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윤솔을 보고 있자니,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담배를 피우는 윤솔이 상상되어 어쩐지 기분이 상했다.

 



 

윤솔. 너 담배 끊으면 안 돼?”



 

마침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는 솔이를 보며, 그렇게 얘기했다. 둘이 시간을 보낼 때는 최대한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솔이임을 알고 있었지만, 술자리에서는 어쩐지 담배를 참는게 힘들다고 했다.

 



갑자기?”

. 갑자기.”



 

솔이는 갑작스런 얘기에 당혹스럽다는 듯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 냄새나?”



 

그렇게 말을 하며 자신의 팔을 들어 냄새를 맡는다.



 

미안. 그럼 좀 떨어져 앉을게.”

아니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눈치도 없는 윤솔은 또 나름의 배려를 한다고 의자를 잡아 끌어 거리를 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한 감정이 올라와서 가슴을 쿵쿵 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내가 담배를 배우는게 빠르겠다.”

몸에도 좋지 않은 걸 뭐하러 피워.”

그러는 너는 몸에도 좋지 않은 걸 뭐하러 피우시는데요.”



 

내가 아는 윤솔은 술, 담배를 좋아하지 않았다. 건강에 좋지 않은 걸 뭐하러, 라고 했었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에도 이미 술, 담배를 하는 아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엔 관심조차 없어하던 솔이가 어느 순간 담배를 배워왔고, , 가끔은 술을 마신다는 걸 안다.

 



내가 아는 윤솔이, 내가 아는 윤솔이 아니게 될 때마다, 나는 솔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또 문득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난다.

 



하여튼 너 담배 피우러 나가는거 싫어.”

?”

아무튼 싫어. 질투난단 말야.”

?”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들었다는 듯, 동그랗게 떠지는 솔이의 말간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솔이를 볼 때면, 또 나만 솔이에게 집착하는구나, 싶어질 때가 있다. 친구사이에서도 마음의 간극이라는게 있는 걸까.



 

처음 현수막에 걸린 이름을 봤던 중학교 2학년. 친구가 되었던 중학교 3학년. 각종 공모전을 휩쓸고 다니며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었던 고등학교 1학년. 메울 수 없는 틈이 있다는 걸 깨달은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 저만치 앞서나가는 너를 바라만 봐야 했던 지난 1.



 

나는 어쩌면 평생을 이렇게, 옆에서 나란히 걷는게 아닌, 너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너를 쫓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

.

.

 




 

약속?”

. 저녁에 약속 있다고 했잖아요.”



 

나는 시계를 흘끔 보고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늘은 1225일 크리스마스. 솔이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17. 그리고 지금은 1637. 여기서 솔이와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는 차를 타고도 1시간 거리니, 지금 출발해도 이미 늦었다. 크리스마스니까 좋은데 가자며, 남자친구는 아침부터 차를 끌고 외곽까지 나를 데려온 참이고, 지금은 사람이 드문드문 들어차있는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

 



가족들이랑 저녁 먹는다고 했나?”



 

남자는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친구 만나려고요.”



 

5시 이전에는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아침 일찍 만나는 순간부터 말했던 것 같은데,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굴면, 순간 진짜로 내가 말을 안했나 싶어서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도 명색이 남자친구인데, 너무 일방적인 통보인가, 싶기도 하고.

, 나름 아침부터 도심을 벗어나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 보니 신이 나서 이 시간까지 자리를 뜨지 못 한 것도 한몫 했다.



 

친구 누구? 윤솔?”

.”

 



추궁하듯 묻는 남자의 목소리에 작게 대답을 했다. 시간은 이제 1640. 남자친구와 함께 돌아가는 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인근의 버스정류장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본다. 크리스마스의 교통체증을 생각하자니 벌써 머리가 지끈하다. 솔이는 평소에도 약속이 있으면 일찍 나오는 편이니까, 어쩌면 지금쯤 약속장소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 왜 더 빨리 깨닫고 미리 연락을 하지 못했을까, 에 대한 후회는 이미 늦었다.




 

[ 나 도착했어. 도착하면 연락해. pm 16:43 ]


 

생각하는 순간 테이블 위로 올려뒀던 휴대폰이 울렸다. , 윤솔 벌써 도착했잖아.




 

진짜 미안해요. 다음에.”

윤솔이라는 애랑, 진짜 친구 맞아?”

? 무슨.”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르겠어서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너 맨날 뭘 해도 윤솔, 윤솔. 윤솔 얘기밖에 안 하잖아.”

그야 절친이니까.”

절친. 그래.”



 

남자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파편이 되어 날아오는 듯 했다.



 

크리스마스에 절친을 꼭 만나야겠어?”

……….”

, 지금 너랑 사귀는거 아니야?”

……….”

누가 보면 윤솔이랑 사귀는 줄 알 거 같은데.”



 

약속 취소하고 나랑 더 있다가 가, 하고 남자는 그런 말들을 갑자기 쏟아냈다. 마치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터뜨린다는 느낌이었다. 이 남자와는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소개팅으로 만났고, 영화 보는 취향이 잘 맞아서, 라는 핑계로 사귀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보름하고도 며칠이 더 된 일이었다.

 



, 그럼 헤어져요.”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이번에도 한 달을 못 넘기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내뱉었다. 친구 만나는 것도 이해 못 할 거면, 연락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은 이제 5시가 다 되었다. 솔이는 약속했던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이제는 정말로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다.

 



?”



 

남자는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물었지만,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를 못 느꼈기에 단호하게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짐을 챙겨 카페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서지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군중 속에서 창피함이라도 느낀 건지 남자는 다행히도 쫓아오지는 않았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휴대폰을 들어 시계를 보니 시간은 1717. 솔이에게 늦는다고 연락을 해야 하는데, 저 멀리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가 회차하는게 보여진다. 부랴부랴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어 간신히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1730분에 출발할거라는 말과 함께 잠시 버스에서 내렸고, 털털거리는 버스 위에서 휴대폰을 다시 꺼내들었다. 1725. 솔아, 나 늦어. 어디 들어가 있어. 라고 메시지를 작성해서 보내려는데, 배터리가 간당간당 하더니 결국 그대로 휴대폰이 꺼져버렸다.

 



.”



 

나는 또 작게 탄식하며 휴대폰을 꾹 쥐었다. 어디 편의점이라도 찾아 충전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버스에서 일어서려는데, 담배를 다 피운 건지, 시간이 다 돼서인지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 기사 아저씨가 천천히 버스를 출발시켰다. 아무도 타지 않은 버스가 털털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하는 수없이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봤다. 낡은 버스의 굉음을 따라 창밖으로 낯선 풍경이 빠르게 스쳐간다.


 


그 속에서 나는 솔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추위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또, 어쩌면 이제는 나를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면, 나는 어쩌지.




 

 

윤솔이라는 애랑, 진짜 친구 맞아?

 

머릿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흩어지듯 재생됐다.





 

친구. 그 단어를 곱씹어 본다.

솔이와는 벌써 7년 째 친구사이,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해가 바뀌면 우리는 어느덧 8년째 친구사이.



 

짧지 않은 세월동안 쌓아온 수많은 감정들과 이야기들이 7년의 시간 속에 녹아있다.

서지완의 시간에서 윤솔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게 없다는 걸, 나는 안다.

 



 

윤솔, 내 친구, 나의 절친한 친구.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문득 웃음이 나고, 또 문득, 이렇게나 초조해진다.






 

 

버스는 어느새 도심으로 진입해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곳에 멈춰섰다.

빠르게 하차를 하고,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홍서대입구역의 널따란 광장을 가로지른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간다.




 

어쩌면, 나를 기다리는 네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달리다가도,

저 멀리, 여전하게도, 나를 기다리는 너의 모습이 보여질 때 쯤이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춰섰다가, 작게 호흡하고, , 작게 발을 구른다.

 

 





윤소올~~~!”

 



 

나의 목소리에 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고,

그렇게 나의 존재를 깨달은 너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조용한 시선을 보내온다.

 

 





 

내 친구 윤솔.

 

나의 다정한 친구.

 





 

 

나는 오늘도 너를 잃을 용기가 없어서,

너에게 달려가는 이 길 위에서,

 

그저 이렇게 너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성장통.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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