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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알고있지만 솔이 짝사랑 시점 20000자로 적어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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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9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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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편 링크

https://theqoo.net/gl/2151185738



추천 BGM 
노영심 - 슬픔과 함께 걷기

대충 (내가 감히 짤)





.

.










“야. 서지완 봤어? 존나 예쁘다 진심.”
“누구?”
“서지완. 2학년 3반 서지완. 몰라?”
“아~ 걔.”
 


서지완은 예쁘다.

 

“걔 남자친구 있지 않아?”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어제 누가 복도에서 고백하는거 봤다고 들었는데?”

 

2학년 3반 서지완은 예쁘다.
그 사실은 2학년 1반인 내게도 들려올만큼 유명한, 아마도 학교전설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뭐가 진실이야?”
“인기 존나 많네.”



 


왁자지껄하게 복도를 울려가며 떠들어대는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흩어져 사라질 때 쯤 고개를 돌려 2-3이라고 적힌 팻말을 올려다봤다. 교실 안의 풍경은 여느 교실과 다르지 않다. 빽빽이 들어찬 학생들. 누군가는 쉬는 시간을 이용해 엎드려 자고 있고, 누군가는 교실 한켠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고, 누군가는 또 누군가와 장난을 치고 있다. 생경하지 않은 교실 풍경.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을 보더라도 모두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교실 안의 풍경 속에서도 특별한 존재라는게 있는걸까.
 


“윤솔! 빨리 안 가면 벌점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쯤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는 복도를 내달린다.
3교시가 시작되기 전, 쉬는 시간이 끝나기까지는 2분여 정도가 남아있다. 나는 손목을 들어 올려 시계를 바라본 뒤 복도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학생들 틈바구니 속에서 이동수업을 위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계절은 이제 겨울. 실내임에도 실외만큼 추운 복도의 기온에 어깨가 잔뜩 웅크려진다.

 

“춥다.”
 

혼잣말이 의미도 없이 흩어졌다.


 
 

궤도

 

 

“지완이 남자친구 생겼다며?”
 

담뱃불을 붙이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춰졌다. …그래?, 하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척 대답은 했지만 꽤나 꽉 막힌 소리가 나왔다. 서지완 남자친구 소식이야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익숙해질만큼 익숙해졌는데도 가끔은 심장을 때리는 것처럼 놀랄 때가 있다.
기말 과제로 작업을 하던 도중 담배를 피우러 가자는 빛나의 말에 얼결에 따라나와서는 이런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당사자도 아닌 빛나에게 전해듣는 꼴이라니.
 


원망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 한숨 아닌 한숨을 푹 내뱉고는 다시 라이터 휠을 돌려 불을 붙이려는데, 불꽃이 튀기만 할 뿐 불이 붙지는 않았다. 얼마 전 편의점에서 구입한 일회용 라이터인데, 어느새 다 써버린건지 불꽃이 점점 작아진다 싶더니 결국 이 모양이다.

 

“뭐야. 너 몰랐어?”
“…어.”

 

빛나는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자신의 성냥에 불을 붙여 담배 끝에 불을 대주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불꽃이 꺼질새라 재빨리 담배에 불을 붙여 숨을 들이마셨다. 하, 하고 숨을 쉬자 하얀 연기가 입김에 섞여 잿빛 하늘의 허공으로 흩어졌다. 학과 건물 옥상은 평소엔 학생들로 가득차지만, 한겨울엔 이렇게 담배를 피우러 올라오는 학생들 몇몇 뿐이라 꽤나 쓸쓸하게 느껴진다.
 


“걔는 남자가 그렇게 좋대냐.”
“네가 할 소린 아닌거 같은데.”
“그렇긴 해.”
 


담배 끝이 짧아질 때 쯤 자리를 옮겨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챙강, 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라이터 하나 더 사야겠네. 그런 생각을 할 즘 빛나가 추우니 이만 돌아가자며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필터 끝까지 타오르는걸 보고서야 담배를 비벼껐다.
 


“아! 빨리 와!”

 

눈이 오려나, 빛나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빛나가 되물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은 회색빛으로 가득 찼다. 희뿌연 도심의 창공, 아무 색도 담고 있지 않은 도시의 하늘. …겨울.

 

문득, 겨울이 왔구나.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1.
 

아무도 등교하지 않은 고요한 학교의 적막을 좋아했다. 매일 아침 이른 시간에 등교해 교실 문을 열고, 불을 켜고, 어스름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했다. 대부분은 조용히 노래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그렇게 시간을 죽이다보면 하나, 둘씩 등교를 하며 자리를 메워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좋았다.
 


그러니까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적막한 교실의 풍경을 생각하며 3-5라고 적힌 팻말이 붙은 교실 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어? 안녕!”

 

봄. 새학기가 시작되는 계절.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너는 하얀 불빛 아래 덩그라니 앉아 나를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마치 누군가가 등교하기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문이 열림과 동시에 맑게 웃는 모습을 보니 ‘누군가’가 아닌 ‘나’를 기다린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서지완이다.

 

아무도 내게 너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단박에 네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학교 내의 모든 가십으로 얽혀 있는 ‘예쁜 서지완’. 너는 그저 예쁘다는 형용사가 마치 너를 위해 생겨난 것처럼 예쁘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너를 처음 본 순간 깨달았다.
 

 

“윤솔?”
“…어?”
 


내 이름을 어떻게 알까, 와 같은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저 지완의 시선 끝에 다다른 것이 나의 가슴팍에 붙은 명찰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나는 덩달아 내 이름을 물끄러미 내려다 볼 뿐이었다.

 

“나 너 알아! 미술대회 나갈 때마다 교문에 현수막 붙었었지.”

 

지완은 손뼉을 짝, 마주치며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 기쁘게 웃어보였다. 순간 각종 중학생 미술대회, 미술실기전, 미술공모전이나 학교 정문에 붙었던 수십 개의 플랜카드,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대단하다. 너.”
“……….”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칭찬과 인정을 아끼지 않는 네가 신기했다.
그리고, 거리낌도 서스럼도 없이 말을 건네 오는 너를 보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사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편했고, 그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얻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단박에 내 곁에 다가와 나를 너의 사람으로 만들고, 너의 주변에 있게 했다.
 


“난 서지완이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너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너의 주변을 멤돌게 하고, 그리고―.
 


.
.
.

 

“윤솔!”
“……?”
“여기서 뭐해애.”

 

야작을 시작하기 전 작업실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열여섯의 서지완이 한순간 머릿속에서 흩어지고,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스물 두 살의 서지완이 이곳을 내려다보며 장난스런 웃음을 짓고 있다.
 


“어. …그냥.”
“날도 추운데 이런데서 자면 입 돌아가.”

 

몸을 벌떡 일으켜 똑바로 앉으려는데, 옆자리에 허리를 내려앉은 지완이 킥킥 웃으며 나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댄다. 아, 하지마. 지완의 손목을 잡아 손을 떼어내고,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한다.
 


“오늘 야작해?”
“어. 너는? 왜 다시 학교로 왔어?”
 


지완은 오늘 수업이 끝나자마자 약속이 있다며 뒤도 안돌아보고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그 후로는 연락도 안 되더니 갑자기 왜 다시 돌아온 걸까. 순수한 궁금증에 질문을 던졌더니,
 


“아. 나 남자친구랑 요앞에서 놀다가. 아 맞다. 솔아. 나 남자친구 생겼어!”
“……잘됐네.”
“아,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두고 간 물건이 있어서 왔다가 애들이 술 마신대서 가보려고. 너도 갈래?”
“어.…아니.”
“아. 왜애.”
“과제 해야지. 다들 과제 끝났대?”
“아. 몰라. 이 청춘이 아니면 언제 또 기말고사 기간에 술을 마셔.”

 

지완은 짧은 대화 속에서도 수많은 주제를 이야기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그 모습이 또 얄밉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웃음이 났다.
남자친구 얘기는 언제쯤 해주려나 했는데, 이번에도 이렇게 유야무야 소식을 전하고 만다.
 


“진짜 안가?”
“안가.”
“치. 그럼 나만 마셔야지. 소주 세병! 마셔야지!”
“…마시지도 못 하면서 무슨 세 병이야. 집에 가기 전에 연락해. 데려다줄게.”
 


술에 취한 지완이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은 이제 새로 생긴 남자친구의 몫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욕심이 나는 부분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지완은 ‘윤솔이 최고다!’ 하며 또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럼 나는 또, 나를 보며 웃는 너를 보고는 웃는다. 어느 순간에도 나를 웃게 하는 서지완.
 


“아 애들 연락 온다. 나 갈게!”
“…어. 연락해.”

 

여보세요?, 하며 부랴부랴 작업실을 빠져나가는 지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완전히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시간은 어느덧 밤 아홉시. 텅 빈 작업실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뭐, 아무렴.
 

지완이랑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서둘러 작업을 마무리 해야지, 그저 그런 생각을 했다.
 

 

 



2.
 

연애를 하는 지완이는 예쁘다.

 

“우리 크리스마스 때 뭐 하지?”

 

오늘도 남자친구와 데이트라도 하는 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하고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마음을 흔들어 댄다. 연애를 하는 서지완은, 묘하게 설레는 얼굴을 하고 있고, 또 묘하게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은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예쁨이 아님을 알고, 또 나로 인한 즐거움이 아닌걸 알면서도 나는 지완이를 보며 그저 웃고, 덩달아 설렐뿐이다. 그리고 나는 서지완이 연애를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이번엔 오래 갈지도 모르겠다, 고. 서지완의 연애를 마치 각오라도 하듯이 말이다.
 


“…우리?”
“응.”

 

당돌하게 시선을 건네 오는 지완의 까만 눈동자를 나는 가만히 바라본다. 말갛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 오롯이 빛나는 까만 눈동자.
사랑을 하는 서지완을 사랑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일일이 일희일비 하며, 슬퍼할 필요도 없다. 서지완은 여전히 나를 찾고,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보며 웃으므로.

 

“크리스마스? …우리?”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단어들 같아서 지완이 내뱉은 말을 곱씹듯 질문해본다. 우리가 언제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했었나, 싶어서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봤다. 하지만 그런 약속은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지완과의 약속을 내가 쉬이 잊을리 없다.

 

“아, 뭐야. 올해는 안 만날 거야?”

 

지완은 서운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눈썹이 축 처진 채 입술을 삐죽인다.
 


“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작게 탄식했다.

 

3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드디어 종강을 맞이했다. 지완이 종강 후에 함께 영화를 보자고 해서 시험을 마치자마자 밥을 먹고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냥 가기 아쉬우니 카페라도 들렀다 가자고 해서 학교 근처의 카페로 온 참이었다. 지완이 말을 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저녁에는 남자친구와의 데이트가 있겠지, 싶어서 몇시쯤 자리를 피해주면 될까,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윤솔. 나 서운해.”
 


지완은 계속해서 입술을 삐죽이며 말을 잇는다. 이런 모습에 내가 약하다는 걸, 지완이도 알고있는게 분명하다.

 

“그치만 너. 남자친구….”

 

랑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 아니냐고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타이밍 좋게 지완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오빠!”

 

지완은 금세 풀어진 얼굴로 밝게 전화를 받아든다. 그리고는 잠깐만, 하고 작게 속삭이고는 자리를 뜬다. 나폴나폴한 원피스를 입고 나폴나폴 걸어가는 지완의 뒷모습을 또 멍하니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려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중학교 때부터였나, 고등학교 때부터였나. 언제부터였는지 크리스마스는 매년 지완과 함께 보냈다. 그러니까, 그동안에는 타이밍 좋게도 크리스마스 시즌 즈음엔 지완이 남자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함께 극장에 가거나 아이스링크장에 가거나 서로의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선물을 주고받거나 케이크를 같이 먹고, 뭐 그런 것들을 해온지 벌써 7년째다. 그러니 올해도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서운해 할 처지도 아니니 서운해 할 필요도 없다.
 


“솔아. 오빠 지금 카페 앞에 와있대. 너도 인사할래?”

 

통화를 마친 지완이 즐거운 얼굴로 돌아오며 말을 건넨다. 남자친구와의 통화를 그렇게 밝은 얼굴로 받으면서, 함께 크리스마스라니. 정말 가당치도 않다. 아니. 나는 즐거운 듯한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사레를 치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원래는 7시쯤 만나기로 했는데, 보고 싶어서 일찍 왔대. 지완은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자신의 짐들을 챙겨나간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겉옷을 챙겨 입는 지완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아, 솔아. 진짜 미안해. 먼저 가봐도 되지?”
“어. …응. 이따 연락해.”
“응! 안뇽! 조심히 들어가!”

 

지완은 힘차게 손을 흔들고는 카페를 빠져나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들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세 곡 정도 듣고 나면, 남자친구와 있는 지완이 이 근처를 벗어나겠지, 싶어서 조금만 더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
.
.
 



“뭐 들어?”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낙서장과 같은 노트에 가볍게 스케치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교복은 어느새 짧아졌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교실을 가득 메워 덥게만 느껴지는 여름이었다. 뉴스에서는 불볕더위가 이어질 거라고 했고, 또 얼마간은 태풍에 의한 비소식이 있을지 모르니 우산을 챙겨 다니라고 했다. 습한 공기가 들이치는 창문 너머로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고, 더위에도 지칠줄 모르는 아이들이 교실 안에서, 교실 밖에서 왁자하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
 

순간 귀에 꽂은 이어폰이 쑥 빠져나간다 했더니 눈앞에 나타난 지완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귀에 이어폰 한쪽을 끼우고는 아, 이 노래 좋아! 하고 웃음을 지어보였다. 창밖 너머의 뜨거운 햇살이 마치 지완의 어깨위로만 쏟아져 부서지는 것 같았다.

 

태풍이 온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맑은 태양이 내리쬐는 교실 풍경 속에서 지완이는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쪽 귀에서는 내가 재생해놓은 노래가, 또 다른 쪽으로는 지완의 노랫소리가 겹쳐 들렸다.
 


“나도 미술 공부 해볼까.”

 

지완이 나의 노트를 가져가서 펄럭거리며 말을 이었다.

 

“미술? 왜?”
“미술학원 다니고 싶어서.”

 

나는 지완이 미술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다.

 

“미술 좋아해?”
“응. …아니. 모르겠어.”
“근데 왜?”
“그냥. 미술학원 다니면 너랑 더 오래 있을 수 있잖아.”

 

지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를 모르겠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 2, 3일이 지났을 무렵인가. 지완은 진짜로 같은 미술학원에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실제로 지완과 나는 더욱 많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이른 시간에 같이 등교를 하고, 하루 종일 같은 수업을 듣고, 그리고 함께 하교하며 학원엘 가고. 지완이 좋아하는 젤리를 먹거나 아이스크림 같은걸 먹으며 함께 귀가를 하고. 그런 날들이 반복됐다.
 


그 사이사이 지완이는 수많은 남자들에게서 고백을 받고, 가끔은 사귀다가 헤어지는 일들이 반복됐다. 지완은 미술에 재능이 없는게 아니라서 금방 실력이 향상됐고, 고등학교 진학과 진로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 못 고르겠다.”
“그럼 이거랑 이거 두 개 사자. 나랑 나눠 먹어.”

 

눈썹을 쭉 늘어뜨린채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서 고민하는 지완을 보며 웃음이 터졌다. 미술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에 지완이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해서 마트에 잠깐 들렀는데, 지완은 어제도, 그제도 했던 고민을 또 똑같이 한다.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했다.
 


“한 입 줄 거야?”
“당연하지.”
 


내 대답에 지완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매일 똑같이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으면서도 매일 똑같이 그렇게 해줄건지, 와 같은 질문을 잘도 해댄다. 정작 내가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은 다른 것임에도 나는 지완이 먹고 싶어 하는 걸 골라들고는 계산을 마쳤다.
 


“시원해서 좋다. 근데 더워.”

 

무슨 말이야 그게. 나는 킥킥 웃으며 지완의 한탄스런 옆모습을 슬쩍 훔쳐봤다. 열대야가 시작되려는지 밤인데도 꽤나 후텁지근하다고 느껴졌다.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귀가하는 길은 짧고도 길었고, 다양한 소리와 다양한 색감이 섞인 여름밤은 묘하게 감성적인 기분이 들게 했다. 찌르르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 맴맴, 밤을 잊은 매미가 우는 소리, 우수스스, 하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휘잉, 하고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 자박자박, 우리의 걸음이 맞물리는 소리.
 


조잘조잘, 하루 종일 붙어있었는데도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떠들어대는 지완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윤솔! 나 키 큰거 같지.”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한손으로는 내 키와 자신의 키를 비교하며 걷는 아이를 문득 바라봤다. 까만 밤거리 위에, 주홍색 가로등 불빛 아래, 즐거운 듯 진중한 서지완의 하얀 얼굴. 조금 있으면 내가 너보다 커질지도 몰라, 하고 말을 늘어뜨리며 웃는 서지완의 맑은 얼굴.
그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아, 내가 이 아이를….
 

 

드르륵, 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렸다. 손을 들어 확인해보니 지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있다.
 


[윤솔! 크리스마스 때 뭐 할지 생각해놔!]


 

…좋아하고 있구나.
 

눈을 떠도, 감아도, 그려낼 수 있는 그 날의 풍경, 소리와 공기. 그리고 그제야 자각한 듯 깨닫게 된 나의 감정까지.
보잘 것 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지던 짝사랑의 시작점. 그 날, 그 여름의 이야기.
 

 



 

3.
 

― 잘 들어갔어? pm. 09:58
― 집이야? pm. 10:24
― 연락이 안 되네. 카톡 보면 연락해. - pm. 11:37
― 나 아직 잠이 안와서. 집에 갔는지 걱정되네. 카톡 보면 연락해. - am. 12:42
 


어둠속에서 휴대폰 액정을 가만히 바라보다 담배를 꺼내들었다. 대충 겉옷을 걸치고 휴대폰과 라이터를 챙겨들고는 집 앞 가로등 아래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휴대폰을 들어 아직 남자친구와 같이 있는지, 와 같은 내용의 타자를 치다가 선을 넘은 참견인 것 같아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하, 하고 숨을 쉬자 하얀 연기가 길게 흩어졌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보자 가로등 너머로 밝은 초승달이 빛나고 있었다. 잡념을 지우는 법을 누군가 알려준다면 좋을 텐데.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며 담배를 비벼 끄려는데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들어 화면을 확인하자 ‘지완’이라는 이름이 액정에 떠올랐다.
 


“어. 지완아.”

 

급하게 통화버튼을 누르자 윤쏘올-, 하고 이름을 길게 늘어뜨리며 말을 잇는 지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 마셨어?”
― 응. 오빠랑 쪼금.
 


목소리가 왠지 술을 마신 것 같아 질문했더니, 역시나였다. 지완은 쪼금, 이라고 말을 하며 옅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마셨는데? 데리러갈까?”
― 아니, 오빠가 데려다줬어. 그리고 나 진짜 별로 안 마셨어!
“……….”
― 윤쏠. 걱정했어?!
“어….”

 

나는 솔직하게 말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완은 나와 헤어지고부터 있었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마치 어미 새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는 아기 새 같아서 나는 조용히 지완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어디를 갔는데, 어떤게 맛있었다, 다음에 우리도 같이 가자, 뭐 그런 얘기들이었다.
 


― 나 이제 씻고 자야겠다. 근데 너 왜 안자? 오늘 종강해서 과제도 없잖아.
“어…. 잠이 안 와서.”
 


네가 걱정돼서 잘 수 없었다는 말은 당연히 할 수 없었다.

 

― 따뜻한 우유 마시고 자. 불면에 좋대.

 

너는 잠을 자주 못 자니까, 하고 잔소리 하듯 말을 이어나가는 지완의 목소리 뒤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완은 아마도 지금 막 집에 도착한 참이었나보다.
 


“알았어. 얼른 씻고 자. 피곤하겠다.”
― 응. 카톡할게. 안뇽!

 

통화종료. am 01:02. 깜빡이는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다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통화하는 내내 밖에 서있었더니 슬리퍼만 신고 나온 발끝이 찌릿하게 시려왔다.
 


.
.
.
 



“감기?”
“응.”
“어제 뭐 했는데?”

 

걱정스레 이마를 짚는 지완의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여름은 완연히 지고, 가을 공기가 차가운 겨울을 닮아갈 즘이었다. 어제 뭘 했냐 하면, 특별히 한 건 없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지완과 함께 등교를 하고,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하교를 하고, 밥을 먹고, 학원에 갔다가, 귀가를 했을 뿐이다.

 

다른게 있었다면, 학교 선배가 밤늦게 찾아와 만나자고 해서 놀이터에서 잠깐 만났던 것 뿐.

 

고등학교 2학년의 가을은, 중학교 3학년의 가을과 닮아 있었다. 별다를 것도 없는 일상은 매일같이 반복됐다. 학교, 학원, 집. 챗바퀴를 돌 듯 일정한 삶이 이어졌다. 그저 서지완과 함께, 서지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의 일분일초, 매일 일정한 감정으로 흘러가는 흔한 일상들.

 

쿨럭쿨럭, 고개를 돌려 기침을 하고는 지완을 곁에서 떼어냈다. 감기 옮아. 내가 말을 하자 지완은 눈썹을 쭉 늘어뜨리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아무리 그런 표정을 지어도 이번엔 져줄 수 없다. 서지완은 감기에 걸리면 심하게 앓으니까 당분간은 거리를 둬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완이 내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근데….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할 말?”
“어. 너 어젯밤에….”

 

지완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으려는 동시에 4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조금의 틈도 없이 담임교사가 책 펴라, 하며 교실 문을 열었다. 아, 왜 이렇게 빨리와. 지완은 투덜투덜 말을 덧붙이며, 뭔가 찝찝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하는수 없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젯밤.
나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책을 펼쳐들었다.
 


어젯밤 지완과 헤어지고난 후 전화 한통을 받았다. 미술부 동아리 주현 선배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받지 말까, 싶다가도 미술부와 관련된 일일까 싶어서 전화를 받았는데, 선배에게 집근처에 와있으니 잠깐만 시간을 내달라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하는 수없이 발걸음을 돌려 선배가 기다리고 있다는 놀이터로 향했다.
 


“솔아. 이번 주말에 뭐해?”
 


어둠이 짙은 밤. 주현선배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이번 주요…?”
“이 전시가 주말에 오픈하는데. 같이 가면 어떨까 해서….”
 


선배는 전시회 티켓 두장을 꺼내 보이며,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하고 말을 이었다.

 

“……….”
“나, 솔이 너 좋아해.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앞뒤 잴 것 없이 부딪혀오는 고백에 정신이 없었다. 가을 밤공기가 차갑게 불며 흩어졌다.
 


“지금 만나는 사람, 없는 거지?”
“그렇긴 한데….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주현선배는 아, 하고 탄성을 작게 내뱉고는 시원한 얼굴로 웃었다. 그럴줄 알았어. 그런 말을 덧붙이며 전시회 티켓을 쥐고 있던 손을 떨구었다.
 


“저. 오늘 일은….”
“비밀로 하자.”

 

주현 선배는 미련 없다는 듯 웃어보이고는 악수를 건네 왔다. 그래도 당분간은 계속 좋아할 것 같은데. 불편하지 않게 조심할게. 말하고 나니 속은 시원하다. 나는 주현 선배의 따뜻한 손을 한번 맞잡고는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줄 아는게 참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도,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날이 올까.
그저 들키지 않기 위해 친구로 남고자 결심한 내가. 친구로서 너의 곁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 내가. 너의 모든 삶을 사랑해 마지않는 내가. 솔직해져도 되는 날이 올까.
 


가늠도 되지 않는 날들을 한없이 그려보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내고 나니 나의 감정이 터질 듯한 갈망이 되어 돌아오는 듯 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감정은 한치 앞도 모르게 자라나길 반복했다. 줄어들지 않는 감정은 대체 어디까지 커질 셈인지. 통화버튼을 눌러 지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아해, 라고 말할 것 같아서 핸드폰 전원을 끈 채로 가을의 밤거리를 걸었다. 황량하게 떨어진 마른 나뭇잎사귀들이 조용히 걷는 걸음을 따라 같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춥다.”
 

이제 곧 겨울이 오려나, 그런 생각을 했다.
 

 



 

4.
 

“윤솔. 너 담배 끊으면 안 돼?”
 


지완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지완의 재수 후 합격 발표가 있던 날, 중학교 친구들과 모여 축하파티를 하던 참이었다. 술자리는 어느새 무르익어 다들 취기가 오를대로 올라있었다.

 

“갑자기?”
“어. 갑자기.”

 

나는 대학 입학 후 담배를 배웠다. 학창시절에는 술, 담배 같은 것에 손도 안 댈 줄 알았는데, 조소과 과제와 선배들에게 치이다보니 이런 것들이 없으면 견디기가 더욱 어렵다.
 


“왜? 냄새나?”

 

밖에서 다른 친구와 담배를 피우고, 냄새를 빼고 온다고 빼고 왔는데도 냄새가 나나 싶어서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봤지만, 담배를 피운 당사자라 그런지 냄새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미안. 그럼 좀 떨어져 앉을게.”
“아니이.”

 

의자를 끌어 조금 멀리 앉으려는데, 지완은 뭔가 마뜩치 않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어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담배를 배우는게 빠르겠다.”
“…몸에도 좋지 않은 걸 뭐하러 피워.”
“그러는 너는 몸에도 좋지 않은 걸 뭐하러 피우시는데요.”

 

나는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볼을 긁적였다.

 

“하여튼 너 담배 피우러 나가는거 싫어.”
“…왜?”
“…아무튼 싫어. 질투난단 말야.”
“어…?”
 


질투?

 

“그럼 이제 또 윤솔이랑 서지완이랑 같은 학교 다니는 거네?”
“너네 지겹지도 않냐.”
 


친구들은 자신들의 학교 얘기, 회사 얘기, 남자 얘기, 그런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다가 어느새 이쪽으로 화살을 돌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언제까지 붙어 다닐 셈이냐고 묻는 친구들의 질문에 지완은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하라며 응수하기 시작했다.

 

취기가 많이 오른거지…?, 싶어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완이 누구에게, 무엇을 질투하는지 모르겠어서 어정쩡한 기분이 들었다.
 


지완이 재수를 하는 1년은 중학교 3학년 이후로 처음으로 떨어져 지낸 1년이었다. 매일같이 연락을 하고, 서로의 수업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만나는 일은 잦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일상은 어쩌면 우리의 관계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1년이었다. 그 1년은 꽤 외롭고, 힘들고, 그러면서도 자유롭고, 홀가분한 날들이었다.

 

이제 지완이 입학을 하고나면, 또 똑같은 감정들과 또 똑같은 일상들이 반복되겠지.

 

“이제 그만 가자.”
“나는 내일도 출근이야. 부러운 대딩들아.”
“1교시 수업 있으면 첫 차 타고 학교 가야 되는거 알지?”
“서지완 얘는 일어날 생각을 안 하네.”

 

친구들의 축하주를 받아 마시고, 기분이 좋다고 또 따라 마시고, 하더니 서지완은 결국 완전히 취했다. 어느 순간부터 테이블에 엎드려 잠을 자더니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고개를 들질 못한다.
 


“지완이 내가 데려갈게. 걱정하지 말고 다들 들어가.”

 

지완이를 부축하는 걸 도와주던 친구들이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자리를 떠나간다. 시간은 아직 밤 10시. 어떡할까,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나 술에 취한 지완이를 집으로 그냥 들여보낼 수가 없어서 지완의 어머니에게 오늘은 자취방에서 재우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지완아. 서지완.”
“어? 윤소올-.”

 

어깨에 매달려 히죽 웃는 지완을 보고는 정신 좀 차려봐, 하고 말을 이었다. 으응,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하며 지완이 중심을 잡지 못하기에 결국 택시 타는 곳까지 업고 가기로 했다. 서지완 업혀. 그렇게 말하자 지완이 자연스럽게 등을 감싸며 업혀온다. 술에 취한 지완을 집에 데려다 주거나 데리러 가는 일이 한, 두 번 있던 일도 아니니 이제 이런 일 쯤은 어렵지도 않다.
 


“윤-솔. 내 칑구 솔이. 우리 짱 오래된 칭구.”

 

지완이 어깨를 감싸며 고개를 묻는다.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그 온기가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그래. 네 친구 윤솔. 짱 오래된 친구.”
“윤솔.”
“응.”
“솔아.”
“…응.”

 

지완은 잠이 든건지 더 이상 말이 없더니 이내 색색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완아. 자?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내 품에서 편히 잠드는 서지완의 체중을 고스란히 느끼며 까만 밤거리를 걸었다. …더 마른 것 같네. 그저 그런 생각을 할 뿐이었다.
 



.
.
.
 


[크리스마스 5시에 홍서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만나자!]
 

지완이 마지막으로 보낸 카톡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휴대폰 액정 화면을 전환하여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은 저녁 6시 38분. 5시가 지난지 벌써 한 시간 하고도 30분이 넘게 흘렀다.
 


― 나 도착했어. 도착하면 연락해. pm 16:43
― 어디야? pm. 17:07
― 오고 있어? pm. 17:32
― 지완아. 무슨 일 있어? pm. 17:47
― 연락이 안 되네. pm 18:11

 

전송한 카톡에 읽음 표시는 뜨지 않고, 전화를 걸어도 통화 연결음만 지속될 뿐 지완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어떠한 상황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싶은 것일까.
 


지완이는 낮에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5시 전에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올 것이니 함께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 영화를 보자고 했다. 계절에 맞는 겨울 영화를 봐야 한다며, 지완은 꽤나 들뜬 목소리로 보고 싶은 영화 목록을 늘어놓곤 했다. 그게 바로 어젯밤에 나눈 대화였다.
 


…어떻게 할까. 홍서대입구역 4번 출구 앞으로 펼쳐진 널따란 광장으로 눈을 들었다가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려 날짜를 확인했다. 오늘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짜를 착각한건 아니고, 시간을 착각한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 번 더 통화버튼을 눌러봤는데, 이제는 아예 전화기가 꺼져있다며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
 


수많은 인파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뤄 제 갈 길로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지완이는 오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생각했다가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닐까, 저기쯤 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5분만 더, 5분만 더, 하던 것이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 이유도 없이 연락이 되지 않는 아이가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그만 갈까. 남자친구와의 만남이 길어져서 오지 못 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한없이 지완이를 기다려야 하는 날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라면. …나는 더욱이 서지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 입구를 향해 뒤를 도려는데,
 


“윤소올~~~!”
 


하고, 인파 속에서도 또렷하게 지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마음에 뒤를 돌자 여느 때처럼 저 멀리서부터 달려와 한 품에 쏙 안겨오는 지완이 미안해, 하고 말을 잇는다.
 


“아, 진짜. 진짜, 진짜! 미안해 솔아.”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지완은 버스를 놓쳐서, 오는 길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꺼져서, 혹시 집으로 돌아갔으면 어쩌나, 아니, 아직도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 하며 이제야 왔다고. 그런 말을 순식간에 쏟아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힝, 하고 말을 잇는 지완이를 보자 혹시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닌지 걱정하느라, 남자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있을 지완이를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난 두 시간 여의 시간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어? …어.”
 


원망의 말을 할 수도,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다그칠 수도 없어서 괜찮다고 답해본다. 그리고, 걱정했던 만큼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질문을 했는데, 대답이 영 시원치 않다.
 


“근데, 손이 너무 차가운거 아니야?”
 

지완은 순식간에 화제를 돌려 어디에라도 들어가 있지 바보같이 왜 기다렸냐며, 속상한 얼굴을 하고서는 내 손을 만져댄다.
손과 발은 이미 추위에 감각을 잃은지 오래인데, 지완의 따뜻한 손길이 닿자 금세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가자! 따뜻한 거 먹자. 오늘 내가 살게!”
 


지완은 내 손을 잡아 끌며 또, 조잘조잘 말을 잇는다.

 

“아, 맞다. 솔아. 나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어? 왜?”
“아, 너 만나러 가야 된다고 했더니, 이런 날 무슨 친구를 만나냐고 하잖아. 자기랑 더 있다 가라고 해서 엄청 싸우다가 그냥 헤어지자고 했어.”

 

지완은 그래서 늦은 것도 있다며 정말 미안하다고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아서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지완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지 21일 째. 이별을 했는데도 슬픈 기색은 하나 없고, 이번엔 좀 오래 가려나,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보다. 그리고 이러한 지완의 이별 소식에 조금 안도하는 나는, 조금 어리석고, 조금 바보같다.


 






“그리고, 재미없더라고.”
“……….”
“너랑 노는게 더 재밌어.”

 

지완이 그런 말을 하며 팔짱을 껴온다. 그 말이 나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서지완은 모르면서, 또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마음을 흔들어댄다.
 


“하여간. 절친이랑 자주 만나는 걸 이해 못 하는 사람은 만날 필요가 없어.”
 


서지완이 콧김이라도 뿜어낼 것처럼 흥분하며 말을 잇기에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어? 왜 웃어?”
“…그냥.”
 


좋아서.
그 말은 울대 밑으로 남겨 놨다.
 


“우리 오늘 영화 뭐 볼까?”
“글세.”
“내가 보고 싶은 거 봐줄거야?”
“그러지 뭐.”
“아싸! 역시 윤솔이 최고다!”

 

온 몸을 감싸 안듯 팔짱을 껴오며 웃음 짓는 너를 바라보며, 나는 웃는다.
 


“됐거든.”
 

몸의 중심을 쏟아내듯 나에게 기대오는 너를,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향해 웃음 짓는 너의 얼굴 너머로 스쳐가는 너의 모든 계절을 나는 사랑한다. 너의 열여섯의 봄을 사랑하고, 열일곱의 여름을 사랑하고, 열여덟의 가을과 스무살의 겨울을. 스물 하나, 스물 둘. 너의 모든 계절과 세월을. 너의 모든 청춘과 시대를. 너의 삶과, 너라는 존재를. 나는 사랑하고, 또 사랑해 마지않는다.

 

“윤솔. 사랑해~”
“……….”

 

그리고 나란히 팔짱을 끼고 걷는 걸음마다 나의 7년의 세월을 함께 바라본다.
나를 좋아하는 서지완. ―그리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 서지완.
그 사실은 나를 기쁘게 하고, 또, 나를 절망하게 한다.
 


“어쭈? 대답 안하네?”
“…춥다. 빨리 가자.”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해가 바뀌면 우리는 어느덧 8년째 친구 사이.
내가 너를 사랑한 세월, 2325일.
나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서지완의 곁에서 머물던 시간.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나는 계속해서 너의 곁에서, 너를 떠나지 않는 곳에서, 이 자리에서.
여전히 머무르며 너를 사랑하겠노라고.

 

오늘도 절망에 가까운 사랑을 등 뒤에 숨기고, 너를 사랑하는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한다.

 

 


 

궤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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